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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 견성의 길
명상서재 2018-09-04 23:58:25 | 조회: 2829
*... 달마, 마음이 부처이다.1/6

삼계가 어지럽게 일어나도
모두가 한 마음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그 말은 곧 한 마음에서 삼계가 일어났음을 뜻한다.
그와 같은 한 마음을 깨닫는 것이 불도라면
한 마음 아닌 곳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불도는 생각을 쉬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고통을 벗어나 진리를 깨닫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한들 밝히고 싶은 욕구만으로는
번번이 좌절의 쓴 잔을 마셔야 한다.

모든 깨달은 분들은 마음으로 마음을 전했으며
언어 문자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은
언어로써 뜻을 얻으면 통발은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구하면서 배워 얻으려 하면
온통 한 마음 아닌 곳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마치 물고기가 물을 찾는 것과 같고
뭍에 사는 동물이 허공을 찾는 것과 같다.

그래서 깨달음을 찾고 구하는 자를 중생이라 하고,
찾음이 끝난 자를 각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찾음이 끝났다는 것은 찾음의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잠시 묻어둠이다.
언젠가는 다시 꺼내 들어야 하는
숙명을 지닌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옛날부터 살아온 모든 시간과 장소들이
모두 우리의 근본 마음이며, 근본 부처로 살았으며
묻고 답하는 것이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마음이 없다면 어찌 묻고 대답하며 가고 오며 앉고 눕겠는가.
말하고 걷고 앉고 눕는 그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
어째서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 것인가,

*... 달마, 마음이 부처이다.2

달마대사는 이르길, 이 마음을 떠나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는 것과 같아서
애를 쓴다 해도 허공을 어찌 붙잡을 수 있느냐고 하였다.

불도란 붙잡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고달파진다.
그런데도 지어놓은 업력 때문에 선뜻 놓을 수도 없다.
마음은 항상 무언가가 되어가려는 뜻을 지녔으며
그로 인해 집착이 달라붙어 있다.

마음을 이 마음과 저 마음으로 나누는 것은
허공을 갈라놓으려는 것과 같다.
허공이 가른다고 갈라지는 물건도 아니지만
우리가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생멸변화를 일으키는 생멸심을 가리키고 있다.

그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붙잡아 불도를 이루려 하면
허공을 붙잡는 것처럼 어리석음만 쌓여갈 것이다.
이미 두 가지로 나뉜 마음은 좀처럼 다시 붙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마음으로 본성을 찾고자 하는 미혹함이 끝나야
마음이 온전한 상태를 회복하게 된다.
그것이 부처를 증득하고 보리심을 얻었다고 말한다.

근본 마음과 근본 부처로써 살지 않았던 적이 없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본성을 밝히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육신으로 일으킨 생멸심을 주인으로 여기는 탓이리라.
그런 까닭에 끝없이 무명을 전전하고 있다.

앞으로도 생멸변화를 일으키는 그 마음을 앞세워
부처와 보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 마음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착각 속에
여전히 무명의 길 위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허공을 움켜쥐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닐 것이다.


*... 달마, 마음이 부처이다. 3

허공은 이름일 뿐 형상이 없으니 잡을 수가 없다.
이렇듯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찾는 것도 헛일이다.
부처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마음을 떠나 어찌 부처를 찾으려 하는가,
마음 떠나 부처 없고 부처 떠나 마음 없으니
만약 마음을 떠나 부처가 있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이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가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부처란 견해를 다시 일으키는가,
이는 서로를 속여서 본심(本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깨닫지 못하니
부처는 허물이 없으나 중생이 미혹에 빠진 탓이다.

자기 마음이 그대로 부처인 줄 안다면
부처란 견해도 내지 않으며 찾을 필요도 없다.
무언가를 찾고 구해서 멈춘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스스로 밝고 묘한 것이 깨달음이라서
밝힐 바가 없는데도 중생들이 이를 알지 못한 탓에
허망하게 밝혀야 할 깨달음이 되었으며,
깨달음은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건만
밝힘으로 인하여 밝혀야 할 것이 허망하게 생겨났다.

이처럼 본래 밝은 본각(本覺)을 두고
밝혀야 할 것이 망령되게 이루어진 탓으로,
같고 다름이 없는 가운데서 같고 다름이 생겼으며
같음과 다름을 구분하니, 다시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음이 성립되어 있음과 없음도 나타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보고 듣고 맛보는 작용들이 생겨나
흔들리고 어지러운 것이 서로 작용하면서
피로가 생기고 피로가 쌓여 오염과 번뇌가 생겨나서
번뇌가 움직여 일어나면 세계가 되고,

고요하게 있는 것은 허공이 되나니
허공은 같은 것이요 세계는 다른 것이니,
본래로 같고 다름이 없는 가운데 이와 같이 되었으니
이를 가리켜 현상계”라고 능엄경에서 말씀하였다.


*... 달마, 마음이 부처이다. 4

태초에 본래 텅 비어 앎만 존재하던 고요한 가운데
까닭없이 앎으로써 앎을 밝히려는 것이 나타나니
그것이 무명인지라 그로 하여금 본래 텅 빈 고요함 속에서
같음과 다름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있음과 없음도 나타나서
다름과 있음은 세계가 되었고,
같음과 없음은 허공을 이룬 것이다.

내가 나라면 이것이 나라는 견해를 지을 필요가 없는데도
견해를 짓는다는 것은 말로 가리키는 것과 같아서
이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부처라는 견해를 다시 일으키므로
찾고 구함을 멈추지 못하는 무명에 빠져 있다.

