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학술
불교비판에 대한 반비판 <귀원정종> 최초 분석신규탁 교수 '용성스님 학술세미나'서 발표

유교와 기독교의 불교 비판을 반비판한 용성스님의 저술 <귀원정종(歸源正宗)>의 내용을 처음으로 분석한 논문이 발표됐다.

연세대 철학과 신규탁 교수는 16일 전북 장수 죽림정사에서 열린 용성스님 오도 123주년을 기념하는 학술 세미나에서 발표한 '<귀원정종>과 용성선사'를 통해 <귀원정종>의 서술 구조와 내용을 밝히고,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교학에 해박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명도집>을 직접 읽는 등 주자의 학설에 대해서 정확하게

   
<조선글 화엄경>을 들고 있는 용성스님상.(전북 장수 죽림정사 내 용성기념관)
인용하고 적절하게 비판하고 있다. 성경을 읽고 그에 대한 반론을 편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면서 "현재 한국사회가 다종교사회라는 점에 우리들을 주목하게 하기도 한다"고 용성스님과 이 저술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평가했다. [용성스님-아래 박스]

'용성사상과 계승의 재조명'을 주제로 열린 이날 세미나에서는 신 교수의 논문 외에도 '이동헌의 삶과 백용성의 유훈 실현'(김광식 부천대 교수), '승가의 쟁사(諍事)와 파승(破僧)에 관한 석존의 교계'(덕산스님, 불교교단사연구소장) 등 3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귀원정종>은 1913년 발행됐다. 초판본은 전해지지 않으나, 도문스님이 영인해 펴낸 <용성대종사 전집>에 한문에 현토를 한 재판본이 영인되어 실려 있다.

용성스님은 이 책에서 "자고이래로 우리 부처 문중에서는 타종교의 가르침을 먼저 배척한 사례는 없다. 다만 부득이 그저 저들이 비방을 하니 그에 따라 저들의 잘못을 가려주었을 뿐이다"라며 저술 동기를 불교에 대한 비방을 바로 잡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용성스님은 64개 항목에 걸쳐 자문자답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가령, 삼강오륜의 도를 섬기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 "불교에는 3귀의와 5계가 있는데, 이것을 강(綱)으로 삼고, 이것을 각각 상(常)으로 삼는다"고 반박하고 있다. 

여호와가 아담과 하와와 일체의 생명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만들어진 것은 필경에는 소멸하여 진실됨이 없다. 만약 이것들이 사라져 없어지는 존재라면 천당에 올라가고 지옥에 들어가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반면에 이것들이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다면 성령의 신이 만들었다는 말이 자체 모순이 된다"고 지적한다.

신 교수는 "용선선사는 '일심'에 기초하여 '법성철학(法性哲學)에 입각하여 자신의 교리적 체계를 정리한다. 그의 이런 체계는 유교 비판에는 물론 기독교의 비판에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런 그의 공부이력은 타종교의 잘못을 심정적으로만 이해하고 남에게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자신만이 알고 마는 여타의 선승들과도 현각하게 다르다"며 선사로서의 용성스님의 면모만이 아니라 종교, 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닌 실천적인 지식인이었음을 확인한다.

<귀원정종>은 내년 초 신 교수의 번역으로 출판된다. 

   
이날 세미나는 죽림정사가 주최하고 불교교단사연구소가 주관해 진행됐으며, (사진 오른쪽부터) 죽림정사 조실 도문스님, 동화사 조실 진제스님, 화엄사 회주 명성스님, 전 총무원장 의현스님과 용성스님 문도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김광식 교수는 '이동헌의 삶과 백용성의 유훈 실현'을 통해 용성스님의 유훈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용성스님의 제자인 동헌스님의 생애를 학계에서는 처음으로 재구성했다.

덕산스님(불교교단사연구소장, 전 원로회의 사무처장)은 '승가의 쟁사(諍事)와 파승(破僧)에 관한 석존의 교계'에서 94년 개혁 과정의 승려대회를 등을 비판적으로 살폈다.

덕산스님은 90년대에 있었던 다섯 차례의 승려대회를 율장 '구섬미건도'에 나타난 승가의 쟁사 해결과정에 대비해 분석하고, "91년 7월 8일 해인사 승려대회를 제외한 네 차례의 승려대회는 승려들간의 쟁사이자 파승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불행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용성스님
1864년 5월 8일~1940년 2월 20일.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백상규(白相奎)이며 용성은 법호이다. 법명은 진종(震鍾).
전라북도 장수 출생으로, 16세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불문에 입문했다. 해인사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 대표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참가했다.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징역 1년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감옥에서 한글 성경을 가지고 있던 목사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921년 한국 불교 사상 처음으로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했다. 1928년 '조선글 화엄경'을 펴냈다. 당시의 언론은 '세종대왕도 못했던 일'이라고 하였다. 윤봉길 의사에게 임시정부로 가서 항일운동을 할 것을 권유하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일제가 사회 문화 전반에 왜색을 도입하면서 불교에서도 대처승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자 자신이 세운 대각사(大覺寺)를 중심으로 왜색불교 추방 운동에 앞장섰다. 1924년 잡지 《불일(佛日)》을 박한영과 함께 창간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건백서를 두 차례 제출했다.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사원 경제의 자립을 위해 1929년 경상남도 함양에 자급형 농장인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고 선농불교(禪農佛敎) 운동을 펼쳤으며, 여기서 나온 수익금을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화엄경》 등 경전의 한글화 작업과 일요 어린이 법회 개설, 거리 포교 및 찬불가 도입 등으로 불교 대중화와 포교 방법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양복을 입고 금광도 개발하는 등 절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크게 힘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1990년 은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반론ㆍ정정ㆍ추후 보도를 청구하실 분은 이메일(budgate@daum.net)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불교포커스'에서 생산한 저작물은 누구나 복사할 수 있으며, '정보공유라이센스 2.0: 영리금지 개작금지'에 따릅니다. 정보공유라이센스

*정성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