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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길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 채 살생의 도구가 될 수 없다며 병역을 거부하고 고통스런 평화의 길을 택한 젊은이들이 있다.

이들은 전쟁은 물론 인간을 살생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병역제도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군의 사람들은 양심적 병역거부가 국민된 도리의 '회피'이자 의무로부터 '도주'일뿐이라고 한다.

그들은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의 확보가 우선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는 나약한 젊은이들의 비애국적이며 비평화적인 환상일 뿐이다.

과연 평화를 유지하고자 적을 죽이는 성스러운 전쟁은 물론이려니와 인간을 살생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병역제도는 정당한 것일까? 이런 물음을 놓고 두 갈래의 답변이 우리사회에서 맞붙고 있다.

한 갈래는 남북이 대립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가의 안보와 개인의 자유를 지켜낼 징병제는 정당하며, 따라서 병역의 의무는 성스러운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 갈래는 군 복무는 국가의 의한 합법화된 폭력이기 때문에 병역을 거부할 권리를 주장한다.

이들은 현재 비전투 분야에서 비폭력을 실천하며 사회봉사를 할 수 있는 대체복무제의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두 갈래의 의견이 맞붙어 갈등이 깊어지는 현실을 돌아보면서 과연 부처님께서는 이런 물음에 어떠한 태도를 취하셨을까 궁금해진다.

『우리말 쌍윳다니까야』7권 전사의 경(經)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문제는 꽤 비중 있던 사회적 화두였음을 알 수 있다.

경(經)은 보면 '적을 죽이는 성스러운 전쟁은 정당한 것일까'라는 주제로 부처님과 전사마을 촌장의 대화가 나온다.

전사마을 촌장은 부처님께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하는데 전력을 다해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환희라는 하늘나라의 무리에 태어"날 수 있느냐고 수 차례 묻는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촌장이여, 그만두십시오. 내게 그런 질문하지 마십시오."라며 대답을 계속 피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촌장의 견해가 그릇된 견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살았던 촌장은 물론 전사마을의 전사들이 받아야 할 마음의 고통이 미루어 짐작했기 때문에 대답을 피하셨다.

부처님의 계속된 답변의 회피에도 불구하고 촌장은 끈질기게 세존에 답을 요청 드렸다.

부처님도 어쩔 수 없었던지 이렇게 설명하셨다.

"촌장이여,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 싸우면 그의 마음은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버려야 한다'라고 저열하고 나쁜 곳으로 향하고 사악한 곳으로 향합니다.

그 전력을 다해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환희라는 지옥이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이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환희라는 하늘사람의 무리에 태어난다.

'라는 견해를 지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견해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살생이 난무하는 혼란스런 전쟁터에 서면 그 마음이 저열하고 나쁜 곳으로 향하고 사악한 곳으로 향한다고 이르셨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에서 싸우고 다투는 이들의 마음 속엔 공포 같은 두려움이 일어난다.

이 두려움은 생존의 욕망으로 드러나 다른 생명을 분노, 폭력 더 나아가 살생으로 대하게 된다.

싸우고 다투는 이들이 두렵기 때문에 살생의 도구를 꽉 쥔 채 놓지 못한다.

이런 어리석음을 보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싸우고 다투는 자들을 보라. 저들은 몽둥이를 들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얼마나 그것을 미워하여 거기에서 떠났는가에 대해 말하리라."전쟁터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노와 성냄, 폭력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전사가 전쟁터에서 살생을 할 때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버려야 한다'라고 마음쓰듯이 말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수행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쟁터 근처엔 얼씬도 말아야 하며, 살생의 도구를 지닌 자들에게는 설법도 하지 말라고 했다.

더불어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멀리 사는 것이든 가까이 사는 것이든, 이미 태어난 것이든 앞으로 태어나려고 하는 것이든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행복을 빌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평생동안 그 어떠한 폭력에도 정당성을 부여하진 않으셨다.

더구나 살생은 물론 살생 도구의 소지조차 옳지 못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평화의 길을 나두고 폭력의 길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병역의 의무라 일컬어지는 징병제이다.

우리사회가 성냄과 분노, 폭력이 사라진 사회가 아닌 이상 병역제도를 일거에 없앨 수는 없지만 폭력에 대한 개인의 양심에 따라 군 입대는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폭력을 거부하는 개인의 양심과 그에 따른 선택은 국가주의에 의해 애써 외면당하고 있다.

폭력을 절대적으로 배척하는 평화주의자들에게 국가주의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너의 누이와 부인이 흉악한 범죄자 앞에서 잔혹한 범죄의 대상이 되었다면 그래도 너는 비폭력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라고 말이다.

답답하다.

국가주의의 강요된 형태의 합법화된 폭력을 분노없는 저항으로 이겨내려는 평화주의자를 극단적인 사례로서 공격하는 한국사회의 비이성적 태도에 절망을 느낀다.

분명히 말하건대 양심의 소리에 정직하고자하는 이들이 거부하는 폭력의 주된 현실은 국가주의로 포장된 제도의 폭력이다.

이 제도의 폭력이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분노와 성냄 그리고 폭력을 찬양하는 사회로 이끌어 간다.

정직한 젊은이들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총을 들고 적을 죽이는 전쟁은 정당하다고 배우면서 군사문화가 강요하는 권위주의와 여성에 대한 도구적 태도를 습득한 채 사회로 방출되고 있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조직의 문화는 명령계통의 중시하는 군사문화에 오염되었다.

어떤 조직이고 리더와 의사소통에 심각한 문제점을 호소하고 있다.

아직도 우린 군사독재의 잔재인 권위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길은 결코 평화의 길이 아니다.

죽음의 길, 폭력의 길일뿐이다.

희망은 보인다.

비록 사회의 소외된 현실은 외면하게 만드는 월드컵이지만, 거스 히딩크는 의사소통이 부재한 파시즘식 한국 축구의 권위주의를 붕괴시켰다.

그는 전체주의와 위로부터의 명령만 존재하던 한국 축구에 위, 아래가 자유로운 의사소통이라는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서로 관계된 생명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평화의 길이 이처럼 조금씩 열리고 있다.

아직은 우리사회가 아쉽게도 쉽게 폭력을 정당화한다.

일상화된 폭력의 현실은 국가 안보와 군복무의 형평성이란 논리로 양심의 소리에 정직하게 대답한 젊은이들은 배척한다.

그러나 월드컵 16강 진출 이후 축구대표팀 병역면제에 대한 국민들의 동의는 안보와 형평성의 논리를 무색하게 한다.

국가에 공을 세우면 병역면제는 당연하다는 국가주의의 모순을 지켜보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소외감은 누가 달래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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