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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한국, 뫼비우스의 띠

한국에서 네팔로 와서 살아보는 일은 삶을 확 바꿔보는 도전이었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온 것에 버금가는 뭔가 다른 체험을 하고 싶었다. 덜렁 삭발도 해보았다.

웬걸! 인생살이 과오와 모순은 대부분 과거 혹은 미래에 매달려 사는 데서 온다. 내가 네팔에 온 지 한 달 보름이 되었는데, 여기 삶을 온통 과거에 습득한 내 분별심으로 판단하고 있다. 내놓고 말은 못 하지만, 비위생과 불편함이 한둘이 아니다. 속으론 적응한다고 하면서 잘 참지를 못하고 이것저것 고치고 만들고, 손을 보는 일이 많다.

   
 
▲ 부처님 탄생지 앞에서.
 
참치캔 빈통을 이용한 물컵 뚜껑, 생수병을 잘라 만든 양치컵, 종이박스 쓰레기통, 송곳으로 구멍을 내서 기운 빨래 들통, 모래구멍을 때운 장난감공, 자루를 끼운 몽당연필… 헤아릴 수 없이 재활용을 한다.

이렇게라도 뭔가 편의도구를 만들고, 도모하는 마음 구석은 물질의 편의에 길든 과거 분별심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 집안일을 하는 네팔 여성 데이비가 있는데, 그의 노력을 좀 들어주고 싶어 부엌 수도꼭지를 고쳐보려고 했다. 온통 물이 튀겨 뒷손이 가는 꼭지를 온갖 아이디어와 시간을 들여 고쳐보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한국이라면 수도꼭지 절수기를 하나 사다달면 끝인데, 여기서는 간단치 않다.

발동한 아이디어를 동원해 밤중에 작업을 하고 있는데, 교무님이 나와서 온 불을 다 켜 놓고 뭐하냐고 한마디 하였다. 정신 번쩍 들었다. 하루에 8시간 정전이 될 만큼 전기사정도 별로 좋지 않은데, 전기 들어온다고 막 썼구나! 하던 일을 중단하고 방으로 돌아와 깊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왜 여기 왔던가? 불편함을 고치기 위해? 왜 내 삶의 방식을 이식하고 있는가? 여기 고통은 여기 사람 몫이다. 스스로 깨닫지 않고 깨달음이 있는가? 이런 회의 속에, 네팔의 선(善)을 위해 중도의 길을 찾기는 쉽지 않다. 

여기 사람들 생활상을 이야기하면, 십중팔구는 흉보는 꼴이 된다. 주거생활 개선은 생각도 못하고, 부엌 안에 굴뚝도 없는 화덕에서 조리를 하는 주부는 매운 눈을 어쩔 줄 몰라 한다. 그 부엌 안에는 염소우리가 있다. 물이 정말 없어서도 아닌데 이용하는 지혜가 모자란 것인지, 아이는 피부병 투성인 채 그대로 둔다. 맞지도 않은 시계를 팔찌처럼 차고 있는 아주머니, 한쪽 공동수도 꼭지가 망가져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데, 그 코앞에 사는 할머니는 길어놓은 물로 머리를 감는다. 비위생적이고 비합리적인 상황에 별로 불편을 느끼지도 않고, 개선하는 노력도 없이 그냥 산다.

원불교 재단에서 네팔사람들을 새로운 삶으로 끌어올리려고 만든 사회교육센터는 공사중이라 온전한 프로그램이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중에도 유아원을 운영하고 있다. 여성자활 직업교육 겸 일자리를 제공하는 손누비 바느질센터, 태권도, 중교생 방과 후 교실 등을 병행하고 있다. 교육을 중심으로 한 사회변화를 희망하여 움직이는 활동을 가까이서 보면서 나는 조금씩 네팔사회를 이해해 가고 있다.

