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여시아사 노귀남칼럼
반복되는 비극, 이라크 파병을 반대한다
여행지로서 캄보디아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앙코르 유적지일 테다.

나도 그랬다.

실천승가회에서 캄보디아 지원사업을 위해 가는 길에 동행했지만, 속마음은 앙코르 와트 상상에 젖어 있었다.

막상 현지에 가서는 열강들이 식민지에 뿌린 20세기 비극의 또하나의 참상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13년 내전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불구자들, 관광지마다 헐벗은 아이들이 구걸하는 모습 등은 한국전쟁 후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프놈펜 거리에서 매연과 소음을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들은 60년대 검은 연기를 내뿜는 한국의 공장굴뚝과 비슷한 상징물 같았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내전의 상처를 잊고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새롭게 도약하려는 심지 굳은 열망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명의 학살이 자행된 ‘킬링필드’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프놈펜 근처 처웅 엑에 가서 본 현장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위령탑은 그곳에서 발굴한 해골을 유리벽 안에 성별 연령별로 층층이 쌓아 진열해 놓은 것이었다.

무심한 무정물로 보이지 않았다.

학살 현장은 캄보디아 전역에 수백 군데 널려 있다고 한다.

그 원흉인 폴 포트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역사에 대한 짧은 글을 들추어 보았다.

폴 포트는 1953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캄보디아의 현대사에서 세 번째 집권세력인 크메르 루즈의 실권자이다.

그는 국호를 ‘민주 캄푸치아’라 하여 1975년-1978년 사이 삼 년 남짓 집권했다.

폴 포트의 급진적 개혁정치는 공산주의, 배타적 민족주의(반 베트남 민족주의), 민중주의를 축으로 해서, 자본주의나 외세와 연계된 사람들을 가차없이 숙청했다.

대학살로 인해 1975.4.17-1977.1.1 사이에만 120만 명이 죽었다고 하나, 1980년 통계로는 200만 명, 1986년 조사로는 610만 명으로 추정한다.

그 수치마저 제각각이었다.

중국의 문화혁명을 연상시키는, 결과는 죄없는 민초들만 죽어난, 정말 어리석고 잔혹한 역사였다.

하지만 잔인한 인간 역사는 그것만 예외적이며 끝이 난 일이 아님이 더 큰 비극이다.

‘킬링필드’라는 학살은 폴 포트만 저지른 만행이 아니었다.

론 놀 군부의 크메르공화국 시기(1970-1975)인 1970년-1973년 사이, 미국은 캄푸치아에 2875회나 공습을 감행함으로써, 2차대전 때 일본에 투하한 폭탄의 150%나 되는 24만톤을 투하했고, 인구 10%가 미국 폭격과 론 놀 파견 살인부대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아무런 국제재판도 없었다.

미국의 압력이 있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노근리 사건과 같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후에 자행한 민간학살 현장이 발굴되어 보도되곤 한다.

나부터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반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성찰과 반성이 없는 역사는 과오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라크 파병문제도 역시 같은 문제이다.

이라크에서 민간인들의 죽음, 비인간적 상황에 내몰린 민초들의 삶, 어린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비참한 하루하루 등, 상상할수록 참담해지는 현실을 우리 일상은 곧 무관심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간이 뿌리고 있는 비극들을, 운명도 아닌데 운명에 맡기고 내몰라라 하는 현실 속의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정말 할말을 잃게 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내일을 그려봐야 할 것 같다.

캄보디아에도 우리 교민이 수백 명이 살고 있는 바, 세계 곳곳에 발길이 미치고 있는 마당에, 우리 역사관도 세계를 향해 열린 눈으로 바뀌어야 함은 당연하다.

한때 참전하여 적이었던 베트남과도 수교를 하고 있지만, 월남파병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있었던가. 김기덕 감독의 ꡔ수취인 불명ꡕ에 나오는 미군이 버린 처자식이 겪는 고통 속 주인공 같은 따이한 이세가 베트남에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 아무 참회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

월남파병보다 더더 나쁜 일이 될 이라크 파병을 놓고, 우리는 확실한 선택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 파병을 주장하는 쪽 명분도 나름대로 이유야 있지만, 처웅 엑의 현장이 말하고 있듯이, 죽음의 현장에 서 있다는 통찰로써 길을 선택한다면, 파병은 반드시 거둬들이고 민간 차원으로 지원을 전환시켜야 한다.

제2, 제3의 킬링필드의 역사를 단절시키기 위해서는, 민간 지원이야말로 미국을 진짜로 돕는 길이 됨을 미국을 설득해야 하며, 또한 그것은 우리도 세계시민으로 책임을 나눠지는 길이 됨을 깨달아야 한다.

캄보디아, 한국 등 식민지를 겪은 약소국 현대사의 고통을 이제 세계시민의 눈으로 다시 보고, 그 뿌리깊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지식인의 고민이 더욱 요구되는 시점에 우리가 서 있다.

프놈펜 근처 —처웅엑 킬링필드에서 그를 보는 순간,나는 죄인이 되었다.

킬링필드,채 덮지도 않았던 구덩이, 구덩이…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죽음의 잔해는더러는 들꽃으로 피고,원한이 뼛가루가 되어도차마 죽지 못해아이들 등을 타고 민들레 홀씨처럼 폴폴 날아다녔다.

1달러를 애걸하는 아이들 눈빛이나죄 없이 산 자의 피로 물들여속절없이 붉은 홍토 길이나,울퉁불퉁, 헐떡거리며 달리는 버스 안에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국제관광의 코스 상품에 진열된 그를 차창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으로 치부할까, 일상으로 내려왔어도 멈추지 않는 멀미는‘폴 포트’가 부른 처참하고 잔혹한 학살 탓만 아니었으리. 프랑스, 미국, 일본… 식민지 세계화 역사에서 뻔한 야누스 얼굴을 한 열강들의 이목구비는 구멍구멍 혼돈의 아가리,그 근처 어디쯤에서덜덜덜 눈먼 호구가 된나는 영락없이 죄인이었다.

(2003.11.3) *홍토(Laterite): 황토보다 붉은 라테라이트는 캄보디아에서 흔한 흙이다.

이기어 벽돌을 만들면 아주 단단하여 앙코르 유적 건축물의 주요한 자재로 쓰였다.

반론ㆍ정정ㆍ추후 보도를 청구하실 분은 이메일(budgate@daum.net)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불교포커스'에서 생산한 저작물은 누구나 복사할 수 있으며, '정보공유라이센스 2.0: 영리금지 개작금지'에 따릅니다. 정보공유라이센스

+노귀남의 다른기사 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