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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평화사상-불교의 평화사상은 수행과 실천의 사상이다

영어 ‘피스’(peace)의 어원은 히브리 사람들의 사상에서 말하는 샬롬(Shalom)과 로마 사람들의 사상에서 말하는 팍스(Pax)에서 왔다. 샬롬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리는 은총을 의미하고, 팍스는 peace, 즉 힘으로 얻는 평화를 뜻한다. 바이블에서 ‘평화’란 재산상으로 걱정할 것이 없고 건강한 상태, 또는 화목하고 전쟁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평화를 뜻하는 ‘이슬람’은 알라(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알-쌀람에서 유래한다. 이슬람 경전 코란에서 평화는 유일신 알라를 믿어야 얻을 수 있는 보호와 알-쌀람이라 일컫는 가르침과 질서를 지켜야 얻을 수 있는 평온함을 말한다.

노자는 군사를 “상서롭지 못한 수단”으로 보며, 승리해도 찬양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승리를 찬양하는 것은 살인을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국 고대 군사학인 <손자병법>조차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선의 길이라 했다. 불교에서는 불살생(不殺生)을 첫째 계로 삼고, 수행자는 극단적 폭력과 전쟁 앞에서도 비폭력 평화사상을 실천하게 한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평화를 옹호하고 있는데, 평화(Shalom)와 도시(Ir)를 합한 말인 예루살렘은 오늘날 중동전쟁의 진원지가 되고 있고, 한반도는 북핵ㆍ미사일 문제로 긴장이 높아지고 있으니 묘한 일이다.

좁은 뜻에서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이다. 왜 전쟁이 일어나며, 어떻게 전쟁을 없애느냐고 질문을 던지면, 평화 문제는 인간의 내적 욕망에서 사회ㆍ역사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한 일이 된다. 불교에서 니르바나(Nirvana:열반)는 욕망을 제어하고 사회적 관계에서 갈등을 벗어나서 최고의 평온ㆍ평화에 도달했음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내면만이 아니라, 존재의 안과 밖, 나와 남, 그 밖의 모든 경계를 나눔 없이 불화(不和)를 떠남을 뜻한다.

그런데 신(神)과 힘을 통해서 평화를 구할 경우, 유일신과 대립되거나 굴복시켜야 할 상대와 대립하는 권력 관계가 만들어진다. 거기서 경쟁과 갈등을 피하기 어렵고 심하면 전쟁을 할 소지가 생긴다. 불가(佛家)에서는 그와 다른 각도에서 평화에 접근하는데, 노자보다 단호하게 전쟁과 단절한다.

어떤 전쟁도 정당하지 않으며, 전쟁 영웅도 없다

부처님은 말년에 코살라국의 비두다바왕이 자신의 종족인 석가족을 멸망시킬 때에도 무력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비두다바왕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의 마른 고목 아래서 그들을 기다렸다. 왜 하필 그늘도 없는 그곳에 앉아 계시는지 비두다바가 다가가서 물었다. 부처님은 마른 고목의 그늘처럼 되어버리는 것이 바로 친족이 멸하는 것이라 비유하자, 왕은 군대를 물리고 돌아갔다.

결국에는 비두다바왕이 부처님의 ‘평화원칙’을 무시하고 석가족을 멸망시켰지만, 부처님은 이에 대항하지 않았다. 원한과 보복전쟁을 멈추고, 오직 평화와 진리의 길로 갔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전법의 길을 떠나는 뿐나의 대화에도 오로지 비폭력으로 나아가는 태도를 견지했다. 사납기로 이름난 사람들을 만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칼로 목숨을 빼앗으려 해도 전법자는 화를 내거나 저항하지 않아야 한다. 금강경에서, 토막살해를 당해도 일체의 상(相)을 떠남으로써 깊은 원한의 고리를 끊도록 했다.

