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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종교와의 관계잘못된 정치적 결정은 물론 조그마한 정책일지라도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적 진리와 양심에 의거하여 옳고 그름을 밝혀주어야만 할 것이다

흔히 정치와 종교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적대관계라고 잘못 알고 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서양에서는 정치와 종교는 언제나 긴장 관계에 있었다. 특히 종교가 지나치게 정치에 관여함으로써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정교분리는 종교가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그래서 정교분리는 곧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즉 정치와 종교는 서로 협력해야 할 동반 관계인 동시 상호 견제해야 할 적대 관계이기도 하다. 정치와 종교는 둘 다 인간들의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정치와 종교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치와 종교가 추구하는 목표는 동일하다. 하지만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접근 방법은 전혀 다르다. 정치는 법과 제도를 통해 인간들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종교는 법과 제도를 통해서는 그것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각 개인의 종교적 실천을 통해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한편 인류는 그 특질적 본성으로서 정치성과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인 동시 인간은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이다. 즉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면서 종교적인 동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정치성과 종교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정치와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일생은 넓은 의미의 정치와 종교행위인 것이다.

우리 인류는 아득한 옛날부터 정치와 종교를 통해 역사와 문화를 이룩해왔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정치와 종교를 배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정치와 종교가 인간들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정치와 종교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누구도 넓은 의미의 정치와 종교를 떠나서는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다. 비록 특정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도, 그리고 특정 종교에 입문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정치와 무관할 수 없으며, 종교적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삶이다.

그러면 정치와 종교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치와 종교는 상호 협력과 상호 견제의 기능이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잘못된 정치로 말미암아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종교는 반드시 그 잘못을 지적해야만 할 것이다. 잘못된 정치는 곧 종교의 목적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종교가 지나치게 정치에 관여하거나,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사회혼란을 초래할 경우에는, 법과 상식 혹은 공권력으로 이를 바로 잡아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건전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나가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정치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치행위란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정책이든지 그 정책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이익을 얻게 되는 집단과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는 집단이 생기게 마련이다. 즉 두 집단간의 주장이 평평하게 대립할 경우에는 정치인은 반드시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정책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동원된 의사결정 방식이 바로 다수결의 원칙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토대 위에서 건립된 것이다. 다수결의 원칙이란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언제나 이 원칙에 의해 중요한 사안을 결정한다. 그래야 과오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수결의 원칙이 만능은 아니다. 다수결의 원칙에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를테면 어떤 집단적 광기에 의해 이성이 마비되었을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는 눈밝은 한 사람의 견해가 올바른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불교 승가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항을 결정할 때에는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제를 채택하였다.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리와 다수결의 원칙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 16대 국회에서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이것도 다수결의 원칙이 가져다 준 병폐 혹은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미 TV중계를 통해 보았듯이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에서 민주주의를 가장한 폭거를 소수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도저히 막을 수 없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대통령 탄핵소추안과 같이 명백히 잘못된 정치적 결정은 물론 조그마한 정책일지라도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적 진리와 양심에 의거하여 옳고 그름을 밝혀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 정책이 많은 사람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인지 아니면 극소수 몇 명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를 가려주어야 할 책무가 종교인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종교가 담당해야 할 대사회적 의무인 것이다.

간혹 스님들이 정치적 사안에 대하여 찬성 혹은 반대의 의견을 피력하는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종교의 대사회적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고 말한 유마거사의 참뜻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종교가 이러한 대사회적 의무를 외면한다면, 이 사회에 존재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교가 사회인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것도 바로 이러한 대사회적 역할에 소극적이거나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민중들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그 민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말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베풀어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마성 스님/동국대 강사)

[본 칼럼은 조만간 강화될 불교정보센터 칼럼코너를 위해 마성스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정보센터 칼럼의 프로그램화 일정보다는 글의 시의성이 중요하다 판단되어 미리 기사화 합니다.---편집자 주]



글을 시작하며

단상(斷想)이라는 단어는 '단편적인 생각'이라는 뜻과 '생각을 끊음'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나는 이 단어 속에는 불교의 깊은 철학이 담겨져 있다고 본다. '단편적인 생각'은 세속적인 진리[俗諦]를, '생각을 끊음'은 절대적인 진리[眞諦]를 상징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진리는 현상계(現象界)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세간(世間)에 속하고, 절대적인 진리는 본질계(本質界)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출세간(出世間)에 속한다.

그런데 세속적인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언어와 문자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절대적인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언어와 문자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진제(眞諦)의 입장에서 보면 '단편적인 생각'들은 부질없는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언어가 끊어진 자리[言語道斷], 즉 생각이 끊어진 자리가 최상의 경지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말 있음[有言]을 통해 말 없음[無言]을 추구할 것이다. 나의 글은 '단편적인 생각'을 통해 '생각을 끊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나는 현실을 떠난 현학적인 문제를 다루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부터 접근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간 없는 출세간은 생각할 수도 없으며, 중생 없는 부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문제들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피력할 것이다. 오직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생각하면서. 이러한 나의 작업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나 자신도 예측할 수 없다. 네티즌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지도편달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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