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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고려·조선이 함께 살아 있는 절, 통도사내년 섣달 그믐날에도 통도사에 가겠다
우리나라에서 절간만큼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것도 드물다.

삼국시대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로 불교는 우리 생활과 문화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불교가 조선전기 억불 정책으로 잠시 위축된 적도 있지만, 중기 이후에 실질적인 민족 종교의 자리를 회복하였다.

이런 이유로 오래되고 유명한 절간들은 여러 시대의 문화재를 많이 지니고 있다.

이런 절간 중에서 경남 양산시에 있는 통도사를 빼놓을 수 없다.

통도사 불이문에서 내부를 들여다보면 건물들의 조합이 멋있다.

마치 액자에 건물들을 잘 맞춰 넣은 것 같다.

조금 멀리 있는 적멸보궁의 지붕이 조금 오른쪽으로 기울어 보인다.

그것을 앞에 크게 보이는 관음전 지붕이 받아서 원위치로 돌리고 있다.

적멸보궁과 관음전의 지붕선은 저 멀리 보이는 영취산의 선과 멋들어지게 어울린다.

관음전 옆 개산조당 앞에 서 있는 5층 석탑도 적멸보궁의 지붕선을 살짝 넘기고 있다.

모두가 결코 서로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고 있다.

통도사 적멸보궁은 T자 모양으로 생긴 지붕을 가지고 있다.

남쪽 면에는 금강계단, 동쪽 면에는 적멸보궁, 서쪽면에는 대웅전이라는 편액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1983년에 펴낸 ‘국보’책 사진에는 대웅전과 적멸보궁의 편액이 뒤바뀌어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이에 지금처럼 바꾼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적멸보궁, 금강계단, 대웅전은 부처가 계신 집이라는 뜻으로 비슷한 말이다.

그래서 3면에 '여기에 부처님이 계시도다’라는 뜻으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통도사는 삼국통일 전 신라 선덕여왕 때(643년, 646년 두 주장이 있음) 자장 율사가 세우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안치했다고 한다.

적멸보궁 바로 앞에 남향하고 있는 개산조당은 바로 개산조사 자장율사를 기리는 건물이다.

이때 진신사리는 적멸보궁 북쪽 사리탑 안에 안치했다고 한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집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부처의 진리가 금강처럼 단단하고 빛나니 진짜 부처가 계신 곳은 빛나는 진리의 세상 금강계단이 된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위대한 영웅에 비유하고 있으니 그가 계신 집이 바로 대웅전이 되는 것이다.

한 지붕 아래 세 집이지만, 사실은 석가모니 부처의 집이란 뜻이다.

통도사는 영취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개울의 북쪽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비룡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형세란다.

건물 역시 개울을 따라 동서로 길게 늘어서 있다.

그러나 건물의 방향은 동서와 남북이 서로 교차해가면서 늘어서 있다.

지세에 따라 절집의 방향을 서로 엇갈리게 만드는 산에 지은 절간과 같다.

통도사는 3개 영역으로 구분된다.

한 개 영역이 좀 크다고 하는 절간 규모 정도 된다.

규모면에서 통도사는 보통 절간의 3배에 해당한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까지는 절간 입구 영역이다.

천왕문에서 일주문까지는 하로전, 일주문에서 적멸보궁 직전까지를 중로전, 적멸보궁 영역을 상로전이라 한다.

상로전에는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삼성각, 산령각과 같은 전각이 자신의 방향을 지니고 전개되고 있다.

아마도 신라시대 창건 당시에는 이 영역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대웅전이 핵심이다.

이 건물은 남향의 건물이지만, 동서로 지붕을 끌어내어 박공 부분으로 정면 얼굴을 만들었다.

남쪽은 금강계단, 동쪽은 적멸보궁, 서쪽은 대웅전이라 이름 붙였다.

지붕은 셋방향이지만, 내부는 남북으로 긴 네모꼴이다.

건물 내부 북쪽에는 화려한 불단만 있고 불상은 없다.

대신 창 너머에 있는 사리탑을 볼 수 있게 창을 내었다.

실상인 진신사리가 있으니 허상에 해당하는 불상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목조건물은 임진왜란 뒤 17세기 전반에 세웠다.

그러나 석조 기단은 창건 당시에 만든 것이란다.

적멸보궁과 금강계단 쪽 기단은 적당한 높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 단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새겨 넣었다.

