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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남진의 오로빌 공동체와 인도NGO 탐방기 (4)4. 빗나간 간디 아슈람
[편집자]참여불교재가연대 기획실장 윤남진 법우가 4월 13일부터 22일까지 9박10일간 <시민의 신문>이 주최한 ‘NGO 인도연수'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불교정보센터는 참여불교재가연대와 함께 윤남진실장의 오빌로공동체와 인도NGO 탐방기를 몇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열독(?)부탁드립니다.



아그라성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4시간 반을 달려서 델리의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씽’이 오늘이 암베드카르의 탄생일이며, 국가공휴일이라고 한다.

아마도 암베드카르를 기억하는 불가촉천민들 지역에서나 기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 아그라에서 델리의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암베드카르를 기념하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생전의 계급적 편견이 사후에도 지속되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했다.

도중에 전세버스를 모는 운전기사가 나이 지긋해 보이는 데다 점잖은 신사의 풍모를 풍기는지라 버스운전기사 월급이 어느 정도나 되나 씽에게 물으니 운전기사는 약3,000루피 정도이고 조수는 1,500루피 정도를 받는데 벌이는 좋은 편에 속한단다.

인도의 전세버스는 대부분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먼길을 장시간 운전해야 하기 때문에 운전석과 승객의 좌석사이에 유리로 된 문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운전석 오른쪽에 조수석과 주로 정수된 물을 넣고 다니는 아이스박스 같은 것이 필수적으로 있다.

조수는 자동차 청소, 주차나 정차할 때 수신호 도움, 승하차할 때 버스의 맨 아래 계단을 빼었다 넣었다 하는 일 등등의 잡무를 맡아했다.

저녁 9시 30분 경에 호텔에 도착했다.

오늘 저녁은 호텔 내 일식당이다.

한국의 일식당이라면 나는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 때 따뜻한 정종을 한잔 마실 수 있는 곳 정도의 기분을 가지고 있을 뿐 일식요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정종대포가 있느냐고 우리 여행사 인솔자에게 물어보았더니 ‘청주’가 있다고 했다.

큰 컵으로 한잔씩 파는 대포를 기대했는데 조그만 호리병에 따끈한 청주를 담아 내왔다.

소주잔 보다 작은 찻잔 정도로 세잔 정도를 했는데 금방 취기가 올랐다.

아마도 일부는 첫날 일정을 마친 여독을 풀고 일행 사이의 서먹함을 풀기 위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한잔 더 할 모양인데, 나는 먼저 올라와 잠자리에 들었다.

샤워를 하고 잠을 한참 청하고 있는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밤12시가 지나는 것 같았는데 옆방에서 판을 벌린 모양이다.

전화한 이유는 내가 싸 온 멸치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결국 함께 어울리자는 것이겠다.

윤영선 국장과 함께 멸치를 한 봉지 들고 건너가보니 멀쩡한 정신으로는 그 자리에서 어울리기 힘들 정도로 흥이 올라 있었다.

장실장님과 성처장님, 이근행 선생님이 주동이 되어 조금씩 챙겨온 팩 소주와 방안 냉장고의 조그만 양주들을(이걸 ‘미니 바’라고 불렀다) 싹쓸이하고 있는 것이다.

양으로 볼 때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내일 호텔 나갈 때 얼마의 돈이 청구될 것인지 매우 걱정스러웠다.

결국은 흥이 오른 몇 사람들의 기에 눌려 맹맹한 두 사람은 밤 2시까지 그 자리를 피할 적절한 핑계를 찾지 못하다가 나부터 겨우 빠져 나왔다.

8개 종교의 성화가 그려진 공동예배당4월 15일 아침. 우리는 간디아슈람(불가촉천민공동체), 간디 화장터 분향소, 간디 기념관 등을 탐방하기 위하여 차에 올랐다.

나는 작년에 무려 860여 쪽에 달하는 <마하트마 간디>라는 제목의 전기를 읽고 우리 단체에서 내는 잡지에 소개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전기에 쓰여있던 간디가 요하네스버그에 세웠던 아슈람(공동체)의 풍경을 떠올리며 그 당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득 안고 마음은 설레었다.

