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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뛰어야 할 벼랑 앞에서
"…민적(民籍)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부분)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현재 조계종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무원장 선거구도를 보면 말이다.

재판부가 지난 10월 1일과 2일 한국불교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단에 "너희들에게는 총무원장을 선출할 자격이 없다"며 총무원장을 재판부가 '선임'하였다.

종단 내부에 자율적인 의사 결정 구조가 엄존하고 있음에도 이를 능욕한 재판부의 오판 사태에 우리 종단의 지도부 스님들은 어떤 항거를 보여주었는가. 사태 초기 사부대중 앞에 결의했던 그 목소리는 다 허상이었는가. 총무원장스님은 나몰라라 사퇴서 한 장 던지고 산속으로 들어간다고 하고, 종회의장스님은 선거준비한다고 사퇴하고 말았다.

간화선의 기본 텍스트인 대혜종고선사의『書狀』이 보여주는 "평소에 마음을 아주 고요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은 단지 시끄러운 가운데에서 사용하기 위할 뿐이다.

"란 경책은 한갓 지적 유희에 불과한 것인가. 경박함과 가벼움을 숭상하는 몇몇 종회의원은 재빠르게 선거 체제를 준비하면서 만해(卍海)의 격분같은 몸짓은 푸석거리는 먼지로 뒤덮인다.

더구나 이들 종회의원들은 '진보'라는 이름표를 앞가슴에 달고 다녔던 스님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번 재판부 오판의 귀결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가. 일제의 식민통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20세기 초 위정자들의 모습과 어떤 차별을 갖는가. 그것은 뿌리 없는 진보의 공허함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왜 이번 사태를 선거로 해결하려고 했을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들의 생각이 공론(公論)의 장으로 표출되어지지는 않고 있다.

만약 들려오는 말처럼 개혁을 열망하는 종도들의 뜻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를 선의(善意)로 해석해보자. 그럼에도 그 개혁이 우리의 자존과 정통성을 부정하면서까지 이루어내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개혁을 이루기 위해 동국대학교 이사회를 졸부들의 잔치로 도배질하며 종단내 강고한 기득권을 유지해온 세력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얻어진 개혁이 우리가 가야할 참다운 불교의 길인가. 사태 처음부터 <불교자주권>을 벼릿줄로 잡아갈 수는 없었던 것일까. 의문은 샘솟고 독백을 길어진다.

나는 앞으로 우리 불교가 참다운 불교정신의 빛으로 이 땅의 대중들과 만나는 데 종단 내부의 제도적 개혁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각종 언론에서 나타나는 종도들이 종단 제도에 거는 기대감의 낮은 치수에서도 반증이 된다.

더구나 앞으로 예상되는 기득권 세력들의 지속적인 유지와 연대가 이루어지는 종단 제도의 내부에서 그 체제와 정책이 '기득권 포기'를 요구하는 <개혁>이란 변화를 끌어내기에는 너무나 많은 열정이 소모되기 십상이다.

오히려 건강한 불교세력들이 종단 제도에서 소외된 대다수의 불자대중과 직접 만나고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불교정신의 빛을 싹틔워나가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제도의 딱딱함을 부드럽게 바꾸는 길이기도 하다.

이렇듯 나는 종단 제도의 변화를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그 보다도 우리가 진지하고 아프도록 눈을 부릅뜨며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은 우리가 어디에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발을 딛고 있는가에 대한 진지하고 결기있는 자기물음일 것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능욕당한 불교자주권이 '개혁'이란 이미지로 매끈하게 바뀌면서 그 빛이 바래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우리 한국불교가 이렇듯 긴 질곡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개화기와 일제 식민지를 거쳐 해방과 정화 이후의 역사 속에 우리의 자주권을 똑바로 세우지 못했고, 정통성을 견결하게 잇지 못한 그 업보의 그늘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 그늘 속으로 자주성과 정통성의 빛을 비추지 않은 채 이식된 '개혁'이란 명제가 과연 올곧게 싹을 틔울 수 있을까. 나는 종단 지도부에 의해서 자주성과 정통성이 가볍게 희화화(戱畵化)된 현실은 이후에도 아픈 역사적 실례로 남아 업보의 그늘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본다.

근현대불교사의 역사적 교훈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나는 자꾸 망설여진다.

공소(空疎)하게 씌워진 '개혁'의 아우라에 기댄 채 자주성과 정통성의 절차탁마(切磋琢磨)란 긴호흡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최근 읽고 있는 책에서 줍게 된 황벽희운 선사의 경책. "마치 건너뛰어야 할 벼랑을 보고서도 물러나서 이런저런 지식과 견식을 구하는 것과 같은 일." 우리는 어쩌면 건너뛰어야 할 벼랑을 보고 물러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나의 의문은 자꾸만 샘솟고 독백은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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