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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의 문명적 한계-참여연대의 문화재관람료 소송을 보며-
1.나는 일년 전부터 이른바 ‘근대성’에 대해 조금씩 생각을 해왔다.

요약을 하자면 이렇다.

우리 사회는 아직 근대적 과제로 남겨진 문제인 남북의 통일, 민주주의의 정착, 소유와 분배의 문제, 인권, 여성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근대 이후의 삶을 기획해 나가야 한다.

근대를 상징하는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고 세계의 생태적, 연기(緣起)적 질서를 깨뜨리는 오늘의 지구화된 경제적 시스템 등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의 양식(생태, 가난, 무아, 연기 등)을 준엄하게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사회가 근대를 완성하고 근대 이후의 삶을 동시에 짊어져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고 본다.

특히 불교계는 이런 과제의 압축성이 두드러진다.

더불어 불교인이라면 연기적 인식을 바탕으로 근대 이후의 삶을 지향하는데 중심을 갖고, 근대적 과제를 완성하는데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불교가 본질적으로 불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에 그렇다.

앞글이 길었다.

나는 최근 우리 사회의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민주주의시민연대(이하 참여연대)가 불교계에 대해 ‘문화재관람료 부당이득금반환청구소송’을 낸 것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참여연대가 우리 사회의 근대적 과제의 완성에는 온 힘을 쏟는 반면 근대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참으로 무지하거나 관심을 별로 갖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참여연대의 위상은 우리 사회와 시민들이 아직 근대적 과제의 완성에 더 많은 요구와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인식이 있고, 근대 이후의 삶에 대한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는 면에서 일정한 정당성을 갖는다.

또한 참여연대를 바탕으로 하는 ‘시민’이란 용어 속에 배어있는 근대적 냄새는 근대 이후의 삶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근대 이후의 삶이란 근본적으로 온 세계를 ‘한 몸 한 생명’으로 보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자발적인 제어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2.참여연대가 주장하는 문화재관람료의 반환청구 소송에는 시민들의 불만과 편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곧 국립공원을 입장하는 시민들에게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재관람료란 비용을 더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논리의 전부다.

사실 현상적으로 보면 국립공원 이용객이 문화재관람료까지 지불하는 비용보다 국립공원입장료만 내는 것이 훨씬 효용있는 행위일 것이다.

더구나 투자의 기계적, 경제적인 효용가치가 행위의 주된 잣대가 될 때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문화재관람료’ 속에 담겨있는 것은 참여연대가 주장하는 것처럼 “부당한 이중 요금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것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오히려 ’환경‘ ’문화‘ ’삶의 질‘ 등의 근대 이후의 삶에 대한 문제가 더 많이 함축되어 있다.

문화재관람료는 단순히 사찰 문화재 관람의 문제가 아니라, 사찰안과 밖을 둘러싼 우리 문화재의 보존, 산과 사찰의 생태적 어울림, 생태 교육의 현장, 연기법(緣起法)의 실천 공간 등이 켜켜이 쌓여있는 곳이며 이를 경험하고 느껴야하는 것은 방문객들의 ’또다른 권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찰은 이 공간을 지켜내고 이어온 유일한 주체이기도 했다.

물론 이 ‘또다른 권리’에 대해 그 동안 정부와 참여연대가 애정있는 관심을 보였다는 정보를 나는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돈을 적게 내겠다는 것만이 시민의 권리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참여연대는 근대적인 시각의 잣대로 근대 이후의 삶의 문제가 압축되어 있는 곳을 섣부르게 재단하는 기이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에게 근대 이후의 삶에 대한 문제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보여주어도 그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들에게 문화재관람료의 문제에서 보이는 것은 ’돈‘뿐이다.

물론 지금 현재 국립공원입장료와 문화재관람료를 합동으로 징수하는 문제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의 이에 대한 정부의 정책 부재의 책임과 함께 공원입장료의 폐지 등이 더 깊게 논의되어야 한다.

그런데 참여연대는 이를 모르는 것일까? 나는 알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참여연대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을 애써 회피하고, 더욱 이득을 챙기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것은 경제적 효율성을 기반으로 한 ‘시민의 지지와 격려’라는 무기이고, 참여연대는 다시 이 무기를 기반으로 조직 매명주의(賣名主義)로 이용하려는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강준만 교수(전북대)는 참여연대가 ‘세상이 알아주는 맛’에 빠져있고 일부 참여연대 분들 너무 오만하게 보인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헌신적으로 한국사회를 바꾸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문제 제기에 대해 이만저만 거드름을 피우는 게 아닙니다.

”고 말한다.

이런 말이 왜 나왔는가를 참여연대는 주의깊게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3.나는 참여연대가 근대적 시민들의 눈앞에 보이는 불이익을 이기지 못하는 요구로 인해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찾는 또다른 사람들의 바람과 터전을 허물어 버리는 선택을 하기보다, 환경, 문화, 삶의 질 등의 총체성과 관계성의 사고 바탕 위에서 행동하길 바란다.

시민들의 부담 또한 국립공원입장료 폐지 등의 문제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참여연대가 그물망 같은 관계성의 문제를 <'지하철 4호선 안사 터널의 부실시공에 대한 감사청구', '수도권수해주민권리찾기 결의대회' 개최 및 분쟁조정, '학습지 회사들의 불공정거래에 대한 공정위제소 및 보증금 반환청구소송', '불량 씨티폰 기본료 환불운동'> 등 지난날 근대적 과제의 승리 경험을 통해 너무 쉽게 획일적인 시각으로 이 문제를 풀려는 것은 아닌가 안타깝다.

위 문제들과 문화재관람료의 동일한 인식을 고집한다면 참여연대의 소송은 시민추수주의란 문명적 한계로 밖에는 읽혀지지 않는다.

참여연대는 두레문화기행 회원이 아이들과 사찰을 답사한 후 느낀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길 바란다.

“…야생동물과 음식을 함께 나눠먹었다는 헌 식대는 절이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시대의 유물로서 불교의 생명존중사상을 엿보게 한다.

알지 못할 말이 많을 텐데도 아이들은 강사의 설명을 열심히 메모했다.

절이라면 관광지로만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의미를 심어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산나물과 묵밥으로 점심을 먹은 뒤 숲이 그윽한 금룡사로 가는 길에 아이들은 도심 속에서 볼 수 없는 온갖 나무들과 풀꽃들에 매번 감탄하며 신기해했다.

…”(한겨레 2000년 5월 20일자) ‘생명존중사상’ ‘새로운 의미’ ‘산나물과 묵밥’ ‘나무들과 풀꽃’ 이런 말을 근대의 광포한 질주 속에서도 묵묵히 만들어왔던 곳이 어디인가. 국가인가? 참여연대인가? 왜 사찰을 단순히 관광지로 몰아 가고자 할까? 참여연대는 나무 속에서 구름을 본다는 말을 이해하고 있을까? (김판동 / 격월간 『인드라망』편집위원) *위 글은 격월간 『인드라망』(737-6183) 2호에 실린 글임을 밝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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