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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와 선사4-당신 깨달음 체험 있소?
요즘은 제 개인의 수행에 대한 질문이 적지 않군요.이 글은 최근 한 독자가 보내온 것이며, 제가 그 분에게 보낸 답신을 함께 덧붙여 올립니다.

안녕하세요.한겨레메일에 가입한 후 조기자님의 글을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정신세계에 관심과 조예가 많으신 분이시군요.그런데 조연현기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수행을 하시는 분이신지 궁금해서 메일을 드렸습니다.

말과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도와 깨달음을 논하는 이는 많지만,이 육신이란 것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우리 중생들은 몸과 마음을 닦아 나가야 하는 존재이지요.답하시기 곤란하다거나 하시면 괜찮습니다만, 과연 조기자님의 깨달음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실제 체험을 통해 얻은 자기의 말인지 아니면 알음알이를 통해 재생산해내는 말인지 궁금해서 몇자 적었습니다.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먼저 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 글을 눈여겨 보아 주신다니 기뻤고, 제 말이 체험인지 알음알이인지가 궁금하다고 한 내용을 보면서는 독자분께서 제 글에 대해 미심쩍어하니 안타깝다는 마음이 제게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현재 저의 이 마음을 보는 것. 수행이 있다면 그것이 제 수행입니다.

이 글을 읽는 내 마음에서 `내' 글이라는 집착과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떠오르는 것, 집착하는 것, 선악을 구별하는 것, 좋아함과 싫어함을 구분짓는 마음안에서 저의 편견과 고정관념과 업을 봅니다.

수행이 있다면 그것이 제 수행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있을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생각에서 저의 집착을 보고, 욕망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 또한 다만 인연에 의해서, 조건과 조건이 만나 만들어졌을 뿐 주체가 없음을 봅니다.

그리고 제대로 보는 순간이 업의 인연이 다하는 순간임을 알게 됩니다.

일어난 한 생각을 명확히 보고, 한 생각이 일기 전 고요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면 그 자리가 중도 자리요, 일어난 자기 마음을 보고,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 해탈이 아닐까요.저를 살피지 못했을 때는 수천권의 책(지식)이 다만 쓰레기였을 뿐이요, 머리를 태우는 불쏘시개와 같아 불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밖으로 대상만을 쫓던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 내면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여름날 계곡물처럼 상쾌하답니다.

그러나 머리에 불을 이었을 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속이기보다는 `불이 타고 있음'을 봅니다.

내가 화가 일어나고, 상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나는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데, 너가 문제다”라고 하기 보다는 나의 색안경과 편견과 신념과 집착과 업을 봅니다.

점차 제 꼬락서니를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안타까운 꼬락서니를 보았을 때가 수행의 시작이었고, 그 꼬락서니을 제대로 보고, 그 꼬락서니 또한 애초 내 것이 아님을 알고, 그 꼬락서니, 그 습관, 그 성격, 그 신념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을 때 진전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제겐 `일어나는 미세한 마음'을 냉철히 관찰하기 보다는 미세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애써 대범한 척, 애써 훌륭한 척 하면서 업의 씨앗을 방치하고 마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과 감각 등에 빠졌을 때는 곧 이를 깨닫곤 합니다.

그것이 노예상태에서 해방돼 주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99명을 죽인 살인마 앙굴리 라마가 칼을 들고 석가모니에 달려드는 순간,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모습을 보고 꿈에서 깬 것 처럼 말입니다.

그가 감정의, 살심의 노예 상태에서 깨어 자기 삶의 주인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앙굴리 라마는 자신을 바로 본 순간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한 생각에 이끌리면 살인마였지만, 그 한 생각을 놓고 자신을 살피니 그는 아라한이었던 것이니다.

그러니 어찌 바로 이 순간 미혹하면 중생이요, 깨여있으면 부처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따라서 전 화를 내는 것, 욕심을 내는 것. 그것이 죄가 아니라 자신이 그런 상태임을 모르는 것이 죄라면 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모를 때는 다만 상황이나 감정에 끌려다니므로 노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는 화를 거둘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으므로, 즉 상황(대상)이나 감정에 끌려가 종속되지않고, 결과를 자신이 선택하므로 주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을 구한기보다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깨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저의 수행이라면 수행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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