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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평화'를 말할 때다

다시 ‘잃어버린 10년’

잃어버린 10년! 이명박 정부가 등장했을 당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통일정책에 대한 평가를 함축하는 말이었다. 진보정권 시기 우리는 남북관계의 일상화시대라는 감동을 경험했다. ‘죽기 전에 한번 꼭 가봤으면’ 했던 꿈에 그리던 금강산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갈 수 있었고, 한국전 당시 북한의 주요 남침로였던 파주 인근 DMZ는 매일 아침 개성공단으로 가는 긴 차량행렬로 뒤덮였다. 평양에는 남한의 전문가와 활동가, 그리고 관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냉전체제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가슴 벅찬 일들이 현실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동해에서 금강산으로 크루즈 여행선이 출항하는 때 서해에서는 남북한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고, 북한은 화해와 협력을 뒤로하고 핵무기 개발이라는 ‘금지된 장난’을 시작했다. 북한은 남북관계에서 항상 갑이 되기를 원했고,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보상을 요구했다. 냉전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남북관계를 열어야 했던 진보정권은 북한 지도부의 변화를 기다리며 이를 감내했다. 그러나 상당수 국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도발과 협상, 그리고 실리추구를 반복하는 변하지 않는 남북관계에 대한 피로감은 보수정권을 탄생케 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 말기 다시 ‘잃어버린 10년(정확히 9년)’의 화두가 등장하고 있다. 보수정권 10년 동안 ‘비핵개방 3000’이라는 야심찬 기획도, ‘통일대박’이라는 언감생심의 상상도 이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금강산관광사업은 기약 없는 중단상태에 놓였고 개성공단은 폐쇄되고 말았다. 분주히 오가던 남북한 간의 발길은 끊어진지 오래고 대화채널마저 없다. 북한의 도발과 핵무기 개발이 원인이라지만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도발, 그리고 북한 핵개발의 심화라는 현실은 모두 보수정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보수정권 10년의 대북‧통일정책을 또 다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러야할지 모른다.

문제는 진보정권 10년간 쌓았던 남북관계의 탑을 보수정권이 모두 무너뜨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진보정권이 이룩했던 남북관계의 발전은 보수정권의 대북‧통일정책의 자산으로 승계되어야 했으며, 그 바탕위에서 정책적인 조정이 이루어지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나가야 했다. 진보정권 10년간 쌓았던 남북관계는 마뜩찮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공이 든 탑이었으며, 탑을 허물 것이 아니라 더 튼튼하게 만들 방도를 찾는 것이 온당했다. 이제 남북관계에서 한국 정부가 가지고 있는 레버리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동포들이 희생당한 함경북도 수해라는 끔찍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강력한 제재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두 번의 ‘잃어버린 10년’, 그렇다면 우리는 20년을 공허하게 허비한 셈인가! 이제 냉철한 성찰과 반성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때다.

트럼프 당선과 새로운 선택

미국 내부에서조차 충격적이었던 트럼프 후보의 당선을 우연한 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냉전체제 붕괴 이후 과도기 동안 국제질서는 자본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를 지향했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과 미국 국력의 한계로 국제질서는 다극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뉴노멀(New Normal)시대의 전개는 미국에게 다른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대변하는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가 미국 국민의 선택을 받은 이유이다. 트럼프의 등장 이전 이미 영국의 브렉시트(BREXIT)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트럼프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며 미·소 양강체제의 붕괴이후 국제질서와 세계경제체제 재편과정이라는 구조적 환경변화에 대한 미국 국민의 현실적 선택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트럼프의 등장은 한국에게 위기이자 기회이다. 한미관계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접해왔던 한미관계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인식이다. 한국 정부의 대북‧통일정책은 미국과 보조를 맞추면 되는 일이었으며, 한국의 안보는 혈맹인 미국이 영원히 지켜준다는 믿음에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한미관계가 사랑이 아닌 ‘계약’관계라는 점을 간결하고도 명백하게 말해주었다. 가격이 안 맞으면 한미 사이의 계약관계는 파기될 수 있으며, 주한 미군도 언제든 철수할 수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입장이다. 대선 캠페인 기간 트럼프의 발언에 따르면 말이다. 한미관계가 지금까지 굴러온 대로 가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비율에 대한 압력이 증가할 것은 명약관화하며, 미국의 이런 저런 요구사항이 늘어날 것도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트럼프의 고립주의 성향과 동맹에 대한 인식이 한국외교와 안보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의존 일변도의 외교안보정책이 현재와 같은 세계사 변환기 한국의 국가전략에 적합한지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이며, 국익평가에 따라서는 우리가 남북관계에 주도권을 쥐고 지정학적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여지도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새 정부가 한미관계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한반도에서 미국이 부담하는 짐을 상당부분 내려놓기를 원할 것이다. 트럼프의 등장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볼 일이 아니라, 남북관계 발전과 한국의 외교안보력 강화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로 인식할 일이다.

