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여시아사 하춘생의 장로 대담
팔달선원 조실 범행(梵行) 스님②
  • 하춘생의 장로대담
  • 승인 2007.02.04 22:39
  • 댓글 0

장로대담-성찰과 희망 6 ∥ 수월 팔달선원 조실 범행(梵行) 스님   

   
▲ 어릴 적 누이, 형과 함께. 서있는 소년이 범행스님.
"기분 나쁘거나 속이 상하면 남을 도와주세요. 도움 받고 좋아하는 남의 모습을 보면 금세 내 기분이 좋아지고 속상하던 마음도 봄눈 녹듯 사라집니다."

부처님 가피 입고 축발득도하다

범행스님은 1921년 음력 2월 21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발안리에서 부친 전주 이(李)씨 경순(景順)과 모친 밀양 박(朴)씨 흥옥(興玉) 사이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출가 전 이름은 임배(林培)이다. 태어날 당시 고향은 수원군에 편제되어 있었고, 이복의 누이가 있었다.

동갑내기였던 부모는 나이 마흔 두 살 때 임배를 얻었고, 그래서였는지 비록 아들부자 집안이었지만 임배는 부모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어려운 줄 모르고 자랄 수 있었다. 

부친은 구한말 군인교관 출신이었다. 일제침략으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현직군인의 옷을 벗고 포목점과 방앗간 등을 운영하며 가정경제를 튼튼히 일궜다.

일곱 살 때 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학교생활은 그저 노는 게 즐거웠을 어린 마음 그대로 자유분방했다. 부친께서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를 채근하지 않았다. "배워 아는 게 많으면 일제의 앞잡이밖에 더 되겠느냐"는 생각이 아버지의 철학이었다. 그 덕분에 6년 과정의 보통학교를 1년 더 다니고서야 졸업할 수 있었고, 중학교엔 진학하지 않은 채 부친의 사업을 도왔다. 그 또한 있는 집안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분방함의 단면이었다.

그렇게 수년간 부친의 일을 도왔는데, 또래들이 중고등학생이 되어 교복입고 모자 쓰고 가방 끼고 학교 다니는 모습을 보니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어릴 적 노는데 열중했던 자신이 미웠고, 그대로 놓아둔 부모마저 원망스러웠다.

임배가 세계문학전집을 모두 읽고 시집에 빠지고 칼 마르크스나 엥겔스 등 사상가들의 책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철학가들의 사상에 흠뻑 젖게 된 때가 이즈음부터였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한을 그렇게 달랬고, 세상살이의 교양과 상식을 다 얻었다 싶었다.

나이 열아홉 살 되던 해 부친께서 환갑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으나, 임배는 10여 년의 세월을 만행하듯 세상을 더 공부하며 부친의 사업을 이어갔다. 선친이 막내인 임배에게 물려준 재산은 집 수 채와 아산만 일대 땅 3만여 평에 이르렀다.(아산만 지역 드넓은 땅은 이승만 정부 당시 토지개혁 때 일전 한 푼 보상없이 고스란히 정부에 넘겼다)  

임배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답답하게 살지 않았고, 그것은 곧 부친의 가르침이었다. 부친이 평소 강조한 가훈은 "△재산을 분명히 하라 △높은 자리 앉지 말라"였다. 이는 곧 "지금까지 쌓은 재산으로 잘 살 수 있으니 욕심내지 말 것이며, 명리를 결코 구하지 말라"는 경책이었다.

부친의 말씀대로 살던 임배에게 청천벽력의 시련이 닥쳤다. 당시 가장 무서운 병으로 알려진 폐병에 걸린 것이다. 광복 직후 성냥 하나 비누 하나도 만들지 못하던 한국경제 수준에 부친이 남긴 유산 덕분에 화학공장을 운영했는데, 그만 염소(鹽素, 황록색의 자극적인 냄새를 가진 기체 원소. 원소기호 Cl. 표백제·소독제 외에 의약·염료의 제조에 사용한다)에 중독되어 생사의 기로에 직면하고 만 것이다. 작은어머니·맏형·아버지·넷째형·자형 등 이미 가족 중 다섯이 폐병으로 그만 운명을 달리했던 기억이 임배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임배가 충남 금산의 태고사를 찾은 것은 그즈음이었다. 절에서 요양하면 병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한 가닥의 희망을 부여잡은 것이었다. 그 때 나이 스물여덟 살, 해방정국에서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가늠할 수 없는 혼돈을 묻어둔 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던 1948년 여름이었다.