전기에 적힌 간디 아슈람의 풍경을 옮기면 이렇다.

‘카페인이 없는 캐러맬 커피를 만들어 먹고, 오렌지로 마멀레이드를, 땅콩버터도 직접 만들었다.

샌들을 만드는 기술을 익혀 남는 샌들은 친구들에게 팔았다.

목공반에서는 학교의 걸상과 서랍을 만들었으며 농장의 생활은 극히 간소하게 유지되었다.

남자들은 서로 도와 면도와 이발을 하였고 여자들은 노동복을을 만들었다.

음식은 아침6시, 11시, 저녁6시에 (죄수들이 먹는 것과 같은 그릇에?) 담아주었고, 철저히 채식주의적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나무숟가락은 농장에서 만들었다.

저녁식사 뒤 기도문을 낭송하고 기도송을 불렀고, 『라마야나』나 이슬람에 대한 책을 몇 구절을 듣기도 했다.

아홉 시에는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 아슈람에 도착하니 중년의 선생님과 아슈람 초창기부터 계셨던 머리가 허옇게 쉰 할아버지 한 분이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시다 우리를 맞는다.

이곳 아슈람은 간디가 불가촉천민에게 교육이 가장 절실한 과제라고 생각하고 세운 일종의 학교이다.

이곳 아슈람에서 각지의 21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조금 걷다보니 둥근 정자모양의 건물이 나타났다.

이곳은 간디가 꿈을 꾸었던 곳인데, '신은 하나다'라는 의미로 모든 종교가 함께 예배할 장소로 건립했다고 한다.

예배당 안에는 어린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둘러앉아 우리를 맞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예배당 안에 들어가 앉으니 천장으로 둥글게 돌아가며 8개 종교의 성화가 그려져 있었다.

마침 내가 앉는 곳에서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부처님과 최초의 다섯 제자를 그린 성화가 보였다.

일행이 모두 자리를 잡자 인사를 나누고 어린이들이 기도문을 합송했다.

업의 소멸과 선업을 쌓기를 기원하는 기도라고 했는데, 나도 합장을 한 후 눈을 감고 어린이들의 기도소리에 젖어들었다.

마음이 금새 차분히 가라앉았다.

어린이 대표가 단장님을 비롯한 우리 대표단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었고 우리는 훈민정음이 인쇄된 한지로 포장된 선물을 교장선생님에게 전달했다.

어린이들이 너무 맑고 귀여워 나도 용기를 내서 어린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학교 안 어린이들의 기숙사, 식당 등을 둘러보았다.

기숙사는 깨끗한 마루로 된 방이었는데 한 방에 12명의 어린이들이 지낸다고 한다.

다른 일행이 이런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들으니 이곳은 300명의 어린이들이 있는데 1달에 학생 1인당 3천500루피가 든다고 하며, 이중 50%는 정부의 지원을 받고 나머지 50%는 기부로 충당된다고 한다.

학생들 모집도 쉬운 게 아니어서 대부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돈벌이를 시키려고 한단다.

교사 한쪽에 간디가 북인도에 올 때에 늘 머무르던 숙소가 보존되어 있었다.

현재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빈곤층 대학생을 위한 무료 숙소로 내주고 있는데 조만간 기념관으로 내부를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나누어준 일정표에는 ‘델리의 불가촉천민공동체 방문’이라고 되어 있어서 나는 전기에서 읽은 그런 곳을 상상했었는데 이곳은 빈곤층 어린이들을 위한 기숙학교라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우리 나라에 비기면 고아원 혹은 사회복지시설과 같은 느낌이다.

공동체라고 할 때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자조(自助)나 자립(自立)의 구조가 아니라 외부적 지원에 의존해 있는 곳이었다.

더욱이 간디의 후광에 많이 의존해 있는 듯했다.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사전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이곳 ‘아슈람’에 대한 오해라서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씁쓸했다.

내가 알기로는, 혹은 내가 간디의 여러 가지 주장과 노력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간디가 ‘자조(自助)’, ‘자립(自立)’, 자정(自淨)‘을 인도의 진정한 자치와 독립의, 그가 설립한 공동체의 근본정신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나는 간디의 이런 노력의 흔적들을 찾을까 기대했다.

