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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이 부처님을 흘겨보는 까닭은?<우리 문화유산 되짚어보기 4>국보 제47호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 국보 제47호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2005 이종찬 신라 성덕왕 22년, 서기 723년에 삼법화상이 처음 지어 옥천사로 불리웠다는 쌍계사. 두 개의 계곡이 경내를 굽이쳐 흐른다 하여 이름 붙혀진 쌍계사는 그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여느 절처럼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요, 다른 하나는 달마선사의 선종을 이어받은 육조 혜능(慧能) 조사의 머리를 봉안했다는 금당이다.

그래서일까. 처음 쌍계사에 들어서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일주문(一柱門)과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門), 팔영루(八泳樓)를 지나 대웅전 앞마당에 올라서면 약간 어리둥절해진다.

분명 대웅전은 코 앞에 우뚝 서 있는데, 왼쪽 계곡 위에 걸쳐진 다리 건너에는 또 하나의 독립된 절 같은 건물이 버젓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쌍계사 대웅전 앞에 세워진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탑비(眞鑑禪師 大空塔碑)'는 대웅전과 수평으로 서 있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 비스듬하게 서 있다.

마치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은근슬쩍 힐끔거리면서도 몸은 혜능조사의 머리를 봉안한 금당 반대 편으로 돌아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뭔가 불안하다.

왜일까? 왜 진감선사 대공탑비는 대웅전과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일까. 진감선사 최혜소(崔慧昭)의 공덕을 기린 비문을 감히 부처님 앞에 함부로 내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처음 대웅전과 수평으로 반듯하게 놓여 있던 이 비를 누군가 억하심장으로 비스듬하게 돌려놓았을까. ▲ 쌍계사 종루에 매달린 종 ⓒ2005 이종찬 ▲ 쌍계사 대웅전 앞에 있는 괘불대 ⓒ2005 이종찬 지난 1월 중순,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쌍계사를 다시 찾았을 때에도 그런 느낌은 마찬가지였다.

여느 절처럼 요사채와 전각들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반듯하게 놓여 있지 않고 뭔가 흐트러져 있다는 느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 개의 계곡이 흐르는 이곳 지형을 잘 이용하여 대웅전과 금당을 지었다는 그런 비밀스런 느낌도 들었다.

물론 쌍계사(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7)의 중심은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다.

계곡 위 다리 너머 촘촘히 놓인 계단 위에 지은 금당이 아무리 독립적인 공간을 갖고 있고, 대웅전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도 금당은 대웅전을 보좌하는 건물일 뿐이다.

근데, 왜 진감선사 대공탑비는 하필이면 대웅전 앞, 탑이 세워 있어야 할 곳에 서서 부처님을 흘겨보며 비스듬하게 서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 개의 계곡이 있는 이곳의 독특한 지형에 따른 것은 아닐까. 만약 진감대사 대공탑비마저 대웅전과 수평으로 서 있으면 금당은 마치 별개의 절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게 아니겠는가. 안내자료에 따르면 이 공탑비는 대웅전과 측면으로 비스듬하게 서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직선축에 변화를 주며, 비석의 입체감까지 느끼게 해 준다고 적혀 있다.

금당에 있는 세 개의 건물도 마찬가지다.

이 건물들을 대웅전과 서로 맞물리게 세운 탓에 세 건물이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즉, 계곡이 흐르는 독특한 지형을 이용, 금당쪽 세 개 건물에 높이에 따라 각각 독립된 마당을 둠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세 개 건물이 점점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그런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 것 또한 금당과 대웅전을 이어주는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 진감선사 대공탑비는 대웅전과 수평이 아니라 거의 수직으로 서 있다 ⓒ2005 이종찬 ▲ 진감선사 대공탑비는 왜 대웅전을 흘겨보고 있을까 ⓒ2005 이종찬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쌍계사 대웅전 앞 '진감선사 대공탑비(眞鑑禪師 大空塔碑)' 는 신라 끝자락의 선승이자 불교음악 범패를 우리나라에 알리고 뿌리내리게 한 진감국사 최혜소(崔慧昭)의 비석이다.

얼굴이 검다 하여 흑두타(黑頭陀)로 불린 혜소는 삼법화상이 세운 옥천사를 손질하여 크게 세운 선사다.

전북 전주에서 생선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최혜소(774∼850)는 애장왕 5년, 서기 804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 서기 830년에 귀국했다.

그때 혜소는 당나라 불교음악인 범패를 도입, 우리나라 곳곳에 뿌리내리게 하고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77세의 나이로 이 절에서 입적했다.

이 비는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운 것으로 진감선사가 옥천사에서 입적한 뒤 절 이름을 쌍계사로 고치면서 세웠다고 전해진다.

비문은 신라 최고의 학자 최치원이 짓고 글씨를 썼다.

특히 비에 새긴 글씨는 붓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살린 탓에 마치 금방이라도 꿈틀거리며 기어갈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비 또한 임진왜란 때 왜군들의 만행으로 몸돌 여기 저기가 깨지고 금이 갔다.

비는 3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바닥에는 등에 육각의 무늬가 또렷하고 용머리 모습을 띤 거북 받침돌을, 비석 머릿돌에는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용이 마구 뒤엉겨 꿈틀거리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바닥돌에 해당하는 거북 받침돌 등 가운데에는 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고, 직사각형의 4면마다 마악 피어오르는 새떼구름 무늬를 자잘하게 새겨놓았다.

이 비의 앞면 가운데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 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은 나라를 따지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2417자 비문은 진감선사 최혜소의 공덕과 법력, 삶을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비문 끝자락에 '진감은 77세에 죽었으며 승려 생활 41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임진왜란 때 왜군들의 만행으로 곳곳이 깨지고 금이 갔다 ⓒ2005 이종찬 ▲ 진감선사 대공탑비의 받침돌은 등은 분명 거북이나 머리는 용 모습을 띠고 있다 ⓒ2005 이종찬 용 머리를 한 독특한 모습의 거북 받침돌과 금세 여의주를 물고 지리산의 푸르른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머릿돌은 화강암을 사용했으며, 진감선사의 일대기가 새겨진 비는 검은 대리석이다.

세월은 역사를 휘감으며 재빠르게 흘러간다.

지금 여기저기 깨지고 금이 간 진감국사 대공탑비도 자칫하면 흐르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긴 수난의 역사 속에서 도난 당하고 잃어버린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쩌지 못한다 하더라도 있는 문화유산은 정말 소중히 간직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가는 길/1.서울-대전-전주IC-남원-구례-19번 국도-연곡사 입구-화개면 좌회전-화개천-쌍계교-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구례, 하동으로 가면 쌍계사로 가는 버스가 많다.

이종찬(ls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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