태고사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창공으로 날아오른 비행기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절 아래로 깔리는 부운(浮雲)은 마치 하늘동네에 사는 기분을 던져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바로 그곳에 첫 사자(師資)의 인연을 맺은 윤포산(尹飽山)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다가 얼마 전 태고사로 자리를 옮긴 포산스님은 훗날 4.19학생민주화운동으로 출범하는 제2공화국 윤보선 대통령과 사촌형제였다.

태고사에서 요양의 설움을 달래며 포산스님과 대론(對論)을 벌이곤 하였는데, 그간 공부한 교양과 상식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던 임배였지만 매번 포산스님의 논리에 팡팡 깨지곤 하였다. 세상살이 알음알이가 불교사상의 공(空) 도리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쳤다.

포산스님은 임배에게 "철학을 공부해도, 문학을 공부해도 죽음을 면할 수 없다"며 "죽지 않는 방법이 있는데, 부처님만 믿고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佛頂心觀世音菩薩姥陀羅尼)를 열심히 외면 병마를 이겨낼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임배는 포산스님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5주를 넘기고 두 달이 가깝도록 지심(至心)으로 모다라니를 외고 또 외웠다. 그러던 어느 날 모다라니를 외우던 중 깜박 잠이 들었는데, 광복 이전에 오고 다녔던 의전병원 나리타 의사에게 진찰받는 꿈을 꾸었다. 나리타 의사가 이 곳 저 곳 몸을 검진했는데, "다 나았다"는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지불식간에 뭘 먹고 싶었고 기운이 샘솟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길로 연산읍내까지 30리 길을 걸어 내려가니 마침 장날이었다. 돼지고기 두어 근에 국수를 말아먹었다. 그간 투병생활에서 먹는 것이라곤 극히 제한된,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던 정황에 비추어 그날 읍내에서 꿀맛처럼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기적이요 가피였다.

그랬다. 다시 주어진 생명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부처님을 배반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였다. 임배는 그렇게 믿었다. 다시 주어진 삶을 부처님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회향하고자 했던 삼라의 중생을 위해서 살겠다고 원을 세웠다. 포산스님을 은사로 축발득도(祝髮得度)하고 5계를 수지하여 오늘의 범행(梵行)스님으로 다시 태어났다.

수덕사 혜암스님께 인가받고 당호 수지

   
▲ 수원팔달선원에 주석하고 계신 범행스님은 97년부터 법주사 조실로 추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 강원에 매년 1천만원의 장학금을 보내고 있다.
범행스님은 태고사에서 1년을 더 머물렀고, 이듬해인 1949년 계룡산 용화사로 자리를 옮겨 수행정진에 몰입했다. 용화사에는 만공(滿空)스님의 제자인 용음(龍吟)스님이 조실로 있었고, 절 너머 산등성이 압룡처에서 네 명의 기인들이 저마다 수행의 전형을 이루며 정진하고 있었다. 포산스님의 수제자로 알려진 용화사 주지․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 출신의 자칭 '땡초스님'·숙명여대 교수출신인 정남조 스님·한학자 출신의 아무개스님 등이 그들이었다. 특히 땡초스님은 거지대장 노릇에 벙어리 흉내로서 당시 혼돈의 사회와 많은 사람의 울분을 그렇게 소화해냈다.

범행스님은 네 명의 수행자들과 도반이 되어 정진하던 중 6.25 한국전쟁을 맞았다. 계룡산 정상에서 국군과 인민군의 일전일퇴를 지켜봤으며, 용화사에 주석하고 있던 노장 한 분이 보도연맹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잡혀가는 광경도 목격했다.

