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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과 허왕후의 국제결혼식장 장유사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탑, 왕자들이 어머니를 기려 세운 무척산 모은사도 볼만
낙동강은 한 줄기가 아니다.

그래서 모래삼각지가 있다.

부산에서 보면 서쪽으로 갈라진 낙동강이 바로 서낙동강이다.

그 서낙동강을 끼고 김해가 있다.

김해는 쇠와 바다가 뭉친 이름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보면 김해에서는 쇠가 많이 생산되어 덩이쇠(철정)를 돈처럼 쓰고, 한, 예, 왜, 낙랑과 대방군에 수출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김해 일대에서 쇠가 많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김해에서 삼랑진으로 올라가는 국도를 타고 30분 정도 달리면 도로변에 생철리라는 마을이 나타나는데 생철리라는 마을 이름은 철이 생산되는 마을이라는 뜻이니, 이 역시 김해 지역이 철 생산지로 유명했음을 증언해준다(합천의 '야로'도 철을 가공하던 곳이라는 뜻의 지명이다).생철리는 무척산 줄기 바로 아래에 붙어 있다.

무척산은 사람에게 저절로 올라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무척' 아름다운 절경과 정감 있는 등산로를 간직한 산이다.

그리고 무척산 줄기는 모은사라는 신비로운 절을 품고 있다.

생철리를 출발하여 100미터만 가면 모은사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나온다.

길은 한 사람만이 간신히 걸을 수 있을만큼 좁고 꼬불꼬불하고 가파르다.

그래서 스님이 드실 곡물 등도 사람이 지고 오르지 못해 마치 광주 무등산 정상에 놓인 하늘 철길 같은 레일을 타고 오르는 수레를 이용해 실어 나른다.

어쨌거나 모은사 오르는 길은 사람이 등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무를 부여잡아야 하고, 오금이 저린 순간도 제공해주는 산길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산안개가 자욱하고, 길 둘레를 에워싸는 폭포물 떨어지는 소리가 온통 사람의 마음을 조여 온다.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김수영)." ▲ 김해와 삼랑진 사이의 무척산. 생철리에서 등반하면 모은사에 닿는다.

(출처: 김해시청 관광안내도) 그 길 끝에 모은사가 있다.

절 역시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

아무도 없다.

이 절, 아니 몇 채의 암자라고 하는 게 옳겠다.

허왕후의 왕자들이 어머니를 기려 세웠다는 이 조용한 암자에 닿아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속세와는 차단된 산속 이슬 같은 찬 공기를 마시노라면 불자가 아니라도 저절로 시주가 하고 싶어지고, 삼국통일을 꿈꾸던 진흥왕이 왜 옥좌도 내놓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법운이라 칭하였는지 감히 짐작이 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필자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은 생철리 무척산 모은사에 직접 닿아보면 깨닫게 되실 것이다.

그렇다고 김해에서 생철리, 무척산, 모은사를 먼저 들르는 여정을 필자가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그저 김해에 온 여행자라면 아무래도 장유사를 먼저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수로왕릉, 김해박물관, 허왕후릉, 구지봉부터 찾아가는 것은 너무 평범하고, 눈으로 볼 수도 없는 패총을 수소문하는 일은 허망할 뿐이다.

▲ 구지봉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허왕후릉에는 파사탑이 있다.

(사진 오른쪽 파사각 내) ⓒ2005 정만진 무릇 낭만적인 여행자라면, 하늘에서 내려온 김수로왕과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옥이 국제결혼의 첫날밤을 보낸 장유사부터 찾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장유사를 물으면 김해 사람 중에도 고개를 가로로 내젓는 이가 허다하다.

장유사를 찾으려면 장유계곡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게 현명하다.

일단 장유계곡은 여름철의 유명한 피서지이고, 이런저런 식당들이 즐비한 곳이라 웬만한 사람들은 찾아가는 길을 설명해낼 능력을 가졌다.

장유사는 일단 장유계곡에 들어간 뒤 묻는 게 좋다는 말이다.

차량은 장유사 바로 앞까지 올라간다.

