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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탑과 탑비 부부는 함께 살아야 한다가족과 헤어져 살아가는 불쌍한 문화재들
고향을 떠나 다시 가지 못하는 사람은 불쌍하다.

살아 있으면서도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더욱 불쌍하다.

신혼으로 헤어져 반세기를 혼자 살아왔던 정귀엽 할머니의 경우는 너무 가슴 아팠다.

얼마 전 이산가족 상봉 때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된 남편과 헤어지면서 이쪽이든 저쪽이든 함께 살면 안 되냐고 울면서 몸부림쳤다.

통일될 때까지 절대 죽지 말자고 남편과 다짐하기도 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헤어져 살아야 하는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고향에 함께 있어야 서로 의지하며 평생을 외롭지 않게 살 텐데, 피치 못한 사정으로 헤어져 사는 문화재 역시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과 탑비 ⓒ2005 신병철 경복궁 서쪽 지역에 멋있는 승탑이 몇 개 있다.

그 중에서도 법천사터에서 옮겨온 지광국사의 무덤인 현묘탑은 너무 멋있다.

몸 전체는 4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 승탑의 몸매는 팔각원당형으로 8각형에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을 갖추고 있다.

지광국사 현묘탑은 우리나라 승탑으로서는 특이한 형태라 하겠다.

원래 이 승탑은 강원도 부론면에 있는 법천사라는 절에 있었다.

11세기 말 고려의 지광국사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국사라면 나라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스님이었다.

지광국사가 1076년에 천명이 다함을 알고는 처음 출가했던 법천사로 돌아와 열반에 들었다.

당시 국왕이었던 문종은 1080년대에 국사의 사리를 봉안하는 탑과 탑비를 조성하고 현묘탑이라 이름 붙였다.

법천사는 고려 때 기세를 유지하다가 조선에 들어와 언제인지 잘 모르지만 폐사되고 말았다.

국사나 왕사와 같은 당대 최고 스님의 경우에는 승탑과 함께 그의 일대기 업적을 적은 탑비를 세웠다.

지금 강원도 부론면 법천사터에는 지광국사현묘탑비가 혼자 외로이 서 있다.

이 두 문화재는 고려를 대표하는 승탑과 승탑비로 거의 완전한 형태로 인정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헤어져 살고 있다.

승탑을 일제가 경복궁에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헤어져 옮겨 산 지 적어도 70년이 넘었다.

이들이 불쌍한 이산가족 문화재이다.

일제는 강점기 동안 우리나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들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 중에서 보기에 환장할만한 것들을 여차하면 일본으로 빼가기 위해 경복궁으로 옮겨다 놓았다.

숭유억불의 정궁 경복궁을 왜곡시켜 우리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옮겨가기 쉬운 수많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석조물은 쉽게 옮겨가기 힘들었다.

해방 이후에도 이런 문화재들이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경복궁에 그냥 남아 있었다.

중앙청으로 쓰이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박물관에서는 관리의 수월함을 이유로 이들을 고향으로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문화재들은 경복궁으로 옮겨 세우기도 했다.

▲ 지광국사현묘탑 상륜부, 탑비의 옆면 용무늬와 귀부의 얼굴 ⓒ2005 신병철 다시 우리의 불쌍한 법천사승탑과 탑비로 가보자. 승탑은 4각의 특이한 형태로 화려하고 우아하다.

땅과 맞닿은 지대석은 넓고 화려하여 안정감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구름 모양으로 치장하여 탑을 비상한 존재로 만들었다.

삼단으로 구성된 기단은 화려하다.

커튼 장식이 특이하다.

그 위에 올린 몸체가 최고의 존재임을 표현하는데 무리가 없다.

탑몸은 4각을 유지하면서 지붕으로 덮여 있다.

지붕은 두껍고 지붕의 끝은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탑의 머리 부분인 상륜부는 하늘로 연결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화려하다.

온갖 장식을 다 갖추었다.

탑비도 탑 못지않게 화려하고 우아하다.

일단 크기도 만만치 않다.

아마도 우리나라 최대의 완전한 탑비일 것이다.

무거운 것을 짊어진 용의 머리를 한 거북이는 무거운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듯 미소를 띠고 있다.

거북이가 입고 있는 갑옷도 부드럽다.

밍크코트 입은 거북이 같다.

귀부는 탑비의 기단에 해당한다.

그 위에 비몸을 올렸다.

사방에 테두리 장식을 하고 그 안에 지광국사의 업적을 새겼다.

비몸 윗부분에는 다시 화려한 장식을 넣었다.

