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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부동의 창조적 개인
유가(儒家)에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다.

서로 화(化)하지만 동(同)하지 않다는 뜻을 가진 이 말이 최근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화이부동과는 달리 화(化)하지 않고 동(同)하기만 하는 집단주의를 교계에서 어렵지 않게 느끼고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더구나 소통(疏通)이란 말을 장시간 끌어안고 있는 나에게 불교계에 뿌리내린 이 집단주의의 흐름을 쉽게 거역하기란 여간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불교계에서 개인은 어떤 형태로든 유형 무형의 집단(혹은 단체) 속에 참여함으로써 개인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읽어도 좋다.

이는 곧 집단 안에서 개인의 성숙에 골몰하는 몸짓보다 집단의 성장을 고민하는 일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개인은 집단 속에 포장되어 그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만약 집단이 없게 되면? 예상컨데 개인이 집단 속에서 주장했던 많은 말과 행동들은 스스로 힘을 잃어버리 채 주저앉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집단 안에서 표현했던 그 개인의 무게 실린 힘과는 전혀 다른 가벼움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처럼 나는 현재 교계의 여러 집단은 강력한 무게로 그 힘을 과시할지 몰라도 그 집단 안에 있는 개인은 무력하다고 본다.

보라. 불교언론사 기자의 기사가 자사 언론을 떠나서 그 펜의 힘을 전과 같이 발휘할 수 있을까. 불교단체의 활동가가 불교단체를 떠나서 내는 독립된 목소리가 얼마나 힘을 낼 수 있을까. 때문에 교계의 불자들은 너도나도 단체와 집단 속에서 자신을 안주시키고 각종 연(緣)짓기에 골몰하는 것이다.

하여 집단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집단을 키우고자 개인의 시간을 보낸다.

개인의 독립? 불교계에서 개인이 홀로 선다는 것은 불교계에서 일하기를 포기하려는 짓이다.

나는 집단의 성숙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집단을 이루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의 불교적 성숙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불교계에서 개인의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희미하다.

개인이 속한 집단의 목소리와 주장만이 들었을 뿐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개인을 집단 속에 안주하게 하여 집단의 뜻에 맞는 사람들과 서로서로를 치켜세우며 어울려 자기들만의 우물을 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하기에 나는 이 집단주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집단 속에서만 서로 어울리는 기술을 즐겁게 습득하면서도 홀로 자신의 가치 기준을 오롯이 세워 나가는 것에는 아주 낯설지 않는가 생각한다.

마치 미성숙한 이들이 여럿이 패거리로 있을 때 당당하고 혈기 있는 얼굴로 입에 거품을 물더니, 홀로 있을 때는 저항하지 못한 채 죽은 듯 조용해지는 그런 모습 말이다.

불교계에서 한 개인이 독립하되 고립하지 않는 모습이란 그야 말로 찾아보기 힘들다.

집단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가고, 집단 속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집단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만족스럽게 즐거워한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경전 속 문구일 뿐이다.

다시 말하건데 나는 집단의 성숙을 외면하지 않는다.

문제는 집단 속에 있는 개인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로 나아가지 않고 개인을 집단 속에 재기 발랄하게 동화시켜나간다는 점이다.

불교계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어디 숨어있는 것인가.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보건데 나는 전자(前者)인 것 같다.

바로 그것이 불교계에 '창조적 개인'(학담스님의 표현에서 빌림)은 찾아볼 수 없고 '집단의 거품'만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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