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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남진의 오로빌 공동체와 인도 탐방기 (3)3. 숙명론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간디와 암베드카르나는 내 수첩의 첫 메모를 '간디'라는 글자로 시작하였다.

간디라는 두 글자는 인도 어디를 가나 그로부터 피해갈 도리가 없다.

북부든 남부든 어디나 간디라는 이름의 길이 있었고, 지팡이를 들고 도티(천을 허리춤에 몇 번 둘러 입으면 되는 전통 인도의상)를 두른 간디 동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간디'라는 글자에 이어서 더욱 또박또박 쓴 글씨는 겉으로 보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혹은 주로 경유하는 인도 여행지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암베드카르'였다.

'간디와 암베드카르!'이들 두 명의 위대한 인도인은 모두 미국, 영국 등에 유학하여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인도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독립인도의 기초를 닦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출생 신분과 성장과정, 불가촉천민의 해방에 대한 입장은 매우 달랐다.

간디는 인도인들에 의해서 '파푸'(아버지의 친근한 말?)라 불렸다.

간디는 바이샤(상인)계급 출신이며, 그의 조상은 근대국가 성립 이전 토후국의 총리를 지낸 가문 출신이다.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는 힌두의 사성계급 밖에 존재하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 출신으로 힌두사회의 억압적 법률(마누법전-이 법전에는 하층계급이 베다의 독경소리를 들었을 경우 납을 녹여 귀에 붓는 징벌도 있음)을 대체하였고, 그의 이런 노력들로 인해'자이 빔'(Jai Bhim - '암베드카르에게 승리를!'의 뜻)이라는 일상적 인사말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간디는 영국인에 의해 1등 칸에서 쫓겨나는 멸시를 당하였으나, 암베드카르는 '초등학교시절 공책을 교사에게 건네줄 수 없으며 물을 마실 때에도 신체적 접촉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위에서 입에다 부어주는 물을 받아 마셔야 했고, 그 지역의 이발사에게 이발을 거부당해야만' 했다.

영향력 있는 사회지도자가 되었을 때, 간디는 비록 재산을 축적하지는 않았으나 그에게 거처할 저택을 제공해 주는 부호들이 많았으나, 암베드카르는 '법무부장관, 법과대학원장, 선출직 공무원의 직업을 가졌음에도 주택소유를 제한 받거나 구타를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등 계급적 폭력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에게 하리잔(신의 아들, 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그 스스로 다시 태어난다면 하리잔으로 태어날 것이라며 불가촉천민에 대한 보호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불가촉천민이 힌두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오랜 전통인 힌두교를 버리고 개종하는 것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암베드카르는 사성계급이 있는 한 사성계급 밖의 불가촉천민도 있다며 힌두의 사성계급 폐지를 주장했고, 인도헌법을 기초할 때에는 불가촉천민의 분리된 선거구를 주장하여 간디와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나 간디의 단식협박에 자신의 안을 수정해야 했다.

또한 '앞으로 올 사회에 알맞은 종교는 도덕성이 있어야 하고, 과학적 이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자유와 평등 그리고 우애를 나타내며, 빈곤을 정당화하거나 신성시해서는 안 된다는 4대 기준을 제시'하고, 사망하기 6주전에 50여만 명의 불가촉천민과 함께 이러한 기준에 부합된다고 생각했던 불교로 개종했다.

이것이 내가 본 자료들에 한정된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말할 수 있는 간디와 암베드카르의 다른 점이다.

그러나 나의 이어지는 메모는 이런 실천의 차이들이 현대의 인도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겠는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간디가 인도의 진정한 자치와 독립일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강조하였던 인도인들의 게으름, 나태, 방종, 불결, 가난, 무지의 극복이란 과제가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가 하는 그 당시 그들의 문제의식과 사명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 나라와 같이 인구 1억이 되지 않는 작은 규모에서가 아니라 10억이 넘는 사람들의 나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접촉해서는 안될 부정한 동물 정도로 여기는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태생적 차별이 엄존하는 나라, 태생적 신분에 얽매인 직업을 현세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업)이며 오직 여섯 번의 윤회라는 긴 세월만을 가능성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의 나라에 태어난 그들의 짐을 한번쯤 져보기로 한 것이다.