다양하고 예쁘기 짝이 없는 꽃들이 기단을 수놓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최고의 기단이다.

통도사 대웅전 기단 꽃구경만 하고 가도 적어도 1개월은 싱글벙글거리며 살 수 있을 게다.

북쪽에 있는 석조 사리탑이 있는 금강계단이 크게 정비된 것은 고려초기였다.

불탑은 인도에서 처음 만들었을 때와 같은 석종 모양으로 만들어 진신사리를 모셨다.

일반적인 복련과 앙련으로 구성된 단 위에 석종형 부도(부도는 탑이란 말과 어원이 같다)를 세웠던 것이다.

통도사에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대부분 석조 축조물이 많다.

관음전 옆의 5층석탑, 용화전 앞에 있는 봉발탑과 여러 곳에 세워져 있는 석등은 대부분 고려 때 만든 것이다.

대웅전(적멸보궁)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조선 인조 때(1641) 다시 세웠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패한 직후, 정치적으로 청나라 간섭을 심하게 받고 있을 때 이런 건물들을 세웠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임란 때 경복궁이 불타버려 재건 못하고 있을 때 지방에서는 거대한 절간들이 줄지어 축조되었다.

국왕만 돈이 없었다.

지주인 양반들이 실질적으로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어쨌거나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다포식 T자형 팔작지붕 건물로 온갖 멋을 다 부려 축조했다.

화려한 꽃 기단을 살리고 그 위에 꽃 같은 거대한 건물을 세운 것이다.

지붕 위 기와위에도 일렬로 조그마한 백자항아리를 올려 멋을 부렸다.

공포는 내3출목 내4출목으로 공포를 이용하여 화려하게 내부를 장식했다.

천정도 최고의 꽃천정으로 단장했다.

굵직한 기둥과 대들보 도리가 공간을 적당히 나누고, 그 위 아래로 공포와 꽃천정이 극락의 아름다운 세상을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북쪽의 불상 없는 불단 역시 웅장하면서도 화려하다.

17세기 조선 중기 양반 지주들의 분위기가 이렇게 살아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18세기 상인들의 문화 감각과는 또 다른 중후함이 느껴지는 화려함이라 하겠다.

상로전 영역에 있는 명부전과 나한전은 서로 마주보며 금강계단과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고, 일로향각이 금강계단과 마주보고 있다.

이들 건물로 둘러싸인 마당은 건물의 높이에 비례하여 알맞은 공간을 만들고 있다.

너무 크면 허탈해지고, 너무 작으면 답답하게 느껴지는데, 이 공간 감각이 그냥 우리들 공간 감각인가 보다.

적당한 넓이를 알고 싶으면 통도사 마당을 살필 일이다.

중로전은 아마도 고려시대에 크게 사원이 확장되면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불이문을 통과하면 관음전이 막아서지만, 대웅전으로 가는 길은 시원스레 트여 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관음전이 오른쪽을 차지하고 있고, 그 뒤로 극락전, 그 뒤로 대광명전이 자리 잡고 있다.

목조 건물은 모두 조선시대 세운 것이지만, 용화전 앞의 봉발탑은 고려전기에 축조된 것이다.

지난 섣달 그믐날(양력 2월 8일) 통도사를 찾았다.

조금 더 들어가면 3개의 문 모양을 갖춘 개산조당이 있고, 해장보각 그 뒤로 장경각이 남북을 축으로 나열하고 있다.

중로전은 동서의 중심축과 남북으로 나열하고 있는 두 건물군이 직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다.

두 축의 건물들이 적당한 마당 공간을 차지하면서 복잡하거나 답답하지 않게 자리 잡고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어디서 보건 아름다운 건물들이 즐비하고 그것이 주변 지형과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용화전 앞의 봉발탑은 좁은 공간에 세운 탓인지 아니면 탑의 기능상 그런 형태를 취했는지는 모르지만, 둥근 머리에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모습을 띠고 있다.

그 좁은 공간에 끝이 뾰족한 탑이 있었더라면 공간이 조금은 아파했을 것 같다.

하로전은 천왕문부터 불이문까지 영역이다.

천왕문을 지나면 범종각과 극락전이 가로막아 시각이 크게 축소되는데, 저 멀리 불이문이 보인다.

