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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은완당의 생애 마지막 작품, 봉은사 판전 글씨
서울 봉은사는 강남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는 데다 높은 빌딩으로 둘러싸여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사세(寺勢)가 대단하여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참배객들의 발길이 잦아 여느 절과 달리 어수선하다.

바로 곁에 두고도 발길이 무거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도 무거운 발길이 가벼워지는 것은 완당 김정희의 혼이 담겨 있는 마지막 작품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판전 건물의 편액글씨가 바로 그것이다.

▲ 봉은사, 봉은사는 초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즈넉한 맛은 없다 ⓒ2005 김정봉 난 서예에는 안목도 없고 조예도 깊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손꼽히는 위인의 작품, 그것도 생애 마지막 작품을 대하는 그 자체가 즐겁다.

오직 한 가지만을 보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이렇게 행복한 여행이 될 수 있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 판전 편액 글씨, 완당이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썼다고 전해진다 ⓒ2005 김정봉 봉은사는 1939년의 화재로 판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는 비운을 맞게 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판전은 화를 면하여 봉은사는 완당의 여흔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고, 완당의 마지막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판전 외에 추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대웅전 편액글씨다.

'대웅전'은 추사의 글씨로 서울 진관사의 대웅전 현판 글씨를 모각한 것인데 그나마 칠을 새로 하는 바람에 획의 맛이 없어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완당의 절집 현판으로 대표적인 작품은 은해사 대웅전 현판과 봉은사 판전 편액을 들고 있는데 은해사 대웅전의 모각 현판을 걸었더라면 판전의 글씨와 잘 어울릴 것으로 생각된다.

▲ 대웅전 현판, 완당의 글씨로 서울 진관사 대웅전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2005 김정봉 추사의 대표적 유적지는 제주 추사 적거지와 예산의 추사고택 그리고 이 곳 봉은사를 들고 있다.

판전 밑 조그마한 터에 세워진 추사 김정희의 기념비는 추사와 봉은사의 인연을 말해주고 있으나 그다지 볼만한 것은 못되고 그야말로 기념비 정도로 보면 좋을 듯하다.

▲ 추사 김정희 선생 기념비 ⓒ2005 김정봉 판전은 봉은사의 왼쪽 언덕에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평생 경전을 베껴 쓰고 그것을 판에 새기는 일에 매진한 남호 영기스님의 화엄경 경판과 다른 몇 종의 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 판전,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2005 김정봉 남호스님의 평생에 걸친 판각 노력이 없었던들 봉은사에 남아 있는 완당의 마지막 작품도 없었을지 모른다.

판각 노력에 대한 경외심에 앞서 그러한 노력으로 얻어진 조그만 판전 글씨를 있게 한 점이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봉은사에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에 몇 개의 비가 보이는데 그 중에 제일 앞에 서 있는 비가 남호대율사의 비로 눈길을 줄만하다.

▲ 남호대율사비 ⓒ2005 김정봉 완당의 생애는 태어나면서부터 연경에 가기 전 24세까지의 수업기,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구기, 관직에 나아가는 35세에서 제주도로 귀양 가는 55세까지 20년간의 중년 활동기,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나는 8년간의 만년기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 추사가 태어난 고택(사랑채), 예산 신암면 용궁리 마을에 있다 ⓒ2004 김정봉 완당평전에서는 만년기 8년을 다시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 2년 반과 북청으로 유배된 1년간의 4년간을 강상 칠십이구초당 시절로, 그 후 4년을 과천시절로 부르고 있다.

봉은사와 관련이 있는 기간은 완당의 생애 중 마지막을 보낸 과천 시절이다.

완당은 1848년 63세의 나이에 제주도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왔지만 3년 뒤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 풀려나 과천의 별서인 과지초당에 머물게 되는데 1856년 그가 죽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봉은사를 오가며 여생을 보내게 된다.

▲ 추사묘, 추사 고택 옆에 있으며 예당평야가 한눈에 들어 온다 ⓒ2004 김정봉 완당이 죽기 전 몇 달 전부터 그러니까 1856년 여름부터는 아예 봉은사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게 되고 판각불사에 관여하게 된다.

1856년 9월에 판전이 완공되고 완당이 죽기 전 3일전에 썼다는 판전의 편액글씨를 남기게 된다.

판전의 편액글씨 옆에는 '七十一果病中作'(칠십일과병중작)이라 써 있다.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라는 의미인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하다.

하긴 불가와 관련된 글씨를 쓰거나 승려들에게 글을 보낼 때 병거사(病居士)라고 흔히 쓰고 있기도 하고 다른 작품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겸손한 마음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작품도 자신이 병을 앓고 있는 중에 썼으므로 글씨가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너그럽게 봐 달라는 심정을 드러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완당평전에서 판전의 글씨를 보고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판전의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 있다.

(중략) 아무튼 나로서는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러운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완당평전 2권, 학고재)▲ 판전 편액 ⓒ2005 김정봉 판전 글씨는 기교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교를 감추고 졸함을 존중하는 경지라 할만하다.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는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로 평가를 대신해 볼까? 완당의 글씨를 몽당비자루로 쓴 것으로 비유를 많이 하는데 왜 위 글에서는 지팡이로 쓴 것 같다고 하였을까? 몽당비자루로 쓴 것이라 하면 완당평전에서 저자가 자주 사용한 것처럼 글씨에 기름기가 아직 빠지지 않았다고 판단해서일까?이 글씨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제주도로 귀양 가기 전에 대둔사의 초의스님과 나눈 일화에서 볼 수 있는 기고만장한 기운을 갖고 쓴 글씨는 적어도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추사는 제주도로 귀양 가기 전에 해남 대둔사에 들러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의 현판을 보고 초의 스님에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게 이광사인데 어찌 저런 촌스런 글씨를 달고 있는가?"라고 하면서 자신이 쓴 글씨로 바꿔 달게 하였다.

그 후 9년간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다시 대둔사에 들러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 보았어. 예전의 현판이 있거든 다시 달아주게" 하였다 한다.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온 완당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기고만장한 기개는 살아지고 완숙한 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인생의 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 판전이 아닌가 싶다.

운동을 할 때 힘을 잔뜩 주면 에러를 범하기 쉽다.

특히 골프는 힘 드리지 않고 힘을 빼고 쳐야 좋은 샷이 나온다 한다.

판전 글씨는 나이가 들어서 힘이 빠진 글씨가 아니고 힘을 쭉 빼고 쓴 글씨다.

손이 가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대로 흘러나온 글씨가 아닌가 싶다.

여성에게서 채취한 난자에서 핵을 빼낸 뒤 난자를 제공한 본인의 체세포를 난자 속에 주입하는 방법으로 세계 최초로 사람 배아 줄기세포를 만든 황우석 교수팀의 한 여학생의 신기(神技)의 손은 그냥 나오지 않았다.

황우석 교수는 젓가락으로 콩자반을 집어내는 우리의 놀라운 젓가락 문화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손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채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예술품을 그려 내는 신령(神靈)한 선조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돌아오는 길에 판전 글씨를 한 번 더 보았다.

정신이 맑아지면서 행복감에 젓는다.

비오는 토요일에 다시 한 번 오고 싶다.

김정봉(jbcaesa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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