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신행/복지
후드득 하얀 눈 위에 동백꽃이온갖 희귀식물들의 보고인 해남 두륜산… 사색하며 나무를 만날 수 있는 호젓함을 맛보라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은 내장산과 무등산을 거쳐 내려오다 다도해의 갯벌 내음이 느껴질 즈음 바다로 들기를 거부하며 그 방향을 급히 꺾어 섬진강을 향해 동쪽으로 나아간다.

이때 외롭게 떨구어진 월출산, 두륜산, 달마산은 스스로 땅 끝 기맥을 만들고 바다로 잦아들면서 해남 땅을 풍요롭게 한다.

두륜산은 빼어나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산이다.

월출산과 달마산에 비하면 산을 오르는 묘미도 아기자기한 멋도 덜하지만, 끈을 질끈 동여맨 자루같이 생긴 모습 안에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분연히 일어난 호국불교의 기상이 서려 있고, 지형상 바다와 접해 있어 붉가시나무, 굴거리나무, 후박나무, 황칠나무, 동백나무 같은 늘푸른나무들과 대흥란 같은 희귀식물들을 만날 수 있는 신비한 산이다.

도로 대신 오솔길을 택하라 매표소를 지나면 반듯한 포장도로가 어서 오라는 듯 유혹하지만 다리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을 걷지 않고서는 두륜산을 다녀왔다고 말할 수 없다.

고요한 숲길에는 물텅거리골과 금강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쉼없이 재잘거리고 언제라도 순교의 자세가 되어 있다는 듯 동백꽃 꽃망울이 터질 듯 말 듯 지나는 나그네의 가슴 설레게 하는 이 길은 2km 남짓 이어지는 장춘리 계곡길이다.

봄이 유난히 길어 장춘(長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겨울인 듯 봄인 듯 눈가루 흩날리는 대한(大寒)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이 선혈 같은 동백꽃이 피는 곳이다.

산책로 길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면 조릿대 숲 사이로 커다란 갈참나무가 누가 이 길을 지나갔는지 기록하듯 내려다본다.

오솔길에는 버드나무와 서어나무, 느티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층층나무 같은 큰키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당단풍, 동백, 산벚, 자귀나무가 그 뒤를 이어 키 경쟁을 한다.

길옆에 심은 상사화는 엄동설한에도 푸른 잎을 자랑하고 있다.

개울가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길의 세월을 대변하듯 이리저리 휘었고 건너편에는 편백림이 검다.

동백 숲 사이에는 간간이 굴피나무와 새우나무가 자라고 돌 틈에는 소사나무도 나타난다.

계곡은 큰길 옆으로 가까웠다 멀어지고 갑자기 하얀 로프에 통나무를 엮어 만든 출렁다리가 길을 막는다.

삭기는 했으나 떨어질 염려는 없는 듯하여 힘있게 건너니 다리가 좌우로 출렁거린다.

다리를 건너면 삼나무 숲이 나타나고 이어 두 번째 다리를 건너 편백림을 지나면 넓은 개활지가 나타난다.

이곳을 주의 깊게 보면 개울가에 가지를 쭉쭉 뻗은 어린나무들이 모여 있다.

겨울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참 재미있게도 생겼다.

마치 족두리를 쓴 여인과 같다.

다소곳한 눈, 동그란 얼굴은 잎 떨어진 자국으로, 눈과 코는 잎과 가지를 연결하였던 관다발 흔적이다.

머귀나무는 어린 가지에 가시가 듬성듬성 달리고 황벽나무, 산초나무와 같이 운향과이다.

키가 15m 정도 자라는 낙엽 지는 큰키나무로 울릉도와 남쪽 해안가에서 주로 자란다.

개활지가 끝나면 산책로도 끝나고 차가 다니는 길로 들어선다.

길 양옆에는 느티나무, 팽나무 같은 거목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너른 주차장과 매점을 지나면 동백나무 숲이다.

동백꽃은 가지에 붙어 있을 때보다 툭 떨어진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꽃잎 하나 상하지 않고 미련 없이 떨어져 한점 후회도 없다는 듯 땅 위를 구르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십여년 전 이맘때 촬영을 온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마침 눈이 내렸다.

눈을 보기 어려운 동네에 어인 일인지 하얀 눈 위에 동백꽃이 후드득 떨어진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오죽하면 일행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마치 기관총 소리처럼 들렸을까.동백 숲이 끝날 즈음 찻집을 지나면 앞에 커다란 한옥이 보인다.

모르는 이들은 그냥 절집이려니 지나칠 수도 있겠으나 나그네를 위한 여관이다.