조금 더 들어가면 갑자기 시야가 확 넓어지면서 온갖 전각들이 자신의 얼굴을 내밀고 있다.

왼쪽으로는 냇가 쪽을 가로막은 만세루가 북향하고 있고, 오른쪽엔 영산전이 남쪽을 보고 있다.

영산전 남북쪽에 약사전이 얌전히 자리 잡고 있다.

만세루와 영산전 중간 지점이 하로전의 중앙이고 이곳에서 통도사의 모든 건물이 방사선으로 나열되면서 눈에 들어온다.

이 절간에 왔으면 어디를 갈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바로 여기서 결정해야 한다.

하로전의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 후에 대웅전 건물과 함께 축조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뒤에 세운 것도 많다.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 위치에 따른 문을 조성한 것도 이 시기 일이다.

이젠 전체적으로 다시 살펴보자. 통도사는 냇가 쪽 즉 남쪽은 건물로 막아 거의 폐쇄하고 있다.

북쪽 역시 금강계단과 대광명전 등의 핵심 건물로 막았다.

그 중간 동서로 길게 뻗은 공간에 온갖 건물들을 축조했다.

평지에 동서와 남북으로 축이 직각으로 교차하는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건물끼리 서로에게 부담주지 않은 조화를 이뤄내어 편안한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조금 복잡한 듯하나 이들이 만드는 공간은 매우 세련되었다.

천왕문을 들어서서 내부로 들어가면서 오른쪽의 영산전과 약사전을 살핀다.

불이문을 지나면 저 멀리 대웅전이 보인다.

오른쪽에 펼쳐지는 미륵의 세상 용화전, 법신부처님이 계신 대광명전을 만난다.

곧 관세음보살님의 자비행 보살이 계신 관음전에 닿는다.

중심 길은 대웅전으로 나아가지만, 극락 세상을 만들어가는 많은 부처님과 보살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또한 여기저기 열려 있다.

전면에 적멸보궁을 보면 왼쪽 공간이 열려있고, 그 공간은 자연스럽게 금강계단으로 이어진다.

금강계단 건물의 열려있는 모습으로 찾아간 사람들을 대웅전 속으로 인도한다.

통도사의 온갖 건물과 마당과 공간은 결국 금강계단 부처님 진신사리 있는 불단 앞으로 이어져 승화되어가고 만다.

통도사는 목조 건물들은 대부분 17세기 중엽 이후 조선시대에 세웠다.

대부분 다포식 건물이며 중후한 화려함을 지니고 있다.

17세기 지방 양반 지주들의 형식미와 화려한 이상세계 추구 경향이 반영되고 있다.

통도사는 언제 가야 제일 좋을까? 지난 섣달 그믐날 오후 5시경 양산 통도사를 들렀을 때, 가랑비가 아주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2월 초의 조금 싸늘한 날씨와 맑으면서 어둠살이 퍼지고 있는 통도사는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수많은 건물들이 서로에게 존재하여서 부담주지 않고 오히려 의지하고 있는 모습, 격에 맞춰 적당한 크기와 넓이를 지니고 있는 모습은 그냥 환상이었다.

통도사는 언제가도 좋다.

누가 우리 문화를 서양 문화에 비교해서 멋없다고 하는가. 그 사람은 아직 통도사를 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누가 우리 건축은 삽시간에 짓고 만다고 말하는가. 그 사람은 아직 통도사가 천년을 경과하면서 우리 민족의 편안하고 친환경적 문화의 진수가 모여 생긴 절간임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통도사에서 우리는 신라를 만날 수 있다.

기단의 연꽃은 신라 사람들의 숨결이 숨어 있다.

통도사에서 우리는 고려를 만날 수도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있는 불탑(부도)과 주변에 서 있는 석탑, 봉발탑에는 부처님을 정성스레 모셨던 고려 사람들의 정성이 담겨 있다.

통도사에서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은 역시 조선이다.

목조건물들의 건실하고 웅장하고 근엄하면서도 격조 높은 화려한 특성에는 17세기 조선 양반들의 품격이 담겨있다.

사실 통도사에서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은 현재다.

그냥 서로 어울리는 건물을 보고, 대웅전 기단 꽃을 보고, 편안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본받고 보살을 본받아 함께 어울려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통도사를 찾고 절간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년 섣달 그믐날에도 통도사에 갈 거다.

/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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