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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불교의 가치
광화문 탄핵반대집회에 갔습니다.

뭐 다들 그러하셨겠지만, 특별히 어떤 고심끝에 결단을 내린 후 간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저 상식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한 것이죠. 말하자면 지극히 상식의 눈으로 보면, 대통령탄핵은 웃기는 일입니다.

우린 이런 비상식과 온갖 희극을 지겹도록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불교의 눈이 개입되면 가치판단의 선택에 좀 망설여지게 됩니다.

망설임의 하나는 엉뚱하게 양시양비론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지당하신 말씀’과 ‘호통’만 보입니다.

벌써 교계신문에는 아무개 교수가 “이제 국민 모두가 차분하게 스스로의 허물을 찾는 일로 한 발짝 물러설 필요가 있다”고 엉너리를 칩니다.

물론 경전을 기계적으로 끌어다 쓰는 일도 빠트리지 않습니다.

이런 호통은 지겹습니다.

무엇보다 그 불교의 논리적 근거가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현실과의 지속된 긴장은 보기 어렵습니다.

교계 지식인들은 아직도 대중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하품나는 계몽성은 2004년에도 계속되고 있군요. 제가 고민되는 것은 가치판단의 불교성입니다.

이는 상식과는 또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물론 우리 사회는 상식의 가치판단마저 큰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탄핵반대 촛불집회에서도 보이듯이, 비상식에 큰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불교가 새롭게 기여할 점은 별로 없습니다.

거기에 기여할 사람들은 많죠. 다만, 불교인은 상식 수준에서 참여할 뿐입니다.

우린 일반인의 상식의 가치와는 또다른 가치체계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불교가 세상을 바라보고 가치를 판단할 때는 연기, 중도, 무아의 관점입니다.

두루 알다시피 연기란 상의상관성의 성찰이며, 중도란 바름(正)과 삿됨(邪)을 명철하게 안다는 것이며, 무아란 집착할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하여, 불교인은 늘 이러한 상의상관성이란 성찰의 눈을 갖고 온갖 집착없이 바름의 길을 꼼꼼하게 제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정치적 선택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이 의지해 바라보아야 할 것은 연기와 중도, 그리고 무아의 세계관일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은 현실 문제를 불교적으로 판단했던 경험이 낯섦입니다.

불교적 판단은 불교경전 구절을 기계적으로 끌어내어 도덕적 훈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취공이나 악평등의 함정으로 빠지면 안됩니다.

또한 판단의 주체는 무아의 세계관을 갖고 있어야 하며, 판단의 내용은 연기성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현실세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현상을 치밀하게 읽는 경험이 지속적으로 축적되어야 합니다.

까닭에 우리들이 이러한 상의상관성을 성찰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는지, 그리고 무엇이 바름이고 무엇이 삿됨인지를 긴 호흡으로 볼 수 있는 시야를 튼튼하게 확보해왔는지, 이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무아의 세계관이 현실에서 어떤 긴장성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의 인과성은 또 어떠한가요? 이 모든 것이 차곡차곡 고민한 만큼 소통되고, 쌓여져야 합니다.

우린 그 경험이 너무나 거칠고 무딥니다.

까닭에 현실에서의 불교적 판단이 늘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우선 상식의 눈으로 판단하지만, 늘 불교적 판단의 근거를 성찰하게 됩니다.

탄핵정국의 상식적 판단과 함께 제가 마음 한편이 불편하게 꼼지락거리는 까닭은 이 때문입니다.

상식의 가치와 함께 하면서, 그와 변별된 불교의 가치를 드러나지 않게 추구하는 것, 힘들지만 가야할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bulkp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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