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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리는 깨닫고 싶은 걸까
" 김준호 선배. 한번도 보지 못하고, 어떤 지연과 학연도 없는 분에게 이렇게 '선배'란 호칭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멀리 보면 저보다 대학 때 불교를 먼저 접했다는 점에서 선배일 것이고, 연기법에 대한 바른 인식과 삶 속에서의 실천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대를 살아가는 선배의 그 불교적 감수성과 문제의식을 제가 많이 배우고 있기에 그 호칭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선배와 저는 천리안 불교동호회란 통신공간에서 만났습니다.

제가 처음 글을 올릴 때 몇몇 분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였고, 선배도 맑고 좋은 글을 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뒤 저는 천불동에 올라온 지난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불교밥 먹기가 많이 부끄러웠죠. 특히 기억에 남는 글은 한밤중 비가 내릴 때 딸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야하는데 자가용이 없어서 꼭 차를 사고 싶었다는 내용입니다.

그 글은 소유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변질되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경계였죠. '소유에 대한 욕망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 선배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의 일상성'이란 주제로 쓴 그 글에서 선배는 "정말 나는 깨닫고 싶은 걸까"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그 글, 정말 아프더군요. 제가 감추고 싶고,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정확히 눌어 찌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을 만나도 그 분노에 휩싸이지 않는 노력,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혜로운 이의 말과 글을 꾸준히 음미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려는 태도가 일상에 늘 자리해야 한다는 것, 우리들의 삶의 성숙을 방해하는 훼방꾼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정(情)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는 말, '깨닫고 싶다'는 바람이 절실하지 못한 이유는 앎의 부족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그 달콤한 맛을 포기하지 않는 일상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하여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하는 못하고 늘 겉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하면 불교적 앎과 삶의 따로 노는 불교인들이 짐짓 엄숙하게 때론 고상하게 깨달음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희극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 희극은 어쩌면 지금 우리들에게도 보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온갖 불교 지식을 쌓거나, 수행한다면서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일상과 삶에서 이를 실천하고 변화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나는 깨닫고 싶은 걸까?" 하고요. 그래서 우리시대에는 육바라밀 하나라도 실천하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는 주장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스스로에게 던져지면 희극은 어느새 깊은 슬픔이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내면에 물결치는 욕망과 소유에 대한 집착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늘 겉돌거나, 그 경계에서 서성거리곤 합니다.

소비와 소유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정신이 없어서는 불자답게 사는 길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은 선배와 동일한 시대적 유전자를 갖는 우리 청년불자들이 더욱 곱씹어 볼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선배도 이야기했듯이 깨달음이란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힘들죠. 그래서 선배가 불교공부를 하면서 '내 삶의 가치나 성숙이 조금씩 보이는 것을 느낄 때 기쁘다'는 말씀처럼 저 역시 그렇습니다.

어쩌면 깨달음이란 것은 그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죠. 깨달음이 하늘을 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걷고 달리는 것에 자신의 삶을 놓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어느 날 기어다니다가 갑자기 날 수 있는 내공이 쌓일지는 모르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깨달음을 위해 걷고 달리는 노력이 필요하겠죠. 저는 그 노력이 현재 우리가 소유와 욕망으로부터 스스로가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것이라 봅니다.

티벳에서 수행한 주민황 박사는 최근 한 논문에서 '성불의 실제 원인은 보리심이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보리심 없이는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리심의 첫 마음은 스스로 삶 속에서 소유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종교 또는 불교가 세속주의에 깊게 빠져있다는 판단은 이제 별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우리는 정말로 스스로의 삶에서 세속주의를 반대하는 것일까란 물음입니다.

그리고 이 물음은 '정말 우리는 깨닫고 싶은 걸까'하는 독백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말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저는 이 물음에 정말 자신있게 '깨닫고 싶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때때로 소유와 욕망이 저를 붙들고 있거든요. 선배가 '나도 그렇다'는 말을 해준다면 조금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끄럽고 경박한 도시에서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꽤 어렵군요. (김판동 / 격월간 인드라망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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