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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 필 때 올콩 심다

종종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철학교수 윤구병 박사가 이태째 농사를 지어보다가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온전한 농사꾼이 되고자 했다.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콩을 언제 심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할머니, 콩은 언제 심어요?”
물으면서 마음속으로 틀림없이 몇 월 며칠에 심는다는 대답을 해주실 줄로 믿고 달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할머니 대답이 뜻밖이었다.
“으응, 올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꽃이 질 때 심는 거여.” (윤구병, <잡초는 없다> 19쪽)

   
나는 단박에 할머니가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한다고 생각했다. 헐한 경험에 머물러 “과학 영농”과는 거리가 멀다고… 아주 짧은 순간에 나는 머리를 그렇게 굴렸다. 그런데 윤구병 선생은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났다고 했다. 책을 보고 날짜를 따져서 씨앗을 뿌리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달았다는 말이다. 우둔하게도 나는 윤 선생의 깨달음을 “헤아려서” 알았다. 말 떨어지자마자 바로 몸으로 답하는, 삶이 녹아든 지혜와 비교할 때, 책상물림 지식인의 판단력을 어떻게 믿겠는가?
북한연구자로서 내 고민은 현실 속으로 어떻게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관념적 지식이 아니라, ‘감꽃 필 때 올콩 심듯이’ 생태계의 생리를 체득한 농사꾼 같이, 나는 현실에 기초하여 문제를 풀어나갈 길을 만들고 있는가?

국경과 변경의 인식 차이

분단으로 인해 우리는 변경을 제대로 체험해 보지 못했다. 휴전선으로 잘린 “섬” 생활에 익숙해 근대적 의미의 국경을 이해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기회가 늘어난 해외여행으로, 또한 무비자로 더 쉽게 해외로 떠나는 경우를 통해 우리는 무수히 ‘국경’을 넘나들고 있지만, 그것이 변경체험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의식 깊숙이 ‘섬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는 한반도의 미래를 인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숨겨져 있다. 새로운 변경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세계화의 길과 ‘단절’되고 소외된 의식을 털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미래의 변경지대를 꿈꾼다면, 두만강과 압록강접경지역을 ‘가상체험’이라도 하면서 한반도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11월, 나는 세 번째로 이 지역을 둘러보았다. 2000년 7월에는 구경꾼처럼, 2006년 2월에는 뭔가 모를 갈증을 느끼며 보았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사람과 만남을 이뤄냈다.

   
도문에 갔던 날, 겨울답지 않게 춥지 않던 날씨가 눈비가 내리고 갑자기 꽁꽁 얼어붙는 듯했다. 그때 따뜻한 차 한 잔은 마음까지 녹이는 열이 되어주었다. 작은 것이지만 필요에 따른 가치는 그만큼 컸다. 단동, 훈춘, 도문 등 변경지역을 넘나드는 평범한 서민들의 보따리에 담긴 작은 소망들처럼 말이다.

조-중 변경을 다리로 잇는 지역을 교두(橋頭)라고 하며, 세관업무를 보는 곳을 해관(海關)이라고 한다. 도문처럼 작은 해관은 대개 여권이 아니라 출입경통행증으로 드나든다. 한 할머니는 1개월짜리 통행증으로 내몽고까지 다녀왔다. 연길에서 먼 인척의 도움으로 헌옷가지, 재봉틀, 텔레비전 등을 구입하여 보자기나 마대로 짐을 꾸렸다. 도문과 남양 사이 교두를 오가는 9인승 크기 승합차가 있는데, 운전석 뒤에 몽땅 짐을 실고 남양쪽으로 갈 때가 많았다. 다 실릴 것 같지 않던 할머니의 짐도 차곡차곡 실으니까 다 들어갔다.