   
▲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사진=NTI.
북핵문제의 불편한 진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해와 바람의 나그네 옷 벗기기 시합에서 나그네는 결국 햇볕에 의해 스스로 옷을 벗고 만다. 햇볕정책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배경이다. 문제는 북한이라는 나그네는 옷을 벗을 생각이 아예 없다는 점이다. 지난 20여 년간 햇볕도 바람도 결국 나그네의 옷, 즉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했다. 북한은 5차례의 핵실험과 6차례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감행했다. 특히 집권 5년에 불과한 김정은 정권에서 북한 핵미사일 개발과정의 절반 이상이 소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핵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협상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경제·핵 병진노선을 천명하고 있으며, ‘하늘이 무너져도 핵 포기는 있을 수 없다’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북한은 금년 5월 7차 당 대회에서는 북한이 핵보유국이며 책임 있는 행동을 하겠다고 천명했다. 김정은 정권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한국은 물론 미국 내의 전문가와 정책당국자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또한 5차례의 핵실험으로 북한이 실질적인 핵능력국가에 근접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제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 할 때다. 그 동안 북핵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협상과 노력은 실패했으며, 한국이 북핵의 실질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북핵문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안보위협이며,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제 스스로 인정해야 할 때이다. 북핵문제가 심화되는 것을 현 단계에서 반드시 막아야 하며, 보다 창의적이고 차분한 방법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현 단계에서 대북제재국면의 급격한 변화가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제재의 궁극적 목표는 협상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북핵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가능하다면 협상의 채널과 의제를 과감하게 확장하고 개방해야 한다. 북한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축소는 물론 북한의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도 나그네가 옷을 벗지 않겠다면 장기적인 노력을 통해 김정은 정권이 아닌 북한의 체제와 사회가 옷을 벗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는 북한정권이 아닌 체제와 주민에 대한 관여의 확대를 의미한다.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하여

“통일의 필요성을 지지하는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평화적인 분단체제에도 동의한다.” 얼마 전 통일연구원의 연구결과이다. 헌법에 평화통일이 명시되어 있고, 한민족이라는 역사의 기억을 간직한 우리가 통일이라는 담론을 외면할 수 없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적게는 절반, 많게는 80%까지 통일에 대해 긍정적인 응답이 나오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 통일이 반드시 독일식의 단일국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분단체제는 천문학적인 고비용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남북한의 기형적 발전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병리적 현상이다. 분단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는 불편함이다. 그러나 그 통일이라는 말이 갖는 구체적 내용은 평화와 연결시켜 볼 때 매우 다양하다. 한반도의 분단은 한반도 평화의 위기가 지속됨을 의미하며, 통일은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상태를 확보하는 한 단계이자 수단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당면적으로는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을 이루면서 장기적으로는 끊임없이 통일과정의 단계를 높여나가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진보와 보수, 여야의 합의로 탄생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휴면상태에서 깨워 제대로 가동시켜야 할 시점이다. 장기간의 분단은 남북한 간의 구조적 이질성과 적대감을 형성했으며, 이는 단시간에 해소되기 어렵다. 김정은 정권의 폭정과 주민들의 회의감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에 남한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 이유이다. 어느 날 갑자기 김정은 정권이 붕괴하고 그러면 당연히 남한주도의 통일이 실현될 것이라는 가정은 환상에 가깝다. 통일대박론은 대박을 얻는 과정은 무시한 채 최종결과물만 얘기하고 있어 공허할 수밖에 없다.

북핵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포함하는 한반도 안보위기의 해소, 남북한 간의 자유왕래와 경제활동의 자유화만으로도 사실상의 통일일 수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화해협력단계의 완성만으로도 한반도의 평화는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루게 된다. 남북한 간의 평화적인 공존의 장기화는 자연스럽게 북한의 변화와 두 체제의 수렴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제 단기간 내 실현가능성이 낮은 통일을 정치적 슬로건에서 해방시키고 통일의 필요조건인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해 나가야 할 때다. 평화가 문을 열면 그것은 곧 통일 과정의 시작이다. 시급한 북핵문제의 관리와 아울러 다양하고도 창의적인 한반도의 평화 상태를 달성하는 대안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2017년 들어설 새 정부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 이 글을 평화재단 평화연구원 현안진단 제156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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