지광국사의 인생 전체를 글자로 표현하고 그것을 이상화했다.

비몸 위에는 덮개를 해 넣었다.

이무기 모양이 일반적인데, 그 일반에서 벗어났다.

모자 모양이다.

덮개 꼭대기에는 탑의 상륜부와 같은 장식을 넣었다.

덮개는 중국 사람들이 즐겨 쓸 것 같은 모자 모양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국보급 문화재가 한 쌍임을 말해주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탑의 상륜부와 탑비의 이수 머리 부분이 거의 비슷하다.

탑의 상륜부 위로 치켜 올라간 꽃 모양이 탑비 덮개의 모자 모양과 너무나 닮았다.

이들은 누가 남편이고 누가 아내인지는 모르지만 부부와 같은 한 쌍이다.

지금 법천사터는 열심히 발굴중이다.

승탑의 자리가 정확히 어느 곳인지 알 수는 없지만, 탑비가 있는 바로 옆자리 건물터가 아닐까 추정된다.

승탑이 경복궁으로 옮겨가버린 뒤에 탑비만 혼자 법천사터에 외로이 자리 잡고 있다.

언제나 짝이 돌아오겠지 하면서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고향을 지키고 있다.

함께 있을 때 지었을 것 같은 헤벌쭉 미소는 조금은 슬퍼 보인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임을 기다리며 쓸쓸히 짓고 있는 미소처럼 보인다.

헤어져 사는 존재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도 사람들은 외롭게 보게 되나 보다.

지광국사현묘탑과 탑비는 그래도 헤어져 살면서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고향이 어딘지도, 짝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죽었는지 조차 모르는 존재는 외롭다 못해 볼 때마다 가슴 쓰리다.

▲ 경복궁 염거화상탑과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 ⓒ2005 신병철 경복궁 지광국사현묘탑 바로 옆에는 조그만 승탑 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전흥법사염거화상탑이라는 승탑이 있다.

흥법사라는 절터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왔다는 전설(?)만 알려지고 있는 염거화상의 승탑이다.

지대석도 없어서 새로이 만들어 주었다.

몸 전체가 8각과 원형으로 되어 있는 8각원당형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그래도 기단의 아래 부분이 어째 이상하다.

비슷하게 생긴 실상사 승탑과 비교해보면 왜 이상한지 금방 알 수 있다.

기단의 가장 아래 부분인 하대석이 없어 균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대석과 지대석의 크기가 크고 무거워 옮겨오지 않았나 보다.

원주시 간현 부근에 있는 흥법사를 발굴하지 않아 이 승탑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 곳에 있었다는 보장도 없다.

고향도 잃고 가족도 헤어졌다.

게다가 아래 다리에 해당하는 지대석과 하대석을 잃었다.

불구가 되고 말았다.

고향도 가족도 잃고 몸도 불구가 되었으니 처량하기 짝이 없다.

이 승탑은 통일신라시대 우리나라 팔각원당형 승탑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기단의 상대석에 연꽃이 만발하였다.

두 겹으로 피어오른 연꽃 대좌 위에 안상을 새긴 굄대를 만들고 그 위에 몸체를 올렸다.

탑몸의 가운데를 파내고 사리를 담은 사리함을 넣었을 것이다.

탑몸 위에 지붕을 덮었다.

기와를 일일이 새겨 넣었다.

서까래와 연목이 구비된 겹처마집이다.

상륜부는 없어지고 말았다.

이런 양식의 승탑은 이 염거화상탑이 가장 오래되었으니 불구임에도 국보가 되었다.

탑은 부처님의 무덤으로 예배물로써 불교의 유입과 함께 곳곳에 세워졌다.

국가가 불교를 이데올로기로 삼아 지배 권력의 절대성을 확보한 시기에는 탑을 많이 세웠다.

승탑은 건립할 수 없었다.

통일신라가 번영을 구가했던 8세기 때까지는 그랬다.

신라하대 즉 말기가 되자, 신라 진골 체제는 사회의 새로운 진전을 담아내지 못했다.

불만이 쌓였고 모순이 커져갔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세력이 지방 곳곳에서 등장했다.

이들은 사람은 누구든지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선종이 들어와 유행한 것이다.

이들은 국왕이 곧 부처이며 석가의 집안이라면서 국왕 권력을 절대화한 것을 비판했다.

부처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왕도 진골이 아니라도 누구든지 될 수 있다고 했다.

호족들은 선종의 한 종파를 형성한 고매한 스님이 죽자 그들의 무덤을 탑처럼 만들어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승탑의 시작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역시 부처나 보살처럼 인식케 했다.

