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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 기일 맞아 부석사 화엄대제양백지간에서 꽃핀 화엄세계
무량수전 앞뜰에서 ‘법계도’ 재현 … “모든 사물은 하나로 융합”
2005-04-08 오전 9:11:50 게재 “法性圓融無二相 법과 성품은 원융하여 두가지 모양이 없나니/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이 움직임이 없어 본래부터 고요하다/ 無名無相絶一切 이름없고 모양도 없어서 온갖 경계가 끊겼으니/ 證智所知非餘境 깨달은 지혜로만 알 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의상대사가 지은 ‘화엄일승 법계도’(위 사진)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4월7일 의상대사(625~702) 기일을 맞아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대제’가 봉행됐다.

화엄대제는 의상대사의 영정이 봉안돼 있는 부석사에서 매년 열린다.

행사는 부석사 조실 근일 큰스님의 설법을 듣는 ‘무량수전 법회’와 의상대사의 영정이 봉안된 조사당에서의 차례, 무량수전 앞뜰과 장경각을 잇는 ‘화엄경판 법계도 재현’ 행렬로 이어졌다.

화엄대제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법계도’ 재현 장면이다.

500여 신도들이 장격각에 보관된 화엄경판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안양루 누각 밑을 통과, 무량수전 앞마당으로 올라와 표시된 법계도 도판대로 석등 주변을 가득 메운다.

법계도가 완성되면 화엄경판은 스님들의 인도 아래 다시 장경각으로 내려가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행사에 쓰이는 각판은 13~14세기에 제작된 목판들이다.

2시간 여 동안 신도들의 머리 위에서 경내를 돈 경판들은 햇빛을 받아 습기도 제거되고 충해도 막을 수 있게 된다는 게 부석사 스님들의 전언이다.

◆진리는 결코 불타지 않는다 = 의상대사가 법계도를 작성한 경위에 대해 최치원 선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의상이 지엄법사에게서 화엄을 수학하고 있을 때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스스로 깨달은 바를 저술해서 남에게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일러주었다.

이에 분발하여 붓을 들고 ‘대승장’ 10권을 편집해서 스승에게 그 허물을 지적해 주기를 청하였다.

지엄 스님이 말하기를, ‘의리는 매우 아름다우나 문사(文詞)가 옹색하다’고 하였다.

물러나 번거로운 곳을 삭제하고 다시 정리했다.

지엄이 의상과 함께 불전에 나아가 서원을 세우고 이를 불태우면서 말하기를, “문사(文詞)가 성지(聖旨)에 맞는다면 원컨대 타지 마소서”라고 했다.

타고 남은 210자(字)를 의상으로 하여금 주워 거두게 하여 간절히 서원하면서 다시 불꽃 속에 던져 넣었으나 끝내 타지 않았다.

지엄 스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찬탄하고, 의상으로 하여금 타고 남은 글로 게송(偈頌)을 짓게 …◆ 삼국통일기에 당나라 유학한 의상 = 의상은 명실상부한 지엄의 수제자였다.

그는 중국 화엄학의 3대조로 일컬어지는 법장 ― 측천무후를 도와 당나라의 이념체계를 세운 승려 ― 의 선배였으며 38세에서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 8년 동안 지엄으로부터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배웠다.

그 사이 삼국이 통일되고(668) 당과 통일신라의 7년 전쟁이 예고되고 있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직전, 의상은 서둘러 신라로 돌아온다.

영주 부석사는 676년 의상이 창건한 절이다.

의상은 귀국 후 양양 낙산사를 비롯, 전국의 산천을 두루 거쳐 이곳 부석사로 온다.

◆안동지방에만 있는 중국식 전탑 = 당시 신라의 기득권들은 의상의 서라벌 입성을 반대했다.

그러자 의상은 영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백두대간 아래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 이를 ‘양백지간’이라 한다 - 산기슭에 ‘해동화엄종찰’ 부석사를 창건했다.

결국 그는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화엄사상의 새로운 문화지대를 만들어 경주로 입성하게 된다.

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안동지방에만 집중적으로 세워진 중국식 전탑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

/부석사 = 글·사진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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