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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왜 몰랐을까? 이제야 알게 된일초스님과 제자들의 편지 <우리가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잘 안다고 여겼던 곁에 있는 이의 마음을 그땐 몰랐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된다. 이제서야! 라는 탄식이 터져나올 수밖에.

동학사 중강 일초스님은 1991년 1월 30일 사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돈이 없어 시내에 나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던 사연을 전했다.

20원의 돈이 없어 버스를 타고 시내에 다니지 못했어요. 겨우 40원의 돈이 생겨 시내 한번 가려고 주차장에 가면 학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줍잖은 중강 체면에 학인 한 명 차비 내어줄 돈이 없어 볼일 있다 핑계 대면서 먼저 보내고, 또 먼저 보내면서 한나절 주차장에 앉아 먼 산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일초스님과 사제와 학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이 나왔다. <우리가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제목은 일초스님의 시에서 따왔다. 민족사 펴냄.

일초스님 외 지음, 민족사 펴냄, 292쪽, 14500원.

 일초스님은 그 편지에서 “이렇게 길을 가던 마음이 가끔은 미아가 됩니다”라고 적었다. 후학들은 이제야 먼 산 바라보던 일초스님의 그때 마음을 알게 됐다. 허나 지금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게 쓸 일인 것을 알았다. 
 
편지의 주인공은 일초스님. 동학사 승가대학장으로서 30년 넘는 시간 동안 오로지 후학들에게 교학을 강의하면서 수행자의 길로 이끄는 일에 매진했다. 지금도 동학사 승가대학원장과 하엄학림 학장으로 후학들을 살피고 있다. 또다른 주인공은 동학사 승가대학에서 일초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비구니스님들이다. 동학사 승가대학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강원이다.

원욱스님이 편지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원욱스님은 30여년 전 동학사 강원의 학인이었다. “그리운 이들에게 선생님의 아름다운 시와 맑은 편지를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의 서간집이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내면의 깊은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비구니스님들은 어떤 마음을 담아 편지를 건넸을까. 한 스님은 중국유학 중 안부를 전하는 편지를 보냈다. “공기 나쁜 중국에 와서 매일 목에 통증을 느끼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매일 먼지를 뒤집어쓰고. 옷에 온통 자전거 기름 묻혀 가며 자전거를 타고 다닙니다. 비구니가 승복 입고 자전거 타는 모습 상상이 가세요?”라며 근황을 알렸다.
 
학교를 떠난 후 찾아뵙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도 편지로 전했다.

스님. 저희들에게 항상 이런 말씀을 해 주셨지요.
“너희들은 그저 공부만 하라는데 그것도 하기 싫으냐?”
그저 공부만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아마 다들 지금은 가슴으로 느끼고 있을 거예요.
화경헌 앞 청개구리들은 올여름에도 변함없이 모여 앉아서 학장
스님 밤잠 못 주무시게 하고 있겠지요? 연꽃들은 잘들 있는지, 채
송화도 피어 있는지, 매화나무가 올해는 아프지 않은지 궁금하기
도 하고 찾아뵙지 못해서 많이 죄송스럽습니다.

1988년 봉은사 주지자리를 놓고 폭력사태를 빚었던 사건은 학인스님들에게도 큰 충격이었고 상처를 남겼다. 당시의 한 학인스님은 일초스님에게 보낸 편지에 “진정 우리는 ‘유명’과 ‘명예’로 얼마만큼의 물결무늬를 놓아야 하는 건가요?”라고 아픈 마음을 담았다.

한 스님은 일초스님이 강의 때마다 ‘감자중’이 되라고 강조했던 말씀을 편지를 쓰며 다시 새기고는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경전을 강의하시면서 이르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승僧은 경전을 주면 강의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법상 앞에 서면 부처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하며, 꽃을 주면 한 다발 꽃에서도 자연의 신비한 조화를 그대로 보며 꽂을 수 있어야 하고, 붓을 주면 또 그렇게 자신 있게 잡을 수 있어야 하며, 선방으로 좌선을 하러 가면 오롯한 마음으로 정진에 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어느 것 하나 공부 아닌 게 없고 모든 것이 다 공부라고 일러 주시면서 감자와 같이 썩어서도 필요로 하는 감자중이 되라고 하셨지요.

일초스님은 새해를 맞을 적마다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드러운 어투에 담긴 당부 속에 수행자의 길이 새겨져 있다.

“남을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가 넘칠 때 남을 칭찬하고 기뻐하는 소리를 더 많이 해서 기쁨이 가득한 세상을 발원해야 합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질시보다는 연민의 정을 가질 수 있는 보살의 마음이 그리운 때입니다. 나에게 힘이 있다면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어주고 덮어주는 흙의 힘으로 다시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또 다른 것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도록 수행자가 앞장서서 기도하고 발원하고 보살행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비심과 자비행이 불자들의 가슴에 꽃을 피우고, 불자들이 세상에 계속 퍼뜨려 자비행의 릴레이를 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왼쪽부터 보련스님, 원욱스님, 명선스님.

책은 ‘바라만 봐도 그저 좋은 사람들에게-일초스님이 보낸 편지’ ‘때론 풀꽃처럼 때론 허공처럼-서림스님이 일초스님에게 보낸 편지’ ‘그리운 스승 가슴에 품고-동학사 비구니스님들이 일초스님께 보낸 편지’ ‘흔들릴 때마다 힘이 되어 주시는 스님-세상 사람들이 일초 스님께 보낸 편지’ 등 4장으로 구성돼 있다.

책 출판에 즈음해 일초스님의 제자인 명선스님(동학사승가대학 학림원 교수), 원욱스님(서울 목동 반야사 주지), 보련스님(동학사승가대학장)이 27일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30여년 저편의 학인시절을 회고했다.

이들에게 일초스님은 어느 한곳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깐깐한’스승이었다.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따뜻했다. 출가자로서 첫 걸음 떼는 학인들의 마음을 보살폈다. 후학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명선스님은 “평생 저리 올곧이 서있을 수 있을까. 선생님을 뒤쫓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보련스님은 2005년에 선생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는데, 그때 ‘어려운 강사의 길을 가자해서 미안하다’고 하신 말씀이 사무친다”고 했다. 세 스님은 “이 책을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다음 달 19일 동학사에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연다. 매월 한 차례씩 여는 원각경 강의를 마치고 대중공양을 하기로 했다. 원각경 강의에는 전국에서 90명의 스님들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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