궁예가 생보살로 자처하고 관심법으로 권력을 절대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 양양 진전사터 승탑 ⓒ2005 신병철 왕위쟁탈전으로 중앙은 쪼개지고 호족들이 창궐한 신라하대 시기는 승탑의 시기였다.

최초의 승탑은 선종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전파한 도의선사의 승탑이었다.

양양 진전사터 위 산등성이에 있는 이 승탑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도의선사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4각의 탑에서 8각의 승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이자 최초의 승탑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이런 추정을 더욱 가능케 한다.

기단은 신라탑의 전형이 4각의 2중 기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탑몸은 8각이며 단층으로 간략하게 만들었다.

지붕도 해 넣었다.

상륜부는 동그란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간소하게 만들었다.

도의선사의 제자이자 제2대 선종 교주가 염거화상이었다.

염거화상탑이 신라 승탑의 전형인 8각원당형이 되었다.

9, 10세기 전국 각지에 이런 뛰어난 승탑들이 지방 세력의 발호와 함께 조성되었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대공탑은 이런 승탑의 최고 걸작이다.

뛰어난 비례감각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불교 관련 존재들을 깊이 새겨 넣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황홀해진다.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대공탑 ⓒ2005 신병철 신라 말기의 호족들이 연합하여 세운 새로운 왕조가 고려였다.

고려 초기 고려 건국과 재편성에 지대한 공이 있었던 스님들을 국사나 왕사로 삼고 그들이 열반에 들자 무덤인 승탑을 만들었다.

고려 초기의 사회상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이 여주 고달사 승탑과 승탑비다.

여주고달사터 승탑과 탑비는 일단 크기가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당당하다.

비례와 균형도 적당하여 아름답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중대석에 새긴 용의 모습은 당시 국왕과 고려 초기의 자신감 넘치는 호족들의 강건한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누구의 승탑인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아래에 있는 원종대사혜진탑이 바로 이 승탑이 아닐까 추정한다.

▲ 여주 고달사터 승탑 ⓒ2005 신병철 원종대사혜진탑비로 알려지고 있는 귀부와 이수 역시 튼튼하고 힘차다.

어떤 무거운 물체라도 짊어지고 있을 것 같다.

어룡의 퉁방울로 표현한 눈동자도 겁난다.

고난을 극복하고 신생국가를 탄생시킨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것인가. 이런 자신감도 호족들이 중앙귀족화하면서 변한다.

국왕을 정점으로 한 귀족들간의 위계질서를 구축해갔다.

그 길은 원심력이 강한 호족들에게 특권을 상당히 부여하여 구심력을 지닌 귀족으로 만들어나가는 길이었다.

광종 때의 과거제도와 경종 때부터 시작한 전시과체제를 통하여 호족들을 중앙귀족으로 변화시켜나갔다.

이런 귀족화 경향은 승탑과 탑비에서도 나타났다.

거돈사터 승탑과 탑비가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탑비는 강원도 부론면 법천사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곳 거돈사터에 있다.

귀부의 귀갑문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표정도 고려 초기의 힘찬 느낌이 사라졌다.

제 등에 업혀 있는 것이 무거운지 가벼운지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하염없이 비몸과 덮개를 업고만 있다.

▲ 거돈사터 원공국사 승묘탑과 탑비 ⓒ2005 신병철 그런데 승탑은 거돈사에 없다.

일제 때 옮겨 버렸다.

이 문화재들도 불쌍한 이산가족이다.

얼마 전까지 경복궁에 있었다.

승탑은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고려초기의 힘찬 느낌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신라하대 뛰어난 조형술이 살아난 것도 아니다.

기왓골은 갖췄지만 기와모습은 표현하지 않았다.

점차 화려하고 고매한 기품을 찾는 귀족적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고려사회의 귀족화와 더불어 승탑과 탑비의 귀족화도 뒤를 이었다.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과 탑비가 이런 귀족화 경향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

원래 충북 중원의 정토사에 있던 것을 일제가 1915년 경복궁으로 옮겼다.

승탑만이 아니라 탑비마저 옮겼다.

그러나 경복궁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승탑은 해체 보관하였는지 지금까지 보이지 않고, 탑비만이 불쌍하게 서 있다.

그래도 한 쌍이 모두 옮겨왔으니 이산가족은 적어도 아니다.

고향을 잃었을 뿐이다.

▲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과 탑비 ⓒ2005 신병철 홍법국사의 승탑은 팔각원당형의 기본을 잃지 않았다.