이해라고 하지만, 나는 내 생각의 합리성과 싸움 중이다. 네팔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특성이 살아있는 다종족, 다언어, 다문화 사회이다. 각종 씨족과 부족 집단이 색깔을 강하게 유지면서 한 국가를 이루고 있기에, 집단끼리 배타적인 성향이 짙다. 오죽하면 정당이 칠십 몇 개이겠는가.

   
 
▲천진난만한 코흘리개 유치원 아이들.
 
날씨도 변화무쌍하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면 괴기 영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런가하면 요즈음은 어둠이 드리우면 반딧불이 무리가 요정처럼 춤춘다. 아, 하늘에만 별들이 반짝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초월적 아름다움이 넋을 빼게 하는데, 육도윤회의 모순과 대면하면 나는 또 속수무책이 된다.

문화 차이를 극복할 신뢰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여기 세상에 벌어지는 생활상으로 보면 넘어서기 어려운 벽이 있는 것 같다. 이 생각은 기실 내가 이미 습득한 시비분별이고 내 의식의 한계이다.

나는 찾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땅에서 부처님이 태어나셨고, 이땅 모순을 풀고자 출가를 하셨다. 내게 다가오는 계절과 느껴지는 기운과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문득문득 부처님의 실존을 찾게 된다.

며칠 뒤면 부처님오신날이라 네팔에서 맞게 되는 부처님 탄생의 의미가 특별해진다. 여기서는 서기를 쓰지 않고 네팔력(올해는 2065년)을 따르기도 하거니와, 한국 초파일과는 날짜가 전혀 다르다. ‘붇다 저욘띠’(부처님 기념일)라고 하여 제트(2월) 7일인데, 올해는 한국보다 8일 뒤인 5월 20일이다. 지금 임시헌법은 과거 헌법의 ‘힌두왕국’이 잠정적으로 유보되어 있지만, 달력에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되어있다. 여기서 이날 행사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힌두교도들이 많기 때문에 절을 찾지 않고는 부처님오신날 축제를 맛볼 수 없을 것 같다.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는 1985년 룸비니개발공단(LDT)을 발족시켜 성역화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거의 외국 투자로 이뤄지고 있다. 또 카필라성의 유적은 다 허물어지다시피하여 별로 돌보지 않고 있었다.

이런 겉모습만 아니라 네팔사람들 대부분은 부처님 사상을 모른다. 아주 깊은 빈부귀천의 사회적 모순과 주어진 자연 속에 안주한 모순적 순응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땅에 세계시장이 무분별하게 열려있기에, 네팔은 더 깊은 고통 속에 놓여 있다.

썩어서 흐르는 물, 나뒹굴고 있는 폐기물로 황폐화하는 땅, 이런 생활공간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생활 속 힌두의례들은 정성스럽게 지키고 있다. 오염과 초월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현실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벽에 부딪힌 의식에서 나는 부처를 찾아 명상한다. 여기 몸을 담고서 감당해야 할, 간절한 탈출이다. 내 갇힌 의식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번 비틀어 놓아야 한다. 저승에 와서도 이미 길들여진 안락을 찾아, 이승을 자꾸 부르고 있는 나를 놓아야 한다. 네팔현상들과 내 몸에 길들여진 시비분별로부터의 자유, 의식의 자유로부터 오는 안식을 위하여. 그 다음에 부를 수 있을 사회 모순으로부터 자유를 위해서, 안과 밖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서, 그렇게 한번 나는 네팔을 살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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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산 최정순 2008-05-14 07:40:59

    과거 일천구백 육십년의 전라도 생활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사십년이 흐른 지금도 어려운것은
    그때나 마찬가지로 어렵습니다.
    즐겁게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삭제

    • 향산이병두 2008-05-13 18:36:45

      고생이 얼마나 클지 눈에 환하게 그려집니다.
      그러면서도
      '큰 복덕을 짓고 계시구나'하고 부러움도 함께 생겨납니다.

      부처님 오신 날도 더욱 뜻깊게 보내셨으리라 기대합니다.

      가끔 소식 전해주십시오.

      이병두 합장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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