전쟁통에 가만히 앉아 수행한다는 것이 사치인 듯싶었다. 1952년, 고향인 수원의 팔달암을 찾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지금의 팔달선원으로 탈바꿈한 당시 팔달암은 창건주 비구니가 운영하는 선학원 소속의 사암이었고, 그 창건주 비구니는 다름아닌 이복누이의 시어머니였다.

팔달암은 북한 피난민들의 피난처였다. 개성시청으로 착각할 정도로 개성사람들의 집결지가 되어 있었다. 범행스님은 이곳에서 피난민들을 위로하며 아예 주저앉아 도심포교의 의지를 불태웠다. 당시 비구로서는 흔치 않은 독립적인 수행처이자 주석사찰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즈음 휴전협정이 이뤄지고 서울에서는 이듬해부터 교단정화운동, 즉 비구-대처승 분규가 일어났다. 스님은 경기도 교무원 교무국장의 소임을 맡게 되었다. 금오(金烏)스님을 은사로 건당하고 사미십계를 수지한 것이 이즈음이다.

1955년, 세납 35세 때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불교분규의 여파로 경기도 광주(지금의 서울 강남) 봉은사가 비구측에 제일 먼저 접수되었는데, 스님이 첫 주지로 발령받았다. 그렇게 봉은사에서 3년간 주지소임을 보는 동안 1956년 선학원 중앙선원 원장에 취임했다.

1957년 조계사 주지로 부임하고, 1960년 4.19학생민주화운동 직전인 4월 17일 대구 동화사 주지로 부임했다. 이듬해인 1961년 정월께 다시 자리를 옮겨 경기도 용문산 상원사에 보좌(寶座)를 마련했다. 어느 날 본가의 모친과 벗 삼았던 당시 최영희 장군의 모친과 한국은행 민병도 총재의 모친 등 세 분이 상원사를 찾았는데,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한 그날이었다.

그해 여름부터 잠을 청하면 총소리가 귓전을 때려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추석을 앞두고 누이가 찾아와 "혹시 좋지 않은 일 없느냐"고 물었다. 누이가 용문산을 오르는데 신중단 신중들이 말을 타고 상원사로 급히 올라가길래 지나는 사람들에게 까닭을 물으니, 범행이가 산신이 되겠다고 하여 각처 산신들이 범행이를 쫓아내기 위해 상원사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이의 꿈 이야기가 스님의 편치 않던 꿈자리와 묘하게 교차하면서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미련없이 상원사를 떠나 서울 삼청동 칠보사를 찾은 때가 1961년 9월 하순께다. 이틀 후 은사 금오스님과 경산․원허스님 등이 칠보사에 오더니 다시 조계사 주지를 맡아달라고 권유했다. 두 번째 조계사 주지로 부임하게 된 연유가 그러했다. 1964년께 다시 선학원 중앙선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7년 경주 불국사를 놓고 범어사와 수덕사 문중간에 점유다툼이 거세지면서 일간지에 󰡒중중 싸워라 까까중 말려라󰡓는 만평이 실릴 정도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1968년 범행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니 비로소 소용돌이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범어사 동산스님이 범행스님을 신뢰하자 대중이 어찌하지 못한 덕분이었다. 범행스님은 예서 6년간 주지를 역임하며 정부와 손잡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복원해 오늘날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게 되는 실질적인 기반을 닦았다.

1971년에는 지금의 〈불교신문〉 전신인 〈대한불교〉사장에 취임해 4년간 종단여론의 눈이 되었다. 〈대한불교〉는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출범 이전 조계사 주지 당시 범행스님과 별좌 홍도(弘道)스님의 산파역할에 힘입어 창간된 종단기관지였다. 
 
선학원의 수장인 제13대 이사장으로 부임한 시기가 이즈음이다. 1975년, 세납 55세였다. 허나, 선학원은 당시 중앙선원 건축비로 5천만 원의 거액을 빚으로 남겼다. 불교분규 당시부터 문제사찰의 책임자로 부임해 해결사 역할을 해온 저간의 역량을 이곳 선학원에서도 절실히 요구받고 있던 터였다.