새로운 모형을 가미하였다.

독창성이 돋보인다.

넓은 지대석 위에 엎어진 연꽃으로 자리를 만들었다.

그 위에 용이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새긴 높지 않은 중대석을 놓았다.

다시 위로 핀 연꽃이 조금 넓은 자리를 만들었다.

독창성은 그 위에 활짝 꽃피었다.

타원형의 공 모양 탑몸을 얹은 것이다.

중간에 십자로 띠를 두르고, 십자가 만나는 곳에는 연꽃을 살짝 새겼다.

지붕을 받치는 긴 목, 그 위에 기왓골이 없는 지붕을 올렸다.

추녀 끝은 약간 뒤집어서 큰 꽃으로 장식했다.

남아 있는 귀꽃이 별로 없어서 안타깝다.

탑비 역시 매우 화려하고 정교하다.

홍법국사라는 스님이 매우 섬세한 분이었나 보다.

활짝 웃고 있는 귀부의 용 얼굴이 국사의 얼굴일까. 탑몸을 덮고 있는 이수의 조각도 섬세하다.

승탑과 탑비의 신체적 균형과 비례는 정말 감동적이다.

승탑의 아래 넓이와 높이, 기단과 둥근 몸과 지붕의 비례, 네모지고 팔각지고, 둥근 모양들이 이뤄내는 균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냥 꼭 껴안고 싶어진다.

쳐다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국사의 인품 속에 반할 것 같다.

이로부터 60년쯤 뒤 1080년경에 법천사 승탑과 탑비를 만들었다.

귀족적 경향이 거의 자리가 잡혔다.

승탑과 부도는 매우 화려하다.

승탑비의 비몸 측면에 새겨진 두 마리 용의 모습은 눈부시다.

거북의 귀갑도 엄청 부드러워졌다.

승탑의 장식도 최고다.

모서리와 추녀에 가르빈가상과 부처상 등을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고려의 귀족화는 승탑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이제 개별성을 인정하는 선종의 역할은 줄어들고, 대신 보편성을 강조하여 중앙집권화를 뒷받침하는 화엄종 중심의 교종이 대세를 장악했다.

선종 선사의 무덤으로 출발한 승탑에 쏟았던 관심이 불화나 청자로 옮겨가고 말았다.

▲ 인각사 보각국사 정조지탑, 일연스님의 승탑 ⓒ2005 신병철 13세기 말, 경북 군위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사 일연스님의 승탑이 이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당대 국가 최고 스님의 무덤인 정조지탑은 상당히 조잡하다.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았으나 옛날의 굳건하거나 우아한 비례는 사라졌다.

일연스님의 성품이 수수하였나, 아니면 형식보다도 내용을 소중히 여긴 스님이 무덤을 수수하게 만들라고 유언이라도 내렸나.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스님들의 역할이 다시 되살아났다.

불교에 내세를 맡기고 있는 민중들은 높은 깨달음을 얻은 스님들을 따랐다.

여말선초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스님들은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드는 편에 많이 섰다.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라는 무학대사와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화상 등이 이런 스님들이었다.

고려 말에 입적한 스님들의 승탑이 다시 정성과 돈이 들어갔다.

충주 청룡사터에는 별로 크지 않은 원융대사승탑이 있다.

이전의 승탑과 모양이 많이 변했다.

탑몸에 난간을 표시하고 면에 온갖 조형물을 새겨 넣었다.

지붕은 두꺼워졌다.

몸무게가 위로 많이 치우쳐 조금은 불안하다.

포천 회암사터에 있는 무학대사의 무덤으로 알려진 승탑도 이와 유사하다.

조선 초기 숭유억불을 내세우면서도 조선 건국에 한몫을 한 스님들의 무덤을 이 정도 수준에서 만들었다고 하겠다.

▲ 충주 청룡사터 보각국사 승탑과 회암사터 무학대사 석등과 탑비 ⓒ2005 신병철 유독 승탑과 탑비가 고향을 떠나고 가족을 헤어진 경우가 많다.

고향에 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 역시 가장 행복하다.

문화재 역시 태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야 행복해 보인다.

역사적 가치도 살아난다.

저 법천사탑비의 귀부와 거돈사의 귀부용의 표정은 참으로 처량해 보인다.

원래는 돌아가신 스님의 멋들어진 표정이었겠지만, 지금은 자신의 짝과 함께 살면 안 되냐고 울먹이는 이산가족 상봉장의 할머니 모습 같다.

신병철(shinbcl)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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