그 대신 길이 좁으니 내려오는 차량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주 천천히 승용차를 몰아야 한다.

하여튼 하늘을 쳐다보며 뒤로 자빠지듯이 한참 오르막을 운전하면 장유사에 닿는다.

장유사는 본래 왕후사였는데, 뒷날 새로 절을 지으면서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을 기려 그렇게 작명했다.

절 뒤에 장유화상의 사리탑이 있다.

▲ 김수로와 허황옥의 국제결혼식장 장유사. 수로는 여기서 허황옥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2005 정만진 물론 필자가 이곳에 가려는 것은 절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다.

앞에서도 고백했지만, 절이 자리 잡고 있는 지점이 바로 김수로왕이 허황옥을 맞아 신방을 차린 곳이기 때문이다.

수로가 토착세력의 압력을 물리치고 허황옥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세기의 국제결혼(기록에 의하면 허황옥은 인도에서 왔다.

설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도 중국에 이주해 살던 인도계 처녀일 가능성은 높다)을 성사시킨 장소이자, 왕후를 위해 임시궁궐을 세운 곳이고, 왕과 왕후가 신혼의 밀월을 보낸 명소가 바로 장유사인데, 어찌 장유계곡에서 닭백숙만 뜯고 돌아온단 말인가. 나도 이곳에서, 기다리던 신부 허황옥이 배에서 내려 자신을 찾아오는 광경을 한번 뜨겁게 바라보리라. 그러나 장유사에서는 전혀 바다가 보이지 않고, 무성하게 자란 나무숲들 사이로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힘들여 눈길을 던져도 그저 김해평야 넓은 들판만 보이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야기가 이렇게 번졌으니 결국 글 첫머리에서 말하다 말고 실종시켜버린 김해 지명 논의로 돌아가야겠다.

김해는 쇠와 바다의 땅이다.

쇠가 많이 생산되는 김해를 기반으로 한 덕분에 금관가야가 한때의 강국으로 군림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김해의 '김'과 금관가야의 '금'은 같은 글자이다), 김해평야 한복판에 위치한 금관가야의 김해가 어떻게 그 지명에 바다(해)를 거느렸으며, 무역강국 해상강국의 이름을 드높였는지는 통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책을 더 들여다보면 김해평야는 조선 후반 이후 서낙동강에서 올라오는 흙을 모아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조평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동여지도'에도 김해는 바다에 닿아 있다.

실제로 김해평야는 일제 때 조성되었다.

▲ 수로왕의 신하들이 허황옥의 배가 정박하는 것을 발견했던 바닷가 높은산. 지금은 김해평야 한복판에 놓여 있다.

ⓒ2005 정만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쟁투하던 시절의 김해는 지금의 인천, 부산 등에 해당되는 대항구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 무렵 김해가 이름난 국제무역항이었으니 허황옥은 그리로 닻을 내렸고, 대규모 국제무역이 성행하던 곳이니 자본과 권력이 몰려 있었을 터인즉 왕이 존재했고, 허황옥은 그러한 정치경제적 조건을 갖춘 김해로 와서 신랑감을 구했다.

허황옥은 (당시에는 바다와 강이 마주치는 지점이었지만 지금은 부산과 김해를 잇는 다리가 놓인) 서낙동강 장낙나루에 배를 대었고(필자는 지금 허황옥이 배를 댄 곳이 진해 망산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로 찾아온 수로왕의 신하들에게 나를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으냐고 불호령을 내린 다음, 수로왕이 왕과 왕후의 신혼의식을 치를 수 있을 정도의 궁궐(행재소)을 장유사 자리에 신축하였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바다를 떠나 행재소로 출발하였다.

자존심 드높은 신부다운 당당한 태도여! 이런 신부를 맞이하는 형국이었으니 어찌 하늘이 내린 수로왕이라 한들 들판을 가로질러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허황옥을 산중턱에서 바라보며 가슴 두근거리지 않았으리. 지난 8일 주간 <대구시민신문> 창간 준비 홈페이지에 올린 기행수필. 정만진(daeguedu)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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