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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여시아사 법현스님의 저잣거리에서 그저 사노메라
이웃종교 만나기 ①
  • 법현스님|열린선원장
  • 승인 2016.05.25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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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역촌중앙시장 자리는 그야말로 논가의 빈 자리였다. 장화를 신지 않고는 다니기 힘들 정도로 시골이어서 서울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고양시의 경계이기도 하고 양주군 북한면의 경계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그 이름도 찬란한 역촌맨션아파트를 짓고 역촌중앙시장을 현대식으로 지은 것은 교원공제조합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힐스테이트니 타워팰리스니 하는 이름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그 옛날에는 맨션아파트가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였다.

그야말로 현대식 시장이었으나 세월이 50여년 이상 흐르고 나니 재래시장인지, 전통시장인지 그 이름마저도 붙여주기 어려운 낙후한 시장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서른 개 남짓의 가게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얼른 재건축 회사에 넘기고 받은 돈으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이들과 나처럼 월세로 사는 이들만 남아서 미래를 가늠해볼 수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70여개의 점포가 다닥다닥 붙어서 각종 옷 종류와 고기류, 생선류, 채소류, 과일류들과 반찬거리며 떡방아간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장을 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동국대학교불교학과를 갓 졸업하고 ‘생산 불교’를 한다고 사회의 회사인 교원공제회에 취직하여 재무관련 일을 보았던 나의 은사이신 운산스님께서 회고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 때는 다른 곳에 월세를 받으러 가면 그저 김치에 밥을 줬는데 역촌맨션에 가면 고기를 구워내더라는 회고를 하셨다. 그러면서 참으로 묘한 인연이로구나 하셨다. 당신께서 젊은 시절에 다니던 곳에 제자가 저잣거리 수행전법도량 열린선원이라 이름 짓고 월세 포교원을 내자 마음에는 미덥지 않으셨을 텐데도 원효스님의 예를 들며 열심히 정진하라고 개원법회에 증명법사로 참석하여 당부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오는 사람마다 겉으로는 축하의 말을 하지만 어찌 이런 구석 허름한 건물에 터를 잡았느냐고, 깃발을 꽂으려면 강남에 꽂아야지 강북의 서쪽 끄트머리가 뭐냐고들 하였다. 지금도 그 시선은 여전하지만 나름 의미를 가져주는 것 같아 고마울 따름이다.

나를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들이 찾아보고자 왔을 때 나름 바쁘게 사는 지라 정작 내가 더 늦게 도착하는 일도 있다. 요즘에는 봉사자가 있어서 문도 열려있고 사람이 있지만 전에는 아무도 없어서 밖에 볼 일이 있으면 문을 잠가 놓고 나가야 했다. 문이 잠겨있을 때 온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열린선원이 아니라 닫힌 선원이라고 바꿔야겠다”는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별 수 없다고 하다가 번호키로 바꿔 달았다. 법회활동도 활발히 하고 텔레비전에도 가끔 나오고 신문에서도 자주 보았으며 아무리 변변치 않아도 ‘스님’이기에 제법 그럴듯한 공간에서 생활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찾아온 불자가 있었다. 시장으로 들어서니 우중충한 재래시장 건물에, 드문드문 물건이 없는 죽은 상가에, 2층으로 올라가면서 얼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2층 입구에서는 ‘할렐루야~아멘~’하면서 방언이라고 하는 말들을 뱉어내듯이 기도하는 교회를 지나면서 더욱 미간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 교회로 말할 것 같으면 나처럼 활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를 ‘좋은 스님’이라고 교회신도들에게 소개하는 목사님이 사는 곳이다. 이 목사님이 나를 교회 신도들에게 좋은 스님이라고 소개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한다. 오가면서 인사도 드리고 이야기도 나누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다 어느 여름 날 간밤에 몹시도 심하게 비바람이 불었던 날 아침예불을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가 길바닥에 부러져 떨어진 십자가를 보았다. 처음에는 직접 들어서 가져다 드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니 목사님께 알려드리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초인종을 눌러 말했다. “아무래도 그 종교의 성보이니 직접 살피시는 것이 좋을 듯 해 알려드립니다” 하고 함께 가서 모시게 하였다. 그랬더니 그 마음을 좋게 본 모양이었다.

두 번째는 열린선원 옆 상가에 세 들어 왔던 사람이 낮에는 별 영업도 하지 않다가 밤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밤을 새고는 하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아마도 모여서 노름을 한 모양이었다. 새벽녘에 서로들 싸우느라고 매우 소란스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 날 건너가서 “신도들에게 물어보니 신고하라고 하는데 어쩌랴”고 물었더니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며칠 뒤 목사님이 찾아왔다. 그 사람이 교회에서 밤에 통성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지나가면서 교회 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시끄럽다고 기도를 못하게 하였다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정상이었는지를 묻고 술을 마신 상태였다는 소리를 듣고 그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가서 양해를 구하라고 조언을 하였다. 나중에 찾아와서 그렇게 하였더니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였다며 고마워하였다.

   
 
3층에도 교회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인사를 받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도 웃으면서 인사를 하였더니 교회주보를 하나 주면서 “거기 기도시간이 있으니 피해서 하라”고 하였다. “들어주시는 분 동네가 다를 텐데 그래도 시간을 피해야 하나요?” 하였더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손님으로 갔으니 들어주는 의미에서 참고하겠다 하였더니 참고로는 안 되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명토 박았다. 그래서 “이웃종교의 지도자가 참고한다면 그리 아셔야지요” 하고 내려왔다.

나는 이웃종단, 이웃종교와 교분이 참 많아서 고맙게 생각한다. 어려서 고아원에 살 때 기독교를 접했다. 그저 찬송가 조금 부르고 예수님 이야기를 학습하는 정도였지만 좋은 기회였다. 다니던 초등학교가 불이 나서 성당건물을 빌어서 수업을 하였다. 그것도 조금은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을 다니면서 어린이 법회를 지도하는 교사활동을 하였다. 조금 더 재미있게 하려고 YMCA 레크리에이션대학 6기로 등록해서 그들의 선진기법을 익혔다. 당시 이요섭이라는 분이 YMCA총무를 맡고 있었으며 레크리에이션대학을 총괄하고 있었는데 이교도임을 밝히는 나에게 잘하려고 노력하였다.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조금 더 지난 시절에는 내가 살던 평택의 YMCA에 가입해서 활동한 적도 있다. 사회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해서 그런 것이었다. 나름 열심히 하고 모임에서 고아원을 방문해 위문행사를 하는데 사회를 맡아 힘을 들이고 왔다. 그런데 며칠 뒤에 그 고아원의 여선생이 편지를 보내왔다. 개인적인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다방에서 만나보니 찬송가합창단을 조직해서 선교활동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YMCA행사의 사회를 볼 정도인데다 친숙해지려고 바이블의 이야기도 섞어 넣었더니 크리스천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사실을 이야기 하며 나는 종교는 달라도 선교활동 할 수 있는데 괜찮느냐고 물었더니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에 함께 활동했던 황요셉이라는 분이 또 기억난다. 신심이 뛰어난 분으로 기억하는데 신자들이 목사님의 집을 방문해 시설이나, 가구며,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고 실망하는 것들을 보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희사를 하였으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니 관리자인 목사를 보고 마음을 여닫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즈음 눈에 들어오는 표어가 있었는데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들어오는 어귀 어디쯤인가에 붙어있었던 꽃동네 오웅진 신부의 글이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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