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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배제의 정치
21세기는 차이difference의 시대이다.

차이의 시대는 사회적 소수자socal minority들이 정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시민으로서 정당한 권리 누릴 수 있는 시대임을 뜻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 암울하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힘이 없고, 자유주의 원리에 근거해 정치권력을 장악한 정치엘리트 집단은 여전히 차이에 대해 무관심indifference to difference 하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의 폐해>그렇다면 차이를 무시한 현대 정치는 어떤 결과를 나았을까?우선, 기득권을 가진 지배집단은 자신의 경험, 문화, 사회적 능력과는 전혀 다른 소수자 집단에게 끊임없이 불이익을 준다.

둘째, 지배집단은 사회적 차이를 무시한 채 모든 인간은 정상(육체적·정신적)이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자신들 스스로도 특수한 차이(기득권과 부를 독점한 소수자)를 가진 집단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이런 특수한 차이가 표준이자 정상이라고 주입된다.

셋째, 이런 사회적 인식은 정상이라 불리는 범위에서 일탈한 집단(장애우, 성매매 여성, 홈리스, 외국인 이주노동자, 동성애자 등)들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

소수자들의 자기비하自己卑下이다.

이렇듯 차이를 무시한 정치는 소수자들의 정치적 진출, 경제적 성장, 문화적 신장에 심각한 불이익을 가져온다.

현 대한민국의 정치시스템 아래에서는 소수자들의 의견과 의지가 정치에 반영될 수 없고, 정치과정에 반영(참여)되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런 과정을 순환되면서 그들은 잊혀지고 감춰지게 된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소수자들을 정치과정에서 왕따 시키는 시스템으로 전락하였다.

그것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태어나면서부터 다수에 의한 소수의 배제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암송하다시피 하는 다수결의 원리가 바로 왕따의 주범이다.

국민들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제16대 국회가 벌인 대통령의 탄핵사태에서 확인했듯이 다수결의 원리는 언제든지 소수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사회적 소수자 집단을 정치과정에서 배제하는데 다수결의 원리가 한 몫을 맡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보면 어떤 정당(민주노동당조차)도 소수자들의 관심과 욕구를 정책화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소수자라고 볼 수밖에 없는 집단 출신의 정치가가 없기 때문이다.

<차이의 정치는 실현가능한가?>그렇다면 차이의 정치는 과연 무엇인가? 차이의 정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내세우는 '다수는 항상 옳다', '소수는 다수가 될 수 있다'는 신화를 부정한다.

차이의 정치는 사회적 조건이 변하고 세월이 가도 다수가 될 수 없는 소수, 정치사회의 주류mainstream가 영원히 될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진 사람들의 정치배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장애인, 홈리스, 동성애자, 외국인 이주노동자, 무학력자, 경제적 무능력자 등이 바로 영원히 주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왜 차이의 정치가 제도화되지 못했는가? 그것은 소수자 집단들이 말 그대로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소수자 집단의 정치참여가 보장된다면, 많은 혼란이 예상된다.

소수자 집단마다 요구사항과 해결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성 같은 경우는 그나마 괜찮다.

여성할당제를 실시하면 되기에…. 그러나, 홈리스, 소수인종, 동성애, 다양한 장애우 등은 할당제로 해결할 수가 없다.

너무나 소수라서 할당제로는 정치적 대표성을 부여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의 정치는 실현가능한가? 이 물음에 앞서 차이의 정치는 '옳은가, 그른가'부터 물어야 한다.

답부터 말하면 차이의 정치는 옳고 그름을 떠나 위험하다.

왜 그런지 이야기 해보겠다.

여성이라는 집단이 모두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개별 여성마다 경제적 차이도 있고, 정치적 견해도 차이도 있으며, 인종적 차이 등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여성이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여성이 '여성이라는 차이'를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주변부 여성이라 이름 붙여진 외국인 이주여성노동자, 장애여성, 성매매 여성 등의 문제가 개입되면 차이의 정치를 더욱 멀티플해진다.

이렇게 되면 전혀 다른 차이가 정치 메커니즘이 발생한다.

이는 홈리스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홈리스라고 하면 모두가 동일한 조건과 환경을 가진 개인들의 집합이라고 보기 쉽지만, 안에서 바라보면 홈리스만큼 이질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소수자 집단은 찾아보기 힘들다.

흔히 말하는 정상의 범주에 가까운 홈리스가 있는가 반면, 정신질환을 가진 홈리스도 있고, 신체장애를 가진 홈리스도 있다.

더구나 여성홈리스 중에서 정신질환을 가진 여성홈리스 문제로 들어간다면 이처럼 복잡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홈리스라는 차이'만 강조한 채 정치에 참여하기란 어렵다.

더구나 한국에서 홈리스는 인원수로도 3만명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 무슨 정치참여가 보장되겠는가.이렇듯 차이의 정치는 다수결의 원리에 의해서 배제된 소수가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자마자, 다른 소수자 집단들과 사회를 바라보는 공동의 큰 틀을 형성하지 못해 한 사회의 공공선公共善을 외면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 특수한 이해가 걸린 차이의 강조는 다른 특수한 이해가 걸린 차이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차이는 어떻게 현실 정치에 스며들어야 하는가?> 대의제 민주주의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정치가 차이를 무시했고, 차이의 정치가 공공선을 추구하는데 무능하다면, 무엇이 대안인가? 현재로서는 양자의 적절한 결합만이 유일한 대안이 아닐까? 우선 한계는 있겠지만, 대의제 민주주의 시스템 안에 소수의 견해가 참여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국회의원 숫자 중에서 비례대표 수를 늘이는 방법이 가장 선행되어야 한다.

비례대표의 의석수가 늘어나면 소수자의 인권과 권익을 대면할 수 있는 정치가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쉽지 않은 길이다.

정치개혁위원회가 제시한 비례대표의 수(100석)를 16대 국회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난도질했는지 보면 잘 알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기존의 비례대표 의석수를 줄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하고 있다.

그래도 정치의 흐름은 비례대표 의석수의 증가로 나아갈 것이다.

소수자 집단은 이런 흐름을 잘 읽고 비례대표제를 넘어 소수대표제에 대한 고민과 주장이 펼쳐야 한다.

비례대표제가 완벽하게 소수자들의 권익과 인권을 정치에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이익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

여성은 여성의 이익을, 홈리스는 홈리스의 이익을, 장애인은 장애인의 이익을… 그들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

그러나, 공공선을 무시한 집단 이기주의는 국가를 해치고, 사회를 해친다.

차이의 정치는 이런 대안 없는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차이의 정치 세력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바로 사회의 공공선을 만들어 갈 줄 아는 안목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덕목이 추가한다면, 차이를 인정할 줄 알고 국가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연대할 줄 아는 정치세력이 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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