사람들은 인도를 시간이 정지되어버린 명상의 나라라든가, 힌두교의 문화적 포용성이라든가, 부귀와 빈곤의 격차에 대한 무심함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좋게 말하곤 하지만 나는 단번에 이것이 극복되어야 할 숙명론의 다른 표현이라고 서슴없이 규정했다.

그래서 나는 인도여행에서의 화두를 숙명론은 어떻게 극복되며, 간디가 말한 진정한 자치(自治, 스와라지)와 자조(自助)는 어떻게 달성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고 뚜렷하게 적었다.

타지마할의 까마귀첫날 투숙했던 그랜드호텔에서 뷔페식 아침식사를 마치고 전세버스에 올라 호텔 문을 나섰다.

타지마할과 아그라성을 관람하기 위해 자동차로 4시간 이상 걸리는 아그라까지 가는 것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델리 시내의 표정은 4년 전에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 방문을 위해 지나쳤을 때보다 훨씬 생동감이 있어 보였고 생활의 의욕이 느껴졌다.

안내인인 '씽'이 현재 한국어 공부를 한지 2개월 되었다고 하는 동생을 소개하며, 델리에 있을 동안 한국어를 익히기 위해 동행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것도 의욕이 넘치는 장면이다.

'씽'은 이어서 오늘 하루의 일정을 설명했다.

오늘 우리가 '릭샤'를 타게 될 것이라면서 차창 밖을 보면서 열심히 설명한다.

릭샤는 사람이 끄는 세발 자전거 택시이다.

세발 오토바이처럼 생긴 것은 '오토릭샤'라고 한다.

그밖에 우리 나라와 같은 정식 택시가 있다.

차창 밖 델리 시내의 거리는 이 릭샤와 오토릭샤, 오토바이, 자동차, 버스가 온통 섞여서 수시로 경적을 울려대며 다닌다.

대부분의 차들은 옆거울(사이드밀러)이 없거나 아예 접고 다닌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오토릭샤는 손으로 좌우회전과 서행과 정지를 표시했다.

나중에 감을 잡은 것인데 깜박이가 필요 없이 오른손을 내밀며 흔들면 우회전이고 왼손을 내밀며 흔들면 좌회전, 손을 내밀어 아래위로 흔들면 서행이나 정지 신호인 것 같다.

여기다가 2층버스와 교통난 해소를 위해 한창 진행중인 지하철 공사장까지 가세한 거리는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인도여행 내내 나는 교통사고 한번도 목격하지 못했고, 충돌 직전까지 가는 경우를 보긴 하였으나 차를 세워놓고 내려서 시비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그저 놀란 표정이나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나서는 금방 자기 갈 길로 갔다.

그것이 인도인의 너그러운 마음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체념의 일종인지 나는 결론 내리고 싶지 않다.

아그라의 쉐라톤호텔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그늘에 쉬고 있자니 호텔 앞에 릭샤가 한 줄로 늘어선다.

여행사 쪽에서 한꺼번에 요금을 지불하기로 한 모양이다.

우리 일행 중 누구도 선뜻 릭샤에 오를 마음을 내지 못하는 것 같다.

릭샤라고 하는 이 세발자전거 택시를 끄는 사람들은 모두 그야말로 깡마른 몸이었고, 제일 앞 릭샤 운전수는 머리가 허옇게 쇤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일행 중에 어느 분이 '우리가 이용해야 먹구 살지!'하며 먼저 릭샤에 오른다.

