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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동심비탈리 카네프스키 감독의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
비탈리 카네프스키 감독의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은 인상적인 제목으로 잘 알려진 작품. 1990년 데뷔작인데, 2차대전 말기 시베리아의 한 작은 광산촌을 배경으로 아이들을 통해 절절하고 소중한 희망을 일깨워준다.

제43호 깐느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수상. 유러피언 필름 어워드 최우수 각본상. 뉴욕타임즈, 까이에 뒤 시네마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영화"0. 글쓴이 독백 서해교전 때문에 재고쌀 200만석을 사료로 쓸지언정 북한 지원은 불가능하단다.

그렇지 않아도 남북관계에서 '퍼주기 시비'는 끊임없고 불신과 냉전의식은 뿌리깊고, 수시로 남남갈등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이념의 폭력성과 어리석음을 우리는 잘 알고 피할 수 있는 것인가. 모순을 되풀이하게 되는 바보스러움은 왜일까. 무얼 두려워하여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일까.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는 인간을 고통의 수렁에 몰아넣고 황폐하게 만드는 이념을 넘어, 희망을 찾고자 하는 열망을 순수한 아이들의 세계에다 담는다.

부처님 눈으로 보면, 이념 문제는 시비를 가려야 할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버려야 할 것이다.

버리고 비운 자리에 들어올 주인공은 어떤 모습인가. 해묵은 영화를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본다.

1. 전체 그림 2차대전이 끝난 얼마 뒤, 소련의 극동지역 탄광촌 스촨. 그곳은 일본군 포로, 반체제 지식인, 죄인들의 강제노동장이며 유배지이다.

여기서도 감옥에서나 전쟁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만나는 기쁨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전쟁의 후유증은 팔과 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에서처럼 일상에까지 뻗쳐 남아 있다.

게다가 스탈린 체제 아래 인민들의 생활은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피폐해 있다.

그 가운데 꼬마들은 세상 모르고 '스탈린에게 감사하라, 우리에게 고무옷을 입혀주신…'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논다.

12살 발레르카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산다.

그는 어머니가 싸구려 창녀인지, 또 왜 그런 처지에 있는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오직 다른 아이처럼 썰매를 갖고 싶었다.

어느 날, 발레르카는 옆집에 사는 또래 갈리아처럼 벼룩시장에서 홍차 장사를 하면 되겠다는 꾀가 났다.

번 돈으로 썰매를 사서 놀러나갔다.

그 날로 당장 그것을 학교 아이들한테 빼앗기고 말았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복수할 궁리를 했다.

몰래 하수구에 이스트를 퍼부어, 똥물이 부풀어 운동장으로 넘치게 만들었다.

갈리아는 벌써 어른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명민하고 대담한 소녀이다.

독재 치하에 있는 세상을 넘겨다보고, 남녀 사랑의 의미도 조금은 안다.

이를테면 발레르카가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때로 속상하지만, 그에게 난처한 일이 생길 때마다 도움을 준다.

하루는, 썰매를 찾아주겠노라고, 소심한 발레르카를 충동질하여, 겐카의 썰매를 훔쳐냈다.

사소한 도둑질도 들키면, 무조건 두들겨 패고 감옥으로 보낸다.

그것은 관료들의 횡포, 강제노동, 궁핍한 생활 등에 대한 사회 정치적 불만을 공포정치로 통제하였기 때문이었다.

발레르카는 겐카 아버지한테 잡혀,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 뒤로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더구나 이스트를 뿌린 사건이 밝혀져 퇴학을 당한다.

어머니가 학교에 가서 철없는 아이의 장난을 용서해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사정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발레르카는 또 복수하는 일을 꾸몄다.

그런데 엉뚱하게 열차전복사고가 일어나 버렸다.

비밀경찰의 탐문 수사가 진행되고, 눈치빠른 갈리아는 그 일이 발레르카 짓이라는 것을 안다.

들킬 뻔한 상황에서 갈리아의 재치로 경찰의 손길을 피한 발레르카는 마침내 스촨에서 도망치는 길을 택한다.