나는 결국 어린이들과 여러 종교의 합동 예배당에서 함께 한 업의 소멸을 위한 기도로 그가 추구했던 전통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우리는 아슈람을 떠나 간디를 화장했던, 지금은 분향소로 꾸며져 있는 곳으로 갔다.

둥근 성채처럼 석축이 두르고 있는 공원에 입장하기 전에 우리 일행은 모두 신발을 벗어야 했다.

이곳에서 신발을 벗는 것은 일종의 성스러움의 표시인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힌두교에서는 신발은 죽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부정한 것이라서 성스러운 곳에는 신고 들어 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후에도 매우 자주 신발을 벗어야 했는데 맨발이 황토나 멍석, 혹은 뜨거운 볕에 의해 데워진 돌에 닿는 기분이 좋았다.

간디분향소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커다란 검은 대리석 제단에는 힌디어로 무언가 쓰여져 있었다.

설명을 들으니 그 글자는 간디가 흉탄에 맞아 쓰러지면서 남긴 그의 마지막 말, ‘오! 신이여’라는 것이다.

덧붙이는 설명이 인도인들은 간디가 죽음 앞에서 신을 찾은 것은 그의 고도의 내면적인 성숙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고 한다.

죽음으로 가는 간디의 발걸음이어서 우리는 간디기념관을 방문했다.

간디가 암살 당했던 장소가 있는 저택을 기념관으로 만든 곳이었다.

간디의 일생을 보여주는 기록사진과 간디와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장면을 밀랍인형으로 꾸며놓은 곳과 간디의 생전 유품들이 전시된 곳을 지나 간디가 죽기 전에 사용했다는 물레가 전시된 거실을 나오니 오솔길처럼 좁다란 길이 길게 펼쳐진다.

그 좁다란 길 위에 사람의 발 모양을 찍듯이 볼록하게 솟은 발자국이 연속되어 있었다.

간디가 거실에서 나와 그를 찾은 군중들을 향해 걸어가 마침내 힌두교도인 동족의 흉탄에 쓰러진 곳까지 그의 발걸음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간디가 남긴 역사의 족적과 같이 뚜렷한 그 발자국에 나의 발걸음을 맞추어 한 발짝씩 걸어가며 오랜 세월 우러난 역사의 체취를 느껴보고자 했다.

간디의 흔적과 만나고 난 여진에 머리가 무거워 있던 중에 공교롭게도 다음 관람 코스는 국회의사당과 대통령궁 등이 있는 인도의 정치1번지였다.

버스에서 내릴 수는 없었고 그냥 차에 탄 채로 빙글빙글 두 바퀴를 돌았다.

밖에는 총을 지닌 군인들이 있었으나 그늘에 앉아 편히 있으면서 우리가 탄 차를 가끔 쳐다보는 것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정도였다.

군기 잡힌 우리 나라의 청와대 경호원과는 사뭇 다른 여유만만이다.

버스가 둥글게 두 바퀴 째 접어들려고 하는 찰나 성여경 사무처장님의 일갈이 머리를 친다.

“내가 인도 국회의원 만나면 한번 물어 볼라 그래. 도대체 당신들은 무슨 생각으로 국회의원 하느냐고...” 그랬다.

나중에 첸나이 현대자동차공장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인도의 현재 정치쟁점 중에 하나가 일부 주에서의 '개종금지에 관한 법' 제정 논쟁이라는 말을 듣고 성처장님의 불만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디의 자조와 자립의 공동체정신도 계승되지 못하고, 암베드카르가 단행한 불가촉천민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제도적 보장도 위축되는 현실이라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힌두교가 지닌 긍정적인 가르침과 자유로운 선택권을 보장하는 근대적인 개혁의 알맹이가 빠진 인도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첸나이의 바자르(시장)와 현대자동차 공장을 방문해서 조금씩 찾아갈 수 있었다.

※ 다음에는 <5. ‘영’(0, 零, ZERO)의 발견> 편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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