그러니 부처님은 어떤 경우의 전쟁도 정당할 수 없음을 일깨워준다. 전사(戰士)라는 경에, 전사가 전력을 다해서 싸우다 적의 손에 죽으면 그 뒤에 ‘환희하는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믿는 전사마을의 촌장이 부처님 생각은 어떠한지 묻는다.

부처님이 그런 질문을 두 번이나 회피했지만, 촌장은 또다시 간절하게 물었다. 그때 부처님은, 전쟁터에서 전사가 적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죽여 없애야 한다는 저열하고 사악한 마음을 먹기 마련이고, 그러므로 싸우다 죽은 뒤에는 ‘환희라는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다. 촌장은,  ‘환희하는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잘못된 견해를 믿는 사람에게는 지옥이나 축생의 길이 있다는 말씀에 진리의 눈을 얻었다. 병사의 훈장도 전쟁 영웅도 애초에 무의미함을 안 것이다.  

지금 세계는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보복과 원한은 더욱 커지고 있다. 싸움과 전쟁이 반복되는 인간역사를 바꾸기 위해서는 오직 평화주의만이 해결의 길이 됨을 부처님은 가르쳤다. 동시에 그 길은 인간의 내적 욕망에 이르기까지 근본원인을 살피는 온전한 지혜, 깨달음을 통해 가능함을 전법했다. 이처럼 평화는 욕망을 제어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수행과 실천으로써 구현된다. 

불교의 평화사상은 수행과 실천의 사상이다

몇 년 전, 프놈펜 근처에 있는 처웅엑에서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20세기 식민지 역사 중의 하나, 캄보디아에 안긴 고통의 후과는 참으로 참담했다. 킬링필드, 채 덮지도 않은 구덩이… 수습되지 않은 죽음의 잔해 속에 더러는 들꽃이 피고, 그 언저리에서 원한을 묻지 않는 아이는 구걸을 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화 탐욕이 한반도도 삼켰고, 그 모순의 윤회가 계속되어, 아직도 우리는 휴전상태의 분단 아래 어정쩡한 가짜 평화 상태에 놓여있다. 인간의 생명을 군대와 무기로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는 전쟁의 역사를 멈출 수 없다. 그런데 열강들은 인도주의 개입이란 이름으로 ‘정당한 전쟁’을 주장한다. 이라크, 이란, 한반도가 이런 문제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1994년, 유엔은 인간안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비군사적 영역을 포괄하여 개인의 생명을 지키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그것은 개인의 안보를 국가안보보다 우선시하여 인간의 평화를 해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안보위협의 요인으로 본다. 경제안보, 식량안보, 보건안보, 개인안보, 환경안보, 공동체안보, 정치안보 등 인간의 생명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영역들을 ‘포괄하여’ 대처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포괄적 생명권’이라는 인간 본연의 문제이며, 가장 불교적인 문제의식에 들어간다. 살인마 앙굴리말라에게 부처님이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고 말했던 바, 이것은 “나는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폭력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존재에 대하여 자제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는 멈추었는데 그대는 멈추지 않는 이유이다”는 뜻이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욕망을 제어하고 폭력이 없는 평등관계에서 인간다운 삶, 평화가 주어짐을 분명히 알린 것이다.

平和는 공평함과 바름, 화합으로 이뤄진다. 평화의 바탕에는 곡식 화(禾), 즉 경제적 문제가 가장 크다. 유마경에서 먹는 것이 평등할 때 진정한 평등이 이뤄짐을 말했듯이, 승가공동체는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신을 항상 실천했다. 북한의 경제적 위기와 맞물린 한반도 평화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그런 사상 속에 정확하게 담겨있다.

2006.9.25./이 글은 <조계사보> 2006년 10월호에 기고한 글을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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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훌라 2006-10-04 11:51:55

    노귀남선생의 글은 참 깔끔하다. 어려운 주제를 불자의 시각으로 이야기하는 관점이 너무도 명료하다. 이런 글들이 많이 발굴되어 불자들의 생각을 공유하는 소재가 됐으면 한다. 노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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