그 길로 옛날에 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그렇지만 발레르카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경찰에 붙잡혀서는 탈출하고, 겨우 살아남는다는 것이 범죄집단에 흘러들게 된다.

발레르카는 왕초가 시키는 대로 전문 털이에 가담했다.

일당이 일본인 보석상을 살해하는 순간 그의 얼굴에 피가 튀겨 얼룩이 졌듯이, 순진한 채 세상에 물들어 갔다.

발레르카는 똘마니 노릇을 계속한다.

어느 날 갈리아가 찾아왔다.

일당은 갈리아를 의심하고, 자기들 조직이 탄로될까봐 제거하기 위해 곧장 뒤쫓는다.

눈치가 빠른 갈리아는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하고, 발레르카도 뒤를 따른다.

그들은 무사히 스촨으로 가는 석탄차를 얻어 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갈리아는, 발레르카 말대로 '블래드'(매일 재수 없는 사람)한테 걸려들었던 지난 일을 완전히 끊고 정말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결심을 한 것인지 확인하고, 다짐을 받는다.

행복한 귀향길에서, 발레르카는 제법 어른처럼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갈리아의 마음도 알아주었다.

갈리아에게 다시 불려준 바나나의 노래는 바로 자기 자신의 사랑의 고백과도 같았다.

바로 그때, 일당이 끈질기게 뒤쫓아 왔다.

두 아이를 향한 총성이 울리고, 화면은 세상이 적막해져 버린 듯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목을 비춘다.

2. 얼지마, 모순된 세계의 발견 이 영화는 사건보다 이미지를 중시한다.

스탈린 체제의 모습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고, 이미지를 통해, 그 이면에 숨겨진 엄청난 세계를 압축해 제시한다.

그래서 주인공의 긴 응시와 겹치는 장면에서 발견되는 사실들을 하나하나 연결해 보면, 모자이크처럼 짜지는 공포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읽을 수 있다.

밀가루 배급현장의 아우성은 무엇을 뜻하는가. 감옥에서 미쳐버려 스촨에 유배된 학자 아브람의 공포에 질린 눈이 만들어내는 영상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때 구경하던 발레르카의 눈길이 깊어졌다.

그는 아우성의 숨은 의미를 발견했을 것이다.

이 점은 직접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되새겨서 재구성해 보아야 한다.

'얼지마!'란 주제는 이와 같은 여러 이미지의 연결로 만들어 낸다.

바깥세계는 꽁꽁 얼어붙어, 동사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도사려 있다.

그렇다고 방안은 따뜻하고 행복한가. 니나가 돼지새끼를 한 마리 사 와서, 바깥에다 키우면 누가 훔쳐갈 것이라고 했다.

발레르카에게 그런 계산은 없다.

돼지가 추위에 얼어죽지 말아야 하고 돼지가 귀엽고 좋아서 방안에서 키우는 것을 찬성한다.

'얼지마'라는 말은 바깥세계를 읽고서 대응하는 하나의 선언이다.

경험 속에서 부딪히는 어떤 장면이 강한 인상으로 읽힐 때, 어린 소년은 자기가 살고있는 곳이 어떤 세계인지 짐작하게 된다.

큰돈을 내밀어 차값을 떼먹을 수를 쓰는 작자를 방어할 줄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가 홍차 주전자를 들고 나간 벼룩시장은 동심의 너머 기성 세계를 맛보는 관문이 되었다.

거기는 혼돈과 같았다.

바로 그 곁에 장면에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동생을 얼싸안고 좋아하는 형제를 보았다.

그에게도 기쁨이 되었다.

그러나 곧, 다리가 없는 동생에다 팔이 없는 형임을 알게 된 발레르카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이것이 발레르카가 시대상을 본 첫 번째 창, 전쟁의 상흔이었다.

그 다음은 덜미를 잡힌 좀도둑이 집단 폭행을 당한다.

빵을 훔친 '장발장'처럼 가혹한 형벌이 차례지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겐카의 썰매를 훔친 일이 발각되었던 발레르카에게도 사정없는 주먹질과 발길질이 안겨졌다.

그러고 돌아왔을 때, "마!(엄마) 먹을 것 좀 줘요."라고 아무리 불러도, 니나는 아들을 현관문 밖으로 밀어낸다.

