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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義)를 어떻게 제도화할 수 있을까?촛불혁명의 완수를 위한 롤즈의 『정의론』 읽기
  •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교수
  • 승인 2017.04.03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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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대체로 정의나 진리 같은 추상적 가치보다는 돈 같은 물질적 가치들에 의해 지배된다.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 속에서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아침도 돈을 벌기 위해 일찍부터 움직이고, 만성적인 피로감을 애써 떨치려 광고에서 본 각성음료를 독약처럼 입에 털어 넣으며 불편한 마음자락을 추스르곤 한다. 그럼에도 좀처럼 삶이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지쳐갈 때, 다소 무리를 해가면서 해외여행을 가거나 여건이 되지 않으면 제주도 같은 국내 여행지로 떠남으로써 위로받고자 한다.

지난 해 말부터 시작되어 대통령 파면과 구속, 조기대선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시국상황은 이런 삶에 청량제 같은 위로를 가져다주고 있다. 돈과 권력이 대학입학을 보장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몇 년씩이나 대학 총장직을 비워두거나 국가가 꼭 해주어야만 하는 일조차 거부하면서 문화예술계를 옥죄던 야만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우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게 된다. 그것도 ‘법꾸라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 끝까지 버티던 세력들을 시민들의 수많은 촛불로 몰아내는 헌법질서의 회복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까지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다. 1960년 학생혁명과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시민항쟁이라는 역사의 변곡점마다 그 흐름을 거꾸로 뒤집으려는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로 상징되는 반동적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금이야 사람들의 조롱거리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여전히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면서 여왕마마를 외치거나 세월호도 남한의 용공세력과 북한의 합작품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뱉는 자들이, ‘교수’나 ‘변호사’ 같은 호칭까지 두르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다. 거기에는 당연히 말을 삼가며 현재의 기득권 한 자락도 내놓을 수 없다고 버티는 이 땅의 상당수 엘리트층이 포함된다.

다시 묻는다. 이 땅에 정의(正義)가 살아있을까?

오늘날 정의는 주로 영어 저스티스(justice)의 번역어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지만, 정의(正義)는 말 그대로 바르고 옳은 것이다. 바른 것이 곧 옳은 것이기도 하다는 우리의 언어관행으로 보면,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하면서까지 그 올바름을 강조하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맹자가 정치[政]는 다른 것이 아닌 바른 것[正]이라고 말했던 것이나,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정의는 올바름이라고 말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인류 역사에서 정의만큼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치어(價値語)는 많지 않다.

그런데 정의는 다른 한편 그 논의의 출발점부터 그와 상반된 해석이나 수용을 동반했다. 맹자의 정의에 기반한 왕도정치에 대응하는 패도정치가 그렇고,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강자의 이익’이라고 답하는 트라시마코스의 생각이 그렇다. 지금 우리들은 그것을 자신들도 광주민주화운동의 피해자라고 억지 부리는 전두환ㆍ이순자 부부의 후안무치함과 그에 동조하는 일정한 세력을 통해 충분한 정도 이상으로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의 질긴 명줄은 아직 어린 국정농단 주범의 딸이 ‘부모의 돈과 권력도 정의’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게 하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이 땅에서 정의는 과연 무엇이고, 그것이 살아있기는 한 것일까? 우리 현대사의 시작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논의가 더 필요하지만, 1945년 광복이나 1960년대 공업화를 기점으로 잡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실질적으로는 후자가 더 적절해보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전자가 지니는 의미가 더 크다. 일제 강점기로 인한 근대화 과정의 지체와 왜곡을 떨쳐버릴 수 있는 외적 상황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광복을 우리만의 힘으로 맞지 못했고, 미군과 소련군으로 상징되는 점령군의 압박 속에서 남북분단과 각각의 정부수립이라는 불완전한 체제로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1950년에는 극한적인 대립인 ‘한국전쟁’을 맞게 됨으로써 파국적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 후 남북은 경쟁적으로 국민동원체제를 통한 일정한 성장을 이루었고, 각각 미국의 지원과 간섭, 탈피 노력, 중국과 소련의 갈등으로 인한 주체의 강조와 세습 독재체제의 지속 등으로 갈리면서 21세기를 맞이했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동학농민항쟁과 3·1운동으로 뿌리가 닿아 있는 정의 구현의 역사를 함께 써왔고, 그것이 4·19 학생혁명과 5·18 광주민주화 운동, 6월 시민항쟁, 그리고 현재의 촛불시민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정의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위대하면서도 숭고한 역사를 보존해내고 있다. 이 땅에 정의는 분명 살아있음이 다시 확인된 셈이다.

정의를 어떻게 유지해야할까?