우리 중에 체구가 큰 사람은 되도록 젊은 운전수가 끄는 릭샤에 타자고 했고, 몸무게가 무거운 사람끼리는 타지 않으려 했다.

나는 호텔 방을 같이 쓰는 윤영선 국장과 함께 탔는데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혹시나 가는 도중에 오르막길이라도 나오면 좌불안석, 어떻게 앉아 있으란 말이냐! 다행히 가는 도중 단 한번 약간의 오르막 길이 있었으나 이후 기다란 내리막 길이 이어졌다.

천만다행이다.

그리고 릭샤 운전수들끼리 서로 추월하며 장난도 치고 해서 마음이 좀 가벼웠는데, 힌디어로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농담을 하고 웃는 모양이 자기는 가벼운 사람만 태웠다면서 다른 운전수를 골리는 것만 같아 덩치 큰 윤영선 국장과 같이 탄 것이 영 후회스러웠다.

내 마음을 알아보았는지 윤영선 국장이 내리면서 운전수에게 팁 1불(45.5루피)을 내민다.

타지마할 입구에 도착하니 경찰들이 소지품 검사를 했다.

비행기 탑승할 때도 허용이 되었던 휴대전화를 이곳에서는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담배와 라이터는 물론이다.

검사를 마치고 입장해서 조금 걸어가니 역사책에서만 보았던 타지마할이 눈에 들어온다.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는데 그곳에 진을 치고 있던 사진사들이 우리 일행의 사진사들(?)과 함께 무조건 사진을 찍는다.

나중에 관람을 마치고 나와보니 벌써 사진을 찍힌 사람들 수만큼 빼놓고 사야 한다고 억지다.

억지 반, 추억 반 - 그리고 사진도 웬만큼 나온 것 같았기에 - 사진들을 거의 샀다.

물론 나는 마음을 굳세게 먹고 끝까지 모른 척 했다.

'너의 전대에 잔고를 생각하라!'우유 빛 대리석으로 빚은 타지마할이 멀리서 들어온다.

타지마할 첨탑 위로 까마귀 한 무리들이 난다.

일행들이 사진에 빠진 사이 나는 혼자서 타지마할 묘당으로 걸어갔다.

네모난 긴 못을 사이에 두고 커다란 나무가 두 줄로 서있는 길을 지나 우유 빛 대리석이 시작되는 곳에서 신발을 벗거나 신발을 감싸는 덧신을 신어야 대리석 위로 오를 수 있었다.

인디안들로 가득 찬 묘당 안에 들어가니 아무 것도 없었다.

황금 관이 있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은 굵다란 철근 같은 것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인도 최고의 건축 유산이라고 하기에는 실망이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고 타지마할 본당을 돌며 동탑과 서탑으로 갔다.

밖에서 보니 타지마할은 마치 거대한 한 개의 대리석 산을 깎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정교했다.

거대한 대리석 벽에 상감된 이방연속무늬들과 조각된 꽃들. 타지마할의 뒤를 끼고 도는 강줄기와 어우러져 서있는 동탑과 서탑의 아름다운 구도가 마음에 들었다.

타지마할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곧바로 아그라 성으로 이동했다.

아그라성은 타지마할을 지은 인도 무굴제국의 제5대왕 '샤 자한'이 그의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유폐되었던 곳이다.

붉은 색 사암으로 지어진 아그라성. 그 성안의 대리석 누각에 오르니 아스라이 타지마할이 보인다.

뿌연 먼지 혹은 강물에서 오른 수증기 같은 것에 쌓여 선명히 들어오지 않는 타지마할. 나는 그것이 '샤 자한'의 왕비에 대한 애절한 사랑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인도인들의 믿음 속에 있는 인간의 6번의 윤회 중의 어느 한 생애. 가난한 이들이 소망하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날 내생. 그런 현생을 포기한 내생에 대한 아스라한 꿈처럼 간절하고 측은하게 느껴졌다.

<4편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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