니나 역시 빵을 얻기 위해서 싸구려 창녀노릇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발레르카는 그때 고양이 새끼들이 '마, 마' 하고 우는소리에 얼굴을 돌려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듯이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이 응시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 즉 공포에 질린 아브람의 동공 장면과 모자이크시킬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브람의 눈의 영상이미지를 확대시켜 화면을 가득 채운 것처럼, 여러 차례 변주되면서 보여준 응시의 장면들에는 궁극적인 어떤 뜻이 들어있을 것이다.

배급현장의 아우성→팬케익을 먹고싶다는 소원→겁에 질린 눈, 이렇게 변주되면서 형상된 아브람의 '공포감'은 하나의 사회 정치적 의미망이 된다.

아브람은 반체제 지식인이었다.

감옥에서 풀여나올 때는 미쳐 있었고, 그는 지금 아귀처럼 굶주림의 혼돈에 빠져 있다.

그래서 한 부인이 동정하여 나눠 준 생밀가루를 흙탕에 반죽하여 팬케익이라고 먹었다.

말하자면 그는, 스탈린주의에 미쳐있는 사회 정치적 억압 상황을 대변하는 희생 인물이다.

그런데 한 소년의 응시에 찍힌 인상적인 장면들의 절정에 하얗게 응결(凝結)한 눈의 영상이 교회당 종소리와 함께 퍼졌다.

이 장면이, 흑백필름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탄광의 '둥근 입구'의 영상과 겹치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구원(해방)과 억압, 자유와 굴레라는 현실의 명암을 뚜렷하게 대비시켰다.

강제노동의 막장을 나오는 광부들의 무거운 발걸음 앞에 놓인 동굴의 '끝'은 밝은 햇빛이 있는 세계이다.

이 빛의 상징적 의미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바깥 세계를 향해 간절하게 바라는 구원의 메시지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무리 냉혹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얼지마!'라는 기원으로 요약된다.

3. 죽지마, 길을 모르는 소년의 가출 냉혹한 현실에서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그 끝은 죽음이 될 것이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어디론가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퇴학당한 발레르카가 스촨에서 발붙일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한 친구가 또 열차에 매달려 탈출을 시도하다가 경찰관에게 붙잡혔다.

달리는 열차에 매달려 기를 쓰던 친구가 끌어내려지는 현장을 눈앞에 보고도 발레르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열차의 난간에 올빼미가 앉아 아무리 쫓아도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올빼미는 밤눈은 밝지만 낮에는 잘 못 본다.

마치 발레르카의 처지를 상징하듯, 그런 이미지가 삽입되었다.

이미 경험 속에서 부딪혀 확인했던 세계의 모순은 발레르카에게 총체적 의미가 빠진 단면들이었다.

즉, 세계를 조망할 눈이 없는 셈이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 재수없는 '블래드'한테 꾀여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범죄집단의 전령과 같은 앉은뱅이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 또한 사회의 한 그늘이다.

'구부러진 길에 힘차게 노래 부르면 젊음이 돌아올까. 춤을 추고 싶어, 다리가 근질근질… 검은 구름이 흘러가고…' 다리가 없는 사람이 춤을 추고 싶다는 소망은 자유의 갈망일 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사람이 발레르카를 범죄 조직에 넘겼다.

이렇게 이중적인 모순의 세계 속으로 발레르카가 밀려들어간다.

그것은 동심의 세계를 지켜줄 보호자가 없음을 말하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죽음을 뜻하는 절망을 말한다.

발레르카가 어머니 동료를 찾아갔을 때, 별 도움을 얻지 못했다.

경찰관에 붙잡혀 스촨으로 송환될 상황에서 또 도망쳐 나왔을 때, 일종의 인신매매처럼 떠넘겨진 곳은 범죄조직이었다.

이것이 버려진 아이의 자기 차례였다.

그 결과로, 보석상의 피살현장에서 그의 얼굴에 피가 튀겨 흘러내리고, 구부러진 창살의 그림자가 두려움에 질린 얼굴을 갈랐다.