나는 주위 사람들 틈에 섞여 그 짐 싣기를 거들었다. 거기에는 일용품과 손자에게 먹일 과자며, 당장 끼니가 될 쌀자루까지, 일상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장에 내다팔 ‘상품’으로 가져가는 물건 대부분이 헌것임을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았다. 할머니는 부모를 잃은 손자를 거두기 위해 온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할머니 여정을 상상해 보자. 소금실이 밀수출 보낸 아내가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로 시작하는 김동환의 서사시 <국경의 밤>에서처럼, 생계를 위해 희망을 걸고, 마음 조리는 기다림이 있는 변경지대는 예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일제 강점과 그 다음 분단의 후과가 필시 그 할머니 허리를 휘게 만들었을 테다. 이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 21세기 동북아 공간을 내다본다면, 그런 문제를 체험적으로 사고하지 않을 수 없다. 생계를 위한 변경의 밀무역이나 불법적 국경이탈 문제까지 포함해서, 이제 전근대적 국경을 넘어서는 새로운 틀로써 대응해야 할 시대적 요청이 있다.

2008년의 의미

2008년이면 중국은 개혁ㆍ개방 30년을 맞으면서 북경올림픽을 넘어서는 새로운 도약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후 중국은 고도성장만이 아니라, 옆(주변국)과 아래(민초)의 문제를 상호의존적 평화공존의 틀로 함께 풀어가야 하는데, 그 가운데 한반도는 또다른 운명에 처할지 모른다. 그것이 희망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는가?

   
새로운 변경문화를 만드는 시대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내부에서 이미 다국적 문화를 접하고 있다. 노동시장과 국제결혼을 통해서 외국인노동자, 조선족 동포들이 수십만 명이 들어와서 살고 있다. 며칠 전에는 서울 변두리인 우리 동네에 중국식품점이 문을 열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문화 접경’의 의미를 알려고 하지 않고, 남한의 우물 안에서 스스로 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주어지는 역사 흐름에 몸을 맡겨 방향도 모르고 떠내려 갈 것인지. ‘치수(治水)’를 하여 다양성이 소통되는 새 길을 내고, 동북아문화의 기름진 삼각주를 이용할 것인지?

도문에서 보았던 민초들의 거래를 긍정하는 입장을 한 단계 끌어올려 사고한다면, 세계를 하나로 묶는 인터넷망(WWW) 이상으로 현실공간도 열어야 할 운명의 길로 가고 있지 않은가. 세계의 흐름 속에서 북을 포용하는 문제는 ‘평등을 지향하는’ 남북 관계의 협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북-미 대결이나 조-중 순치(脣齒)의 우의관계보다 우선하는 문제이다. 일방적으로 될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어떤 자세로 접근하느냐가 바로 문제의 결정적 요소임을 아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값싼 동정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관심을 갖고 배려하는 소통의 길은 생각보다 쉽게 만들 수 있다. 도문에서 짐이라도 날라줘야겠다는 행동으로써 잠시나마 마음을 주고받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했다. 혹시 세관검열관의 제재를 받는 것은 아닌지 보이지 않는 의식을 했지만, 인간적 열망을 누가 막을 것인가?

핵실험 후, 일부 북의 주민들은 긍지를 느낄지 모르지만 이것은 큰 것을 잃는 짧은 소견이다. 자칫하면, 핵 대결을 불러 국제정세를 복잡하게 만들고 서민 생활은 더 괴롭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변경의 문화에 대해, 문화철학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폴란드, 체코 등 과거 공산권 국가나 2차대전 때 적국으로 싸웠던 나라들을 포함하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앙숙관계도 뛰어넘어 유럽은 EU로 통합되었다. 그들 국경은 새로운 성장 에너지가 되는 ‘통합된 접경지역’ 이상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홍면기는 <영토적 상상력과 통일의 지정학>(2006)에서 우리가 미래의 동북아 핵심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국경의 신화를 깨고, 반도적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공간관념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국경에 갇혀있는 생각을 변화시켜 개방적 변경으로 만들어가는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에 둔다면, 현재 대북문제를 두고 남남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큰 틀 안에서 저절로 해결되는 작은 문제가 된다.
의식에서 대아(大我)로, 영토분쟁보다 인류애의 문화를 담보하는 보편정신으로 나아가야 할 시대에, 2007년을 혹시 소아병적 대권 싸움과 덩달아 깊어지는 남남갈등으로 허비하지 않을지. 짧게는 2008년을 내다보고, 길게는 동북아시대를 생각하면, 비생산적인 엄청난 사회비용을 계속 치르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이 글은 <통일정토> 16호(2007년 1월)에 실었던 글을 옮겨왔슴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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