하룻밤 잠을 청하니 원앙금침에 따뜻한 온돌방이 나그네의 피로를 씻어준다.

창호지 문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두륜산의 밤은 깊어만 간다.

두륜산에는 고찰 대둔사와 표충사가 있다.

대둔사는 절이 크게 흥했다 하여 ‘대흥사’로 불리기도 하고 서산대사 이후 제13대 종사인 초의선사가 주석하며 다도를 중흥시킨 역사 깊은 곳이기도 하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아 한양 수복에 공을 세운 서산대사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대흥사와 대둔사의 희귀식물들 이른 아침, 유선관을 나와 피안교를 건너니 매점 앞 덩굴시렁에 덩굴식물인 멀꿀이 푸르름을 간직한 채 오가는 이를 반긴다.

멀꿀은 으름덩굴과의 늘푸른 덩굴나무로 암꽃과 수꽃이 한 나무에 달린다.

암꽃은 3개의 암술이 있고, 수꽃은 6개의 수술로 5월에 핀다.

열매는 10월에 익으며 바나나처럼 미끈거리고 으름보다 맛이 좋다.

이어 왕벚나무 자생지라는 팻말이 보인다.

왕벚나무는 천연기념물 173호이며 산벚나무와 올벚나무의 중간형으로, 일본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나무의 자생지가 일본에는 없고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에 의의가 크다 일주문을 지나면 소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13대 종사와 13대 강사의 부도가 밭을 이룬다.

대둔사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부도밭 앞쪽에는 조그만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앞의 부도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이렇게 쓰여 있다.

“꽃과 나무를 꺾지 맙시다.

” 제작 연대가 음각돼 있으나 마모가 심해 알 수 없음은, 오래전 우리 조상들의 자연 사랑이 극진했음을 알 수 있다.

비석 옆에는 큰 나무가 서 있는데, 나무껍질은 수직으로 갈라져 너덜너덜하고 망원경으로 가지 끝을 보니 수꽃이 달려 있다.

겨울에 수꽃이 나와 있으니, 자작나뭇과의 나무임에 틀림없다.

낙엽과 어린 가지, 씨앗을 싸고 있던 포엽을 조사한 결과 새우나무이다.

새우 하면 작고 구부러진 느낌이 들건만, 이 새우나무는 곧고 크게 자라 이름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 해안 지방의 산골짜기에서만 볼 수 있는 나무다.

부도밭을 지나 반야교를 건너면 대둔사 가는 길이다.

다리를 건너 100여m를 가면 두륜봉과 가련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시야가 확 트인다.

대웅전을 둘러본 뒤 표충사 가는 길 한쪽에 있는 연못은 어느 장인의 솜씨인지 돌을 쌓은 매무새가 범상치 않다.

연못 주위에는 느티나무, 소나무, 붉가시나무, 실화백, 동백나무, 편백나무, 비자나무, 단풍나무, 삼나무, 팽나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잘 다듬어진 꽝꽝나무와 옥향이 단정하다.

다만 흠이라면 솟아오르는 분수를 설치하여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한겨울에 물이 얼지 못하고 위로 솟구치고 있으니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천상에서 쫓겨난 천년수 표충사에서 왼쪽으로 휘어져 오르는 길이 산행 들머리이다.

오른쪽으로 꼬부라지는 길에는 대숲(솜대)이 있고 그 안에 외로이 황칠나무가 자라고 있다.

오르는 길 오른쪽에는 사람의 출입을 막으려고 철조망을 쳐놓았다.

말뚝을 박아 설치한 것이 아니라 나무에 묶어놓았기 때문에 철사가 나무의 살을 파고들었다.

끈이면 풀어주기라도 할 텐데 그저 지나칠 수밖에 없어 가슴 아프다.

나무도 살아 있는 생명이고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생존의 권리가 있을 터, 숲을 보호한답시고 나무에 철사를 묶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이곳에서 만일재까지는 유혹이 많은 길이다.

조금 오르다 보면 북미륵암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요, 십여분 더 오르면 일지암 가는 삼거리다.

북미륵암과 일지암도 놓치기에는 아까운 곳이지만 자연을 두루 관찰하며 가노라면 시간이 배로 들기에 되도록이면 짧은 코스를 택해야 한다.

미륵암 갈림길에서 일지암으로 가는 길은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고 길옆에는 덜꿩나무·병꽃나무·말오줌때·새비나무 같은 작은키 나무들이 자라고, 숲 속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들이 눈에 띈다.