“사상체계의 제1 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1 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정치(精緻)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진리가 아니라면 배척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전체 사회의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 … 인간 생활의 제1 덕목으로서 진리와 정의는 지극히 준엄한 것이다.”(존 롤즈, 황경식 옮김(1985), 『사회정의론』, 서광사, 25-26쪽)

우리가 힘들게 완성해가고 있는 시민사회의 정의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정치철학자이자 사회윤리학자가 있다. 그는 바로 1971년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이라는 책으로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 구조에 정면으로 도전한 존 롤즈(John Rawls)이다. 20년 동안 9편의 논문밖에 쓰지 않았다는 그는 그렇게 어렵게 쓴 논문들을 관통할 수 있는 단행본을 묶고자 했고, 그것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세기의 철학책이 되리라고는 아마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1977년 첫 번역서가 나왔지만 학계의 범위를 쉽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회 불평등이 급격히 심화되는 이명박 정권에서 그에 대한 비판자 중 하나로 꼽히는 마이클 샌델(M.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로 부각되면서, 잠시 관심을 모으기도 했지만 현재는 다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번역서 기준으로 600쪽이 넘는 분량과 공리주의와 직관주의 같은 윤리학 논의는 물론 정치경제학까지 넘나드는 그의 폭과 깊이를 쫒아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 다루어지면서 그의 이름과 함께 정의의 원칙을 기계적으로 암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교육의 비극적인 현실이자 사회의 민낯일 것이다.

“이제 원초적 입장에서 채택되리라고 생각되는 정의의 두 원칙을 잠정적인 형식으로 진술하고자 한다. …

첫째,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기본적 자유에 대해서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둘째, 사회적ㆍ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조정되어야 한다.
우선 그 불평등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사실을 합당하게 예측할 수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그 불평등이 개방된 직위와 직책과 결부된 공정한 기회에 개방되어야 한다.”(위의 책, 81-82쪽)

사회를 자유로운 시민들이 계약을 맺어 만든 것으로 보자는 계약론적 전통을 존중하는 롤즈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계약을 맺고자 하는 상황을 전제로 사고실험을 한다,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려면 각자가 처한 상황에 대해 모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그는, ‘무지의 장막(베일)’에 둘러싸인 계약당사자들의 원초적 상황을 가정한다. 그 가정 위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정의의 두 원칙이 바로 기본적 자유 영역에서의 평등 원칙과 최소 수혜자가 최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조건 속에만 정당화되는 차등의 원칙이다. 이러한 롤즈의 원칙은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공공의 영역에 대한 정당한 관심과 빈부격차의 제도적 해소 같은 방안까지 포함하는 공화주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첫 번째 원칙에는 ‘다른 사람의 유사한 자유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로크적 단서, 즉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범위가 타인의 비슷한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까지만 존중받을 수 있다는 자유주의의 기본 전제가 담겨 있다. 두 번째 원칙에는 공공영역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헌법적 요구가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정도 구현되어 있는 원칙이기도 하다.

“나는 앞선 논의에서 질서정연한 사회(well-ordered society)란 그 구성원의 선(good)을 증진시키기 위해 세워지고 공공적인 정의관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그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타인들도 동일한 정의의 원칙을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회요, 사회의 기본적인 제도들이 그러한 원칙들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만족시킨다는 것이 알려진 사회다. … 제도들이 정의로울 경우, 그 체제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정의관과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는 욕구를 갖게 된다.”(같은 책, 463-464쪽)

정의의 제도화라는 사회윤리적 과제

늦가을에서 시작해서 다음 해 봄까지 한 주도 빠짐없이 진행된 촛불집회는 우리들로 하여금 주권자라는 의식을 일깨워주었고, 그것을 온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평화로운 문화축제이자 정치마당으로 만들어감으로써 정치와 삶의 거리를 획기적으로 좁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 결과물은 일차적으로 대통령 탄핵 인용과 파면, 구속이지만 다른 한편 처절하게 공유해야만 했던 압축성장의 고통과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해낸 엘리트들의 허망한 화려함을 확인하는 근원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성과는 우리 모두의 상식적인 정의관, 즉 ‘정말 저것은 아니다’라는 정언적 판단에서 비롯된 실천의 결과물이다.

남은 과제는 그 실천의 지속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의 마련이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 제도와 관행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혁파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모든 법을 본래 목적에 맞게 간단하게 정비하면서 불필요거나 충돌하는 법은 과감히 없애야 한다. 그런 후에 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철저하게 묻는 제도와 문화가 사회 구석구석 자리 잡아야 한다. 모든 방향은 당연히 정의와 평화의 원칙에 맞춰져야 하지만, 이와 동시에 확실히 해내야 하는 과제는 윤리를 중심에 두고 살고자 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윤리문화의 시급한 정착이다. ‘윤리 귀환 시대의 요청’이라는 절박한 요구를 제대로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선출하고, 제도 확립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는 민주공화주의라는 헌법적 가치의 실현은 깨인 시민들의 정의감에 기반한 실천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할 뿐이다. 그것은 윤리적으로 살아도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도덕공동체 확립이라는 사회윤리적 과제와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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