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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시대에 꺼지지 않는 등불
얼마 전에 캄보디아를 다녀왔다.

두 가지 충격이 나를 거듭 생각하게 했다.

하나는 소위 킬링필드라는 죽음의 들판인데, 발굴한 해골을 쌓아둔 위령탑 속 검은 눈들은 영원히 감을 수 없는 듯, 폴 포트 정권(1975-1978)의 잔혹함을 되새기고 있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 그 현장은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소름을 돋게 했다.

또하나는 하루 만에 재촉하며 둘러본 앙코르 톰과 앙코르 와트 등이다.

천년만년 영생불멸을 꿈꾼 사원은 정글 속에서 허물어져 가면서도 견디고 있었다.

주절주절 수백, 수천 미터의 회랑의 벽면을 따라 끝없이 기어나오는 얘기는 더는 침묵할 수 없었던 듯했다.

그렇게 되살아 숨쉬는 과거는 현재를 꾀어내어, 나의 시간을 무중력 상태로 둥둥 떠가게 했다.

게다가 타 프롬의 곳곳에 구조물을 휘감으며 자라고 있는 벵골보리스(banyan tree)는 입을 딱 벌리고 세월의 생주이멸을 한꺼번에 토해내고 있었으니… 나는 정신을 차려 지난 시대와 함께 현재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캄보디아에 대해서 거의 모른 채, 세계 7대불가사의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앙코르 여행을 반은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맞닥뜨린 캄보디아는 그 역사를 훑어보게 했다.

폴 포트를 낳고, 수백만 명의 죽음을 부른 역사는 어디에서 왔는가. 현장에서 돌아온 나는 인간의 근본 문제와 사회정치적 존재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밀림지대를 헤치고 찾았다는 앙코르 유적은 새삼스럽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꼬리를 물고 의문이 일어나는 바람에, 여행 첫발의 순진한 생각은 달아나고 어느 새 식민지침탈의 세계사를 곱씹어야 했다.

20세기 한반도의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캄보디아도 ‘같은 종류’의 비극적 역사였다.

1884년 노로돔 국왕이 프랑스에 통치권을 할양하면서 식민지 치하에 들어섰고, 1953년 독립을 했지만, 민중들의 고통은 끝이 없었다.

왕정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 등 정치 지도자들이 부르짖은 이념들은 지독한 내전과 전쟁을 불러일으키고 나라를 온통 황폐화시켰다.

1991년, 13년 동안 끌어온 내전이 종식되고, 이듬해 국제기구 대표가 도쿄에 모여 캄보디아 재건을 위해 <캄보디아재건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후에도 정국이 불안했지만, 1998년 자유 총선거에 의해 훈센 수상은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재집권했다.

캄보디아는 정치체제와 나라 이름을 여러 차례 바꿨다.

시하누크 왕이 주도한 친중국 노선의 캄푸치아왕국, 친미·친서방의 크메르 공화국, 공산국가인 민주캄푸치아, 친베트남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거쳐, 1989년에 현재의 국가명 <캄보디아국가 The State of Cambodia>로 바뀌었다.

민중들에게 가난과 고통만 안겨다준 정치체제의 노선 이념들은 과거 식민지 상황에 뿌리가 있었다.

그 상흔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채 다시 희망을 걸고 일어서고 있는 캄보디아 땅―여행 중에 살펴보았던 수도 프놈펜과 앙코르 지역의 거리는 자유롭게 보였다.

하지만, 빈부의 격차는 심각했다.

헐벗은 아이들의 맨발과 새파란 젊은이의 외제 승용차의 대조는 자본주의 모순의 첫 단추처럼 느껴졌다.

식민지 상황과 내란, 살육적 역사의 잠재된 원한 등 캄보디아의 이미지는 자꾸 한반도 분단의 뿌리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현재 전쟁 상황에 놓여있는 이라크에서 고통받고 있을 아이들과 민중들의 처지가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아니, 인간이 만든 온갖 부조리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길을 찾아야겠다는 절실함이 엄습해 왔다.

어떤 경우에서든, 국가와 민족의 뿌리가 되는 민초(民草)들의 최고 생명이 무(無)로 돌아갔는데, 이데올로기가 무슨 빛을 발을 것인가. 암울한 시대에, 분명히 이 한 생각에서 꺼지지 않는 등불이 밝혀진다.

이때 생명은 탈이념적·절대주의적 생명이나 무슨 종교적 숭엄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민초인 나는 사회정치적 존재로서 한 생명이며, 그 속에서 보장받아야 할 생명이다.

어리석고 야만스럽지 않게, 보통의 인간 사회를 보는 눈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킬링필드의 위령탑은 캄보디아 역사에 대한 경종으로만 울리지 않는다.

제국주의적·침략주의적 민족주의는 말할 것 없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만들어진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 또한 제국주의만큼 위험하다.

공평한 눈으로 볼 때, 지금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은 목숨을 지키고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목숨을 판돈처럼 걸고 목숨을 얻으려고 하고 있다.

거기에 우리 젊은이의 목숨을 걸라고 한다.

민주주의의 보편 가치 속의 생명은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배타적 영역으로 가르고 이익을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캄보디아를 보고 느낀 가장 소중한 점은 나에게 그와 같은 역사적 관점을 새삼스럽게 분명하게 일깨워 준 일이다.

한반도와 이라크, 인간 사회 어디에서나 손잡고 지켜야 할 생명은, 모든 약자와 맺는 세계시민적 유대감이다.

민초의 생명에 반하는 일에 국익을 내세워 파병을 주장하는 모순은 바로 그 점에 대한 혼동에서 나온다.

노귀남(불교포럼 실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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