말하자면 죽음의 신이 손짓하고 있었지만, 발레르카는 올빼미처럼 눈앞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없었다.

'죽지마!'라는 기원은 동심의 세계를 돌보지 않고 포기함으로써, 또 거기에 가해지는 이중적 절망을 향한 마지막 소망이 된다.

다시 말해, 스촨에서의 탈출이 결코 자유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기원은 진정 얼어죽지 말라는 역설적 희망을 말한다.

4. 부활할거야 얼지 말라는 기원이 죽지 말라는 것으로, 또 부활하라는 것으로 바뀌는 소원의 이면에는 절망이 깊어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결말에 가서 이 영화가 두 아이를 겨눈 총성이 울리고 세상이 적막해져 버리는 비극, 끝내 소년의 어머니는 미쳐버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스탈린 체제의 기만과 공포정치를 풍자하고 고발하고 있는가. 열심히 일하면 더 준다고 노동자를 얼러 조국에 봉사하고 희생시켰는데, 그 대가는 아우성을 쳐서 받는 밀가루이고 가난이었다.

'조국을 위해 석탄을 캐었는데, 이제 자신을 위해 살 때'라고, 노동자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관료나 비밀경찰은 인민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감시를 한다.

똥물이 넘친 일, 열차가 전복된 일 등은 발레르카가 어린 생각에 저지른 분풀이 사건이지만, 그런 지배권력에 대한 풍자이고 저항이 들어있다.

그러나 발레르카의 행위는 반항의 수준에도 미칠 수 없었다.

세상 모르는 아이는 끝내 희생자가 되었다.

이 희생의 의미를 되살리는 것은 소년 소녀의 사랑의 노래이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절대 서로 잊지 않겠다고, …비행기가 땅바닥에 처박혀 프로펠러는 멈춰지고…그녀는 친구가 죽은 것을 알고는 비행기에서 낙하산도 없이 땅으로 뛰어내렸다네…' 순정과 순수한 동심은 훼손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남기는 의미가 '부활하거야'라는 것이다.

갈리아는 '청소아줌마'라는 놀림을 받았듯이 어른처럼 일하며, 일찌감치 기성 세계의 가치관을 일부 경험하고 있었다.

발레르카는 철없는 아이였지만, 고향을 떠나 사회의 밑바닥을 돌면서 최악의 모순 사회를 경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이일 뿐인 점이 순수한 동심을 말하게 한다.

아이들은 애초에 폭력의 수단이 되는 돈, 권력, 무기가 없기에, 순수한 인간이다.

그야말로 사회적인 의미의 어떤 소유로부터 떠나 말할 수 있는 것이 동심이다.

이 영화가 극단적인 사회 정치적인 모순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순수함에 의해 반사되는 내용과 흑백의 영상에 있었다.

'밝음'과 '어둠'의 대비된 흑백필름의 빛은 바로 그러한 세계의 명암을 뚜렷이 드러내었다.

그래서 소년, 소녀의 사랑은 때묻지 않음, 훼손될 수 없는 무엇이 되살아나는 부활의 의미를 말하게 하였다.

5. 후기처럼 쓴 시 한 편>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시 산조(詩 散調)아이들 놀이는 죄가 없다그건 표절도 독창도 아니면서공은 누굴 칠지 모른다소리를 죽이는 아해는 달리고 싶다뛰더라도 머리는 나무에 걸어 두라기압골이 바뀌면 그도 나부낄 거야아이들 편먹기는 악이 없다그건 어제도 오늘도 아니면서강남이 강북을 삼킬지 모른다굶주린 아해는 한 입에 먹고 싶다이것저것 뒤섞어 쑤셔 넣더라도버들잎 띄우듯 오마이 얼굴로 삽목(揷木)하라시간이 되면 그도 피어날 거야탈북자 구보씨의 시간에는 명(命)이 없다그건 월경(越境)도 이주(移住)도 아니면서수수방관하는 빈말의 시간이 그를 조를지 몰라도를 모르는 구보는 맨발로 날고 싶다구천을 헤매더라도 간은 백두산에 묻어라썩어지면 그도 떠돌지 않을 땅을 얻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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