선학원 이사장 수행기간이 무려 17년. 1991년까지 역대로 가장 오랫동안 수장이 되어 선학원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물론 그 이면에는 덕숭총림 초대방장을 역임한 혜암현문(慧庵玄門, 1884~1985)스님의 선풍과 덕화가 있었다. 범행스님은 당시 선학원의 조실로 주석하고 있던 혜암스님을 아버지처럼 모셨다. 이때 만공-혜암으로 이어진 전법게를 수지하고, 혜암스님으로부터 오도송을 인가받기에 이른다. '효일(曉日)'은 바로 그때 받은 당호이다.

   
▲ 일평생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며 한마디 일러주신다. <기분 나쁘거나 속이 상하면 남을 도와주세요. 도움 받고 좋아하는 남의 모습을 보면 금세 내 기분이 좋아지고 속상하던 마음도 봄눈 녹듯 사라집니다.> 사진=장명확

일체무애객(一切無碍客) 일도출생사(一刀出生死)

"청풍명월 청산유수(淸風明月 靑山流水)".

1976년, 세납 56세 때 깨친 오도송은 단순간결했다. 그것은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과거 일곱 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七佛通偈)이 던져주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선학원 이사장직에 있던 1979년 부산 금정선원 선원장에 부임해 1년 남짓 소임을 겸하여 수행했다. 그 직후 수덕사가 채권자들과의 다툼으로 몸살을 앓게 되자, 당시 수덕사 노장인 벽초경선(碧超鏡禪, 1899~1986)스님이 범행스님을 찾아와 주지를 맡아달라고 당부했다. 또다시 말썽사찰의 책임자가 되어 해결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84년께 일이다. 그러나 수덕사 역대주지 명단에는 범행스님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1997년 9월 월산스님이 입적하자 그때부터 법주사 조실로 추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 강원에 매년 1천만 원씩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평소에도 고아원을 찾아 아이들의 배를 채워주는 일을 낙으로 삼고 있다. 대담 당일에도 응접실에는 운문사 강원에 보낼 먹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스님은 요즈음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 금년 내 탈고 목표로 지나온 발자취를 손수 정리하고 있는 자서전의 표제는 <온 길을 돌아보니>이다. 일제시대를 고발하고 6.25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등 감춰진 진실을 바로잡을 생각이다. 물론 온 길을 돌아보는 핵심은 수행과 교화의 경험을 지혜로 승화시켜 후학들에게 남기는 것이다. 

대담 끄트머리, 한 말씀을 더 청하니 《화엄경》의 부처님 말씀을 옮겼다.

일체무애객(一切無碍客) 일도출생사(一刀出生死).
일체 걸림 없는 사람이라야, 단번에 생사에서 벗어난다.

일체 걸림 없어야 한다는 말은 오욕락, 즉 재(財)․색(色)․식(食)․권(權)․수(睡)에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무애를 막행막식으로 잘못 받아들이면 화탕지옥에 떨어진다는 경책도 잊지 않았다.

그리곤 일평생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며 너무도 평범한 지혜의 말씀 한마디를 일러주었다.

"기분 나쁘거나 속이 상하면 남을 도와주세요. 도움 받고 좋아하는 남의 모습을 보면 금세 내 기분이 좋아지고 속상하던 마음도 봄눈 녹듯 사라집니다."

일용사(日用事)였다. 그 속에 수행의 목적과 삶의 지혜가 있음이었다. <끝>

반론ㆍ정정ㆍ추후 보도를 청구하실 분은 이메일(budgate@daum.net)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불교포커스'에서 생산한 저작물은 누구나 복사할 수 있으며, '정보공유라이센스 2.0: 영리금지 개작금지'에 따릅니다. 정보공유라이센스

하춘생의 장로대담의 다른기사 보기
불교포커스 기사를 후원해주세요
  •            
후원하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