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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세 가지 생각
하나. 고타마가 그랬듯 고(苦) 깊어가면 절망과 만나는 법이다.

고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절망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모든 이상적인 열정은 현실에 대한 깊은 절망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자신의 눈앞의 현실이 참된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 절망한다는 것은 고(苦)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먼저 예민하게 촉수를 부르르 떨면서 반응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들은 불운하면서 동시에 불온하다.

그런데 언제나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작년에 조계종단 사태가 일어났을 때 조계사 주변에 있던 많은 사부대중들은 분노와 꾸짖음, 참회의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 일어난 재판부 오판 사태 이후 종단의 어지러운 현상에서도 많은 사부대중들은 분노와 꾸짖음, 참회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그들 속에서 현실에 깊게 절망한 사람들은 얼마나 있었을까. 많은 이들이 목에 핏대를 내보이며, 입에 거품을 물면서 종단의 현실을 비판하지만, 스스로 절망의 자리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절망의 밑바닥 깊이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가 끝난 후 많은 이들은 상근기의 후예답게 재빠르고 발랄하게 발길을 돌리며 하산했다.

절망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가? 그래서 절망하지 않는 것인가. 절망의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욱 문제인 것은 절망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는 그 감성의 부재이다.

절망을 모르는 감성. 고(苦)를 느끼지 못하는 그 몽환의 목소리들. 그리하여 그들은 어제의 상처를 가뿐하게 잊고 다시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다.

그들은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싣기 보다 달리는 기차를 오직 바라만 본다.

그리고 턱을 한껏 들면서 기차에 대해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평'한다.

기차가 궤도를 이탈하려는 위험에 처하면 그들은 "아, 안타깝습니다"하고 다시 짐짓 굵은 목소리로 '평'한다.

그러나 그들의 촉수는 고통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두텁다.

그들에게는 절망의 깊이로 내려가서 고통의 근원과 정직하게 마주서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고 하는 성실함이 보이지 않는다.

둘. 불교에서 밥줄을 대는 식자층들 있다.

그들은 불교(계) 지식과 글을 팔아서 매달 적지 않는 금액을 수령한다.

이들은 정말 뛰어난 상근기를 가졌다.

이들의 속내를 알 수 있는 불자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무색무취를 자랑하는 이들은 종단 주변을 위성처럼 가만히 그리고 조용히 공전한다.

이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열심히 사는 것은 아주 다를 수 있다"는 불교밖 지식인들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조차 힘겨운 노동이다.

그들의 노동 성과에 비해 얻는 밥줄은 너무 질기고 두껍다.

그만큼 그들의 목소리가 공론(公論)의 장으로 나오는 예는 드물다.

드물게 나오는 목소리도 연암 박지원의 지적처럼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게 데면데면하여 우유부단하기만 하다.

" 너무나도 지당하신 말씀만 어쩌면 그렇게 골라서 글을 쓰실 수 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작년에도 그리고 올해도 종단의 혼란 상황에서 그들이 갖춘 지식과 글재주로 문제를 제기한 몸짓은 보이지 않는다.

있다면 데면데면한 한두 편 짧은 글뿐이다.

작년 종단 사태가 재연된 것처럼 그들이 보여준 처방의 글도 작년처럼 복제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종단 현실과는 거리를 둔 채 깊이 있는 불교정신의 고민을 활자로 상재한 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들이 불교지식인으로 행세하며 불교계 안팎에서 활보하는 모습을 보면 심히 걱정된다.

셋. 조계종단의 폭력과 혼란을 참담하게 지켜보았지만, 개인적으로 더욱 안타까웠던 점은 우리에게 불교정신이 맑고 곧게 서있는 세력이 빈곤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건강한 세력으로부터 도덕적인 정당성을 바탕으로 건강한 연대를 하고 있는 층이 없다는 점이다.

어느 수련회에서 빌려온 비유를 들면 이것은 컵 속의 맑은 물에 잉크가 떨어졌을 때 어떻게 컵의 물을 맑게 할 수 있을까란 방법과 인식의 문제이다.

컵 속의 탁한 물을 어떻게 맑게 할까. 우리들은 이 잉크물을 손으로 걷어내려거나 화학적 작용을 일으키려고 하지는 않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컵 속에 맑은 물을 계속 부어주면 되는 것이다.

이 '맑은 물 붓기'에 대한 명상을 해본다.

종단 내에 폭력과 다툼이 일어나도 다른 한 쪽에서 이 맑은 물을 부어주는 몸짓이 있다면 어떨까. 과연 이렇게 종단의 폭력과 다툼이 우리 사부대중들에게 참담함과 어지러움을 안겨주었을까. 눈밝은 불자들이 정작 결기있게 자문해야 할 점은 바로 종단 내에 맑은 물을 계속 부어주는 건강한 세력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있다.

그리하여 한쪽이 상대적으로 혼란이 지속되더라도 견결하게 불교정신의 빛을 보여주는 세력이 형성되어 있다면 우리 불교계에 길게 그늘진 이 어지러움을 조금은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불교에 애정을 보내는 이들이 조계종단의 정치적 힘겨루기라는 냉소의 시선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맑은 물 붓기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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