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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통일기금이 필요하다

연길에서 화룡 농촌출신의 복무원을 만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식당들에서 5년 정도 일한 21살의 앳된 처녀였다. 아직 연길시가 얼마나 큰지도 모르고, 그저 일만하고 있지만 수입은 형편없었다. 아파서 집에 있는 언니를 생일날에 불러서 도시의 하루를 즐기는 것이 고작 ‘여유’였다. 

그는 5년 도시생활에서 뭔가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었고 ‘세상이 무섭다’고 표현했다. 어린 아이가 칼을 모르고 만지다가 찔리는 것처럼,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상처를 입는 것이라고, 틈틈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조금 알려주었다. 준비되지 않은 순진한 처녀가 내던져진 현실은 냉혹했을 것이다.  

청진에 전염병 확산

개인이나 집단이나 미래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준비하는 자에게 돌아온다. 미래는 돌발적이고 예기치 못하는 위기로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중순, 청진에서 전염병이 돌아 고생한다는 긴급한 상황을 접했다. 그 일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를 비롯한 대북시민단체들이 모여서 의약품 지원을 의논했다. 작년 하반기 북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대북강경 분위기가 풀리지 않았고 인도적 지원마저 거의 막혀있던 터라, ‘긴급’하다는 말도 잘 먹히지 않던 때였다. 다행히 관심을 가진 지원 단체들이라도 실상을 이해하고 공감대를 넓혀보자고 나섰다.

흔히 벌어졌던 일로, 남북관계에는 희사하는 좋은 일도,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받는 물건, 이 셋에 각기 타산이 많고 뜻을 달리하여, 좋은 길 두고도 험난한 길로 에둘러 가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저쪽 사정을 알고서 조금이라도 덜 희생하는 길을 찾자고, 냉담해진 현실에서 죽어가는 민중이 무슨 죄냐고, 불교계에서는 민추본과 불교포럼이 회의에 참가했다.

불교포럼에서 ‘백만 원이라도 모아보겠다’고 나섰다. 그 말에 가슴이 짠했다고, 50만원을 보내 주신 분이 계셔서, 힘을 내어 150만원을 모으겠노라 했다. 마음으로 통하는 사람들 정성이 더해져서, 아이도 보태고, 겨우 밥벌이 하는 사람도 내고, 멀리 일본에서도 보냈다. 북한 돕기를 해온 힘 있는 단체가 아니었기에, 모금한 돈은 이백만원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하지만 앞장서서 일하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나 북민협 같은 대북지원단체에 저변의 힘을 보태었다고 생각한다.

아픔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

물수제비뜨기처럼 파급된 일이 또 있었다. 야마가타대학에 있는 선생님 한 분은 돌림병 치료조차 제대로 못 받는 북한 아이들을 걱정하며 기사를 번역해서 일본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 일본은 납치자문제며 대북경제봉쇄조치 등으로 여론이 아주 나쁜 터라, 소식을 전하는 일도 어려웠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라도 찾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가. 안톤 체홉의 ‘비애’라는 단편소설에 보면, 한 마부가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슬픈 것보다 자기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현실이 더 큰 비애가 되지 않던가. 아무 힘이 없는 약자의 고통은 도움도 도움이려니와 그 아픔을 누가 알아주는 것도 큰 힘이 된다.

   
▲ 라선시로 들어갈 버스 앞에 선 필자.
그래, 겨울에 무슨 전염병인가 했더니, 이번 겨울만의 일이 아니었다. 연약해진 체력과 보건환경의 악화는 1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경제난을 증언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런 대책 없이 전염병의 만성화, 토착화 현상을 불렀던 것이다. 비교적 잘사는 청진 등지에까지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발진티푸스, 성홍열이 기승을 부린 것은 대북경제제제와 무관치 않은 최악의 전기사정으로 인한 수돗물 공급 중단과 식수원 오염이 주요 원인이었다. 하지만 전염병 역학조사나 낡은 수도배관 교체와 같은 근본적 진단과 처방을 더 생각해야 할 일이다.

또 하나, 북한 사정에 맞는 가장 싼값의 항생제는 남한 제약회사들이 거의 만들지 않는 추세도 문제였다. 지난 1월 한국제약협회를 찾아갔을 때, 문 부회장님이 페니실린과 같은 1세대항생제 생산라인을 유지하는 의약정책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상호관계 살려야 최선

비단 그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지혜를 내는 지름길일 터, 모두를 함께 보는 눈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 우리 문제까지 생각해야 함을 절감했다.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받는 물건, 셋을 함께 생각하며 상호관계를 살려야 최선이 되는 것이다.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렇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불교계, 특히 조계종단에서 통일준비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어떠한 긴급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준비된 사람들과 재원이 잘 짜여있어야 하고, 운용에서 민첩함이 있어야 한다.
연변대학의 김강일 교수가 말하기를, 중국동북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은 연변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관건이며, 그러려면 두만강, 압록강 변경지역이 활발하게 열려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반도 통일이 중국에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가치를 올리는 좋은 일이 된다는 말이다.

미래를 판단하는 이와 같은 시각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한반도의 내부에서 그것도 분단된 반쪽이 땅에 갇혀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반쪽 시각으로 조망하는 세상이 온전할 수 없다. 남한 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원근법(遠近法)’으로 조망하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원(遠)은 근원ㆍ근본까지 꿰뚫는 문제의식과 세계관을 뜻하고, 근(近)은 민초들 생활상(生活相)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원근’은 거시적 안목과 미시적 현실을 동시에 장악하고 움직임을 뜻한다.

남북관계에서 인도적 문제까지 좌초시키는 핵실험 같은 암초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반도와 동북아(東北亞)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도 북한주민의 미시적 생활문제를 딛고 접근하는 구체적 문제의식, 즉 ‘원근법적 접근’의 눈이 필요하다.

'불교통일재단' 설립으로 추진력 가져야

민족공동체추진본부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일관된 저력을 실질적인 ‘추진력’으로 가지려면, 무엇보다 북한전문가를 내부 실무진으로 보강해야 한다. 또한, 한반도 안과 밖을 조망하는 해외 지역망도 개척해야 한다. 가장 긴요한 기금 비축을 위해 <불교통일재단>을 별도로 만들어서 위기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준비가 없었기에 의약품 긴급지원이 필요한 시점에 조계종단은 실질적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총체적인 전망을 뚜렷이 하고 문제들을 정책적으로 검토하는 네트워크가 되어있는지, 내부에 대한 냉정한 진단이 필요하다.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으면 자원배분이 효율적이게 된다. 시간과 돈이 든다고 기초를 튼튼히 하지 않으면 쉽게 무너져버려 미래를 창조할 수 없다.

이글은 <통일정토> 5월호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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