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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 스님과 조선일보
도법 스님이 최근에 낸 책 『화엄의 길, 생명의 길』에는 <불교적 사고와 삶의 태도>란 제목으로 스님이 불교를 보고 실천하는 눈이 어떤가를 알 수 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실려있다.

노루 한 마리가 사냥꾼에게 쫓겨오면서 나무꾼에게 살려달라고 한다.

나무꾼은 노루를 숨겨주고 노루를 찾는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렇다면 노루를 살리려고 거짓말을 한 나무꾼의 행위는 옳은 것인가. 마침 월간 <말> 8월호 도법스님 인터뷰에 이 문제가 실려 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노루를 살려야 한다, 그건 적당주의입니다.

목적만 좋으면 과정이나 방법은 뭐든 상관없다는 그런 적당주의를 없애지 않고는 진리는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 그렇다면 생명도 살리고 진리도 지키는 방법은? "간단하지요. 사냥꾼을 붙잡고 설득해야지요. 물론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면 그렇게 해야지요. 우리는 너무 쉬운 길로만 가고 국면만 모면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치열하고 근원적인 태도만이 생명도 살리면서 진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 이렇게 보면 도법 스님이 불교를 보는 관점은 불교근본주의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말지 기자도 예리하게 보았듯이 대개의 스님들이 선사들의 언어를 따오는 것에 반해 도법 스님의 관점이 항상 부처님의 언어와 삶에 비추어 보고자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 닿아있다.

자, 이제 나의 의문을 꺼내본다.

최근 『조선일보』 7월 24일자에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은…>이란 제목의 도법 스님이 쓴 칼럼을 보았다.

칼럼의 내용은 제목처럼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은 농촌으로 젊은이들이 돌아 가는 것이 도시와 농촌 모두를 사는 길이란 말씀이었다.

아마도 이 칼럼의 내용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이 나라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외부 칼럼에 거의 붙었던 <본란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란 꼬리표가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일보에 '도법'이란 이름을 발견하고 개인적으로 도법 스님의 불교적 사고와 삶의 태도를 자양분하여 자란 나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조선일보가 그 동안 한국사회에 보여주었던 것은 '극우를 바탕으로 한 상업성과 파시즘'이었고, 끊임없이 <기득권자만이 사는 길은…> 이란 문제의식을 퍼뜨린 대표적인 언론이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예민한 독자가 아니면 조선일보가 짠 그물망에 여지없이 걸려들지만,(한석규와 채시라가 386세대라고 한다!) 내가 당혹한 이유는 조선일보와 정반대의 삶의 태도를 견지하고 살아가는 '도법'이란 두 글자가 주는 불교적 함의 때문이다.

그리고 두 모순된 상징어가 어떻게 아무런 갈등없이 이렇게 만났는가에 대한 혼란함 때문이다.

아마도 도법 스님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농업의 살림과 중요성에 대한 당신의 뜻을 전달하고자 하는 선한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님께서도 말씀하신 "목적만 좋으면 과정이나 방법은 뭐든 상관없다는 그런 적당주의를 없애지 않고는 진리는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란 뜻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왜냐하면 스님의 글인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을 위해 그 "과정이나 방법"이 <기득권자만이 사는 길>을 줄기차게 보여준 조선일보란 출구를 통해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제는 스님께서 조선일보에 대해 잘 모르고 계셨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왜 면밀한 불교적 성찰을 삶의 태도로 견지해오신 도법스님이 조선일보가 사냥꾼의 모습으로 우리 불자들뿐 아니라, 이 땅을 천박한 자본주의로 돌진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불교적 사고와 삶의 태도'가 거시적인 문제(예를 들면 농촌, 문명, 생명 등)에는 칼끝 위의 긴장과 근본에 대한 물음이 가능하지만, 미세하고 구체적인 문제(예를 들면 '최장집 사건' 같은 것)에는 직접적인 작용이 힘들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일으키게 만든다.

다소 거리를 두고 스님의 행보를 지켜본 나는 '도법'이란 단어가 '조선일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도법'이란 단어가 개인사를 넘어서 많은 청년 출가, 재가자들에게 이미 하나의 상징어로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와 다름이 없다.

그리고 그런 상징어에서 영양분을 얻고 자란 청년불자들이 조선일보를 보는 시각의 불온함과 만날 때의 혼란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스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를 "치열하고 근원적인 태도"에 조선일보도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은 조선일보를 어떻게 보는가에 큰 시각 차이가 난다면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각 차이의 폭이 그리 먼 거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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