나라는 견해를 일으킨다는 것은
가리키는 나와 가리킴을 당하는 나가 있게 되고,
가리키는 쪽은 내가 아니어야 나를 가리킬 수 있지만
본래의 나를 가리키는 내가 허망하게 생겨났기에
이것이 원초적 무명이므로 허공만으로 존재한다면
허공이라 부를 그 무엇도 없으련만 고요한 가운데
오염과 번뇌가 생겨나, 허공과 세계가 나타난 것이다.

내가 나를 붙잡을 수는 없을 터
손으로 나를 붙잡는다면 손은 내가 아니어야 한다.
이와 같아서 부처를 찾는 것은 이미 마음을 떠났으니
이 마음을 떠난 거기에 어찌 부처가 있으리요,
어떤 견해라도 짓게 되면 이미 거짓된 나를 세운 것이라
붓다는 견해 짓는 모든 것을 악마라 규정한 것이리라.

수행이란 견해가 들지 못하도록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함이며
모든 부처와 조사가 이를 말미암아 무상각을 이룬 것이니
마음 그대로 부처이면서도 부처를 찾는다면
사방을 다니며 물을 찾는 물고기는 어리석다 말하지만
우리도 역시 찾고 구함을 스스로 멈추기 전에는
물 찾는 물고기와 다를 바 없으리라.

자기 마음이 그대로 부처인 줄 안다면
더 이상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찾고 구함을 완전히 끝내는 것이며
인간으로서 그보다 더한 영광과 축복은 없으리라.


*... 달마, 마음이 부처이다. 5

그러나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는다면
컵이 빈 것을 모르고 계속 비우려는 사람과 같고
모자를 쓰고도 땅만 헤집으며 모자를 찾는다면
모자를 찾을 길 없듯이 끝끝내 부처를 알 길이 없다.

이것은 모두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모르고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밝히고자 부처를 찾기 때문이니
견해를 짓거나 깨달음을 보려는 장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달마대사는 마음이 부처임을 보려면
견성(見性)을 해야 부처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견성이란 성품을 본다는 뜻이지만 무엇이 보는가,
성품이 스스로 보는 것이니 주체와 객체로
나눌 수 없는 그것이 성품을 보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성품은 생멸심과 달리
물들거나 변해감이 없이 늘 그대로 거기에 있다.
내면을 지켜보는 한 물건은 언제나 한결같으며
물들지 않고 변해감이 없다는 것은 허공과 같아서
생겨난 적도 없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 성품이며 본래 마음이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견문각지가 그대로 성품이며
성품은 곧 지켜봄이며 알아차림이다.
그런데 여기에 견해의 장애가 붙게 되면
허망함이 생겨나는데 그것이 생멸하는 마음이다.

성품을 덮어버린 생멸심을 통해
분별·비교·선택의 의도를 지니며
그것이 고통의 늪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그러나 생멸심은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물을 보고 들으면서 쌓인 그림자와 같은 것,

그래서 사람마다 제각각 마음 씀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에 따라 부정적인 사고와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는 등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성품에는 어떠한 견해도 달라붙을 수 없으므로
작위를 지닌 마음과는 속성을 달리한다.


*... 달마, 마음이 부처이다. 6

변함없이 늘 그대로인 것은 허공과 같아서
온 세상의 모든 만상이란 그 바탕에서 생멸하므로
그것 아닌 것은 하나도 없기에
모든 생명체는 진화가 가능한 것이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가 실상은 다를 바 없기에
캄캄한 동굴에서 사는 생물은 눈이 필요 없는 대신
생존에 필요한 다른 감각기관이 발달한다.
만일 주체와 객체가 동떨어져 확연히 다르다면
생명체의 진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성품이란 텅 빈 스크린과 같고
생멸심은 영상이 스쳐감과 같다.
성품의 스크린이 우리들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에
보고 듣고 맛보며 촉감하고 뜻을 일으키는
모든 것이 스크린에 투영되고 있다.

감각기관에서는 육근으로 나뉘어져 눈은 보기만 하고
귀는 듣기만 하고 피부는 촉감을 느끼지만
내면의 스크린에서는 하나인 전체로써 존재한다.

육근의 작용이란 보이고 들리는 형상과 소리 등을
내면의 스크린으로 당겨오는 매개체일 뿐이다.
그래서 잠들어 의식이 없고 눈이 감겨있어도
꿈을 꾸면 생시와 똑같이 보고 듣고 생각을 일으킬 수 있음은
내면의 스크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본 형상이나 귀로 들은 노래 등은
내면의 스크린에 담겨 있으므로 떠올려 기억할 수 있다.
육신을 바꿔 태어나도 스크린은 항상 그대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과거 생에 마음먹은 인자들이
현생에서 모습을 드러내도록 업력이 그림자처럼 달라붙는다.

우리들 내면에 스크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곧 내면 스크린이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번뇌와 고통에 물들지 않는
불멸의 존재임을 알게 되고, 온 세상의 모든 것은
단지 스크린을 지나치는 아지랑이와 같아서,
중생과 부처, 번뇌와 해탈, 생사와 열반조차도
허공 꽃처럼 매달릴 필요가 없는 공허한 것들뿐이다.

타는 듯한 욕망의 불길이 꺼지고 나면
더 이상 찾고 구함이 끝난 것이며
영원히 번뇌를 벗어난 평안에 이르리라.


달마 견성의 길 중에서 .... 무각스님 저서 부크크 출판사
무비큰스님 인터넷 법당 염화실에서 계속 연재중입니다. _()()()_
2018-09-04 23:58:25
124.xxx.xxx.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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