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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와 선사 5 - 이쁜놈 미운놈
 지난편에 말씀드린 마음 관찰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공감을 표해주셨지만, 몇분은 어려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호소해왔습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지요. 가령 한 청년이 귀거리를 하고 지하철에 들어서는 것을 보면 “참 꼴 불견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관찰을 한다면 자기 마음안에 꼴 불견이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마음상태를 봅니다.

아 저런 모습엔 볼성사납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 청년이 볼썽사납다느니, 볼썽사납지않다느니 하며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저 대상을 보고 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저런 사람을 보면 볼썽사납다는 마음을 일으키는구나. 나는 남자가 귀거리를 하면 좋지않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구나-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이나 주위사람들의 생각에 영향받은 고정관념이지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만약 내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청년들이 귀거리 코거리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그런 것도 하지 않고, 거추장스럽게 옷을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자기의 고정관념대로 판단하고 분별하고 시비하는 것입니다.

거기엔 어떤 것이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관찰을 계속하다 보면, 대상에 좋고, 나쁨이 있거나, 선하고 착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고정관념에 맞으면 그것에 좋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선하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내 고정관념에 맞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좋지않다거나 추하다거나 악하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똑 같은 대상을 놓고도, 우리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제 남편이나 제 아내, 또 제 자식이라도 보기도 싫을만큼 미울 때가 있는가하면, 예뻐서 깨물어주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같은 대상을 놓고도 이렇듯 변죽이 죽끓듯 하니, 어찌 그 대상에 예쁘거나 미운 절대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이렇게 마음을 살피다보면 예쁘고, 밉거나 좋고 나쁘다는 것이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제 마음에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는 것이지요. 실상없는 대상을 놓고, 온갖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고정관념과 편견이 상대에 대한 몰이해를 낳고, 고통을 낳고, 전쟁을 낳고, 살인을 낳고, 끝없는 고통의 윤회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이런 고정관념과 편견이 내 편을 만들고, 내 편이 적과 사탄을 만들고, 그 적에게 덧씌운 사탄과 악에 대한 증오심으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만들어 놓은 덫(고정관념)에 자신이 넘어져 자신이 해를 입는 격입니다.

사랑과 평화를 이상으로 여기는 종교에서 이런 고정관념과 편견이 가장 많은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자들이 나는 어느 상황에서도 이슬람교 신자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꼭 맞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가 이란이나 이라크나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슬람교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그 또한 이슬람교인이 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필리핀에선 가톨릭신자가, 미얀마에선 불교신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물론 그가 이스라엘의 유태인이었다면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쪽이라면 이슬교인이 되어있겠지요. 모두가 다른 나의 모습인 셈입니다.

한쪽만이 진리이고 다른 쪽은 사탄이라며 총칼을 들고 설치는 자는 다른 쪽에 있었더라도 똑같은 윈리주의자이자 살인자가 되었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어느 곳에 가거나 자신이 교육받은 것, 들은 것만을 진리로 믿고, 다른 것을 배타하고 증오하는 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슬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상대를 사탄으로 일컬으며 서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신념과 고정관념과 편견의 속성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이들에겐 끝없는 죽음과 지옥이 반복될 것입니다.

원효대사는 청년시절 유명한 낭도였다는 얘기가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신라의 용감한 낭도로서 백제군의 목을 날리는 무용담을 자랑했겠지요. 그러던 어느 전투에서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백제군에 의해 목이 날라갔습니다.

청년 원효는 친구의 무덤에서 분노로 치를 떨며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그가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며 절규하는 순간 그는 홀연히 지금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적군의 목을 추풍낙엽처럼 날려버렸다고 술을 마시며 승전의 기쁨에 들떠있을 때 똑같이 분노의 절규에 떨었을 다른 인간들(백제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짓인가. 그는 그 순간 꿈에서 깬 듯이 정신을 차리고 그 자리에서 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리고 스님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자기 안에만 갇혀 자기쪽만이 옳다는 신념에 싸인 원리주의자들은 상대를 왕따시키고, 음해하는 정신적 살해뿐 아니라 이처럼 또 다른 모습의 자신들을 예사로 살해하는 것입니다.

최근 `여호와의 증인'인 성우 양지운씨 아들이 종교적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쓴 뒤 30여분의 독자들이 이메일을 보내주셨는데, 대부분이 공감을 표시해 주셨지만 한 종교 연구기관에 계신다고 자신을 소개하신 분은 “뭘 제대로 알고 기사 쓰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이 문제는 교리 문제라기보다는 인권문제이기 때문에 굳이 이 문제를 따로 가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남을 이단으로 내몰기에 앞서 자신의 성찰이 중요함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완고한 기득권의 아성을 쌓은 성전 체제와 로마 압제체제에 도전한 불세출의 이단아였지요. 정통으로 자처한 로마의 압제체제와 성전체제는 예수를 이단아로 몰아 십자가에 메어 죽여버렸습니다.

중세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팔며 부패해가던 사제들은 정통이었고, 루터는 이단아였습니다.

보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정통에 의해 화형을 당해 죽어갔지요.그러니 하나님 나라(사랑과 평화)에 가는 것을 방해하고, 지옥(고통)에 이르게 하는 것은 `이단'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이기심과 고정관념과 편견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의 마음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자신을 사랑스럽고 평화롭게 만들고, 증오는 다른 사람을 태우기에 앞서 가장 먼저 자신을 불태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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