가파른 길 양쪽에는 머귀나무와 이나무가 잎을 떨구고 굴거리나무도 덩달아 잎을 축 늘어뜨리고 있다.

일지암 삼거리에는 굴참나무에 겨우살이가 군데군데 붙어 있다.

이곳부터는 너덜지대이다.

너덜이라고는 하지만 모서리가 둥글둥글한 큰 바위 덩어리로 되어 있어 걷기에도 편하고 바위틈 사이로 동백나무들이 쑥쑥 자라올라 시원스럽다.

만일재 삼거리에 이르면 왼쪽 북미륵암 방향으로 20∼30m 지점에 하늘을 찌를 듯 커다란 느티나무가 떡 버티고 서 있다.

1천년을 살아서일까 이름도 천년수이다.

천년수에는 전설이 있다.

옛날 옛적에 옥황상제가 사는 천상에 천동과 천녀가 살았는데, 이들은 어느 날 천상의 계율을 어겨 하늘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이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하루 만에 바위에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이들은 궁리 끝에 천년수에 해를 붙들어 매놓고 조각을 했다고 한다.

그때 완성한 불상이 북미륵암이며, 이는 1천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천년수를 바라보면 모든 나무의 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굵고 강직한 줄기에 담대한 가지뻗음, 푸른 하늘을 가르는 잔가지들의 부드러움이 보는 이의 가슴을 압도하고 그저 바라보게만 한다.

천년수 위에는 만일암터로 오르는 대숲터널이 있다.

이 대숲은 ‘이대’라고 하는 작은 대나무이며 절터 주변에만 있는 것으로 보아 누가 심은 듯하다.

5층 석탑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폐사지에 서니 재빼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춤추는 대숲만이 나그네의 넋을 빼앗는다.

다시 되짚어오르면 가련봉과 두륜봉 사이의 잘록한 허리 부분이 만일재다.

갑자기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섬들이 눈에 들어오고 앙상한 억새들이 산 밑을 치닫는다.

이곳에서 보는 두륜봉의 모습은 거대한 배와도 같다.

이제 막 건조된 배가 진수식을 마치고 바다로 들어가려는 듯 둔중한 선체를 밀어넣으려 바다를 향해 기울어 있는 형국이다.

두륜봉 오르는 길은 활엽수 전시장 이곳에서 두륜봉 오르는 길은 두륜봉의 동쪽 사면인 단애 밑을 돌아 오르는 오솔길이다.

오솔길은 북서쪽이 가로막혀 안온하고 따뜻하여 작은 활엽수 전시장 같다.

야광나무·소사나무·떼죽나무·쇠물푸레·윤노리나무·폭나무 같은 나무들이 옹기종기 바위틈에 모여 정겹게 자라고 구름다리에 이르면 사방이 확 트인 두륜봉이다.

동으로는 고금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남으로는 완도의 상황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날이 좋으면 한라산도 보인다고 하나 일년에 몇 번이나 보일는지 아련하기만 하다.

서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급한 너덜지대라 조심해야 한다.

너덜 초입에는 완도대교가 보이고 앞에 큰 뾰족탑을 이고 있는 산이 대둔산이다.

내려갈수록 소사나무가 서어나무로 바뀌고 너덜지대가 끝나며 이어지는 계곡에는 붉가시나무와 동백나무가 하늘을 덮는다.

희끗희끗한 잔설만 없다면 여름 숲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짙은 상록수림을 통과하면 진불암이다.

이곳에서 300여m 내려가다 오른쪽 오솔길로 들어서야 물텅거리골이다.

부도밭까지 이어지는 길은 푹신푹신한 오솔길이어서 산행을 마무리하는 데 더없이 좋다.

두륜산을 찾는 사람들을 계절별로 나누어보면 봄, 여름, 가을 순으로 많다고 한다.

하지만 겨울에 이곳을 찾은 이유는 대둔8경인 봄추위의 설화(春冬雪花)나 두륜봉 구름다리의 상쾌한 바람(雲橋淸風)을 맛보기 위함도 있지만 그 중 으뜸은 사색하며 나무들을 만날 수 있는 호젓함 때문이리라.▣ 사진 · 글 우종영/ 야생화 사진 작가 · 나무 전문가
반론ㆍ정정ㆍ추후 보도를 청구하실 분은 이메일(budgate@daum.net)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불교포커스'에서 생산한 저작물은 누구나 복사할 수 있으며, '정보공유라이센스 2.0: 영리금지 개작금지'에 따릅니다. 정보공유라이센스

불교정보센터의 다른기사 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