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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앞 생명의 소리
  • 임지연 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
  • 승인 2017.07.15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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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비가 많이 내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농부의 마음 밖에 몰랐는데, 이제는 너무 많은 비로 하루아침에 집이 무너져 내린 이들의 마음이 그립다. ‘이 난리 통에 또 어디로 가야하나.’ 걱정이 태산이지만, 얄궂게도 잠들기 전 들려오는 빗방울 소리는 아름답기만 하다.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 잠을 청하려 할 때면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빗방울 때문에 목덜미를 적시게 되는 사람들”(브레히트, <순수예술에 관하여> 중)과 함께 이 빗소리를 듣는다. 삶의 아름다운 비극성.

빗소리로 감각이 깨어나서 그런지 문득 주변의 소리들에 귀가 열린다. 선풍기 소리가 졸음 겹다. 자동차 소리는 생긴 것답게 역시 좀 ‘쿨-’ 해. 비 그친 뒤 처마에선 왠지 모르게 똑똑 거리고, 새들은 재잘대고, 하교하는 아이들은 노래를 한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노래 소리도 참 오랜만이네.)

열거해 놓고 보니 식상할 정도로 익숙한 것들이지만, 귀가 열리니 그 익숙함 속에서도 ‘깜짝 놀라는 즐거움’을 경험한다. ‘역시 그렇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제 소리를 내고 있었지.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소리를 내지 않는 것들은 없어. 그런데 잠깐, 제 소리라고?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아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소리를 내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만물 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기 때문이야. 하나는 다른 하나와 조응하기도 하고 상충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지.’ 세상의 소리는 우리가 이미 타자와 관계 맺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명증하게 알려준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소리를 내고 있고, 그것이 곧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한다면, 전적으로 ‘소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내 귀에는 불쾌하게 들리는 소리라고 해도 그것은 한 존재가 살아가는 절절한 한 순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소리가 생생하게 교차하는 이 공간에 위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소리가 있을 뿐이다. '뜻 없이 흥얼대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 세상은 매일이 축제이겠지, 우리는 흥에 겨워 춤을 추곤 하겠지.'

생명 존재의 근간에서 매 순간 벌어지는 소리의 축제. 아름다운 모습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네 현실을 생각하면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자본과 권력의 부당한 압박에 의해 제대로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숨죽인 채 살아가는 사람들, 사회의 구조적 한계와 모순 속에서 서로의 소리를 뺏고 빼앗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인간중심적 문명으로 인해 점차 자신의 소리를 잃어가고 있는 뭇 존재들, 인간의 소리가 있던 자리를 계속 대체해 가는 기계 소리들, 이처럼 한 눈에도 축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경우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파트 외벽 공사를 하던 한 노동자가 추락하여 사망한 사건은 우리 사회의 소리 경험이 지니는 폭력성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작업 중 틀었던 음악 소리에 짜증이 난 주민이 그의 생명줄을 잘라 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주민도 마땅한 일감이 없어 일찌감치 술을 먹고 집에서 잠을 청하던 중이었다. 한 순간에 아빠를 잃은 다섯 명의 자녀들, 앞으로 남편 없이 홀로 가정을 꾸려가야만 할 아내, 아침까진 실업자였다가 이내 범죄자가 된 한 남자. 그리고 그 누구보다 조금 전까지도 공중에서 리듬을 타던, 그러나 이제는 가버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는 죽은 한 사람. 구할 것은 가난밖에 없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소리 하나 사라지면 세계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가 떠난 자리에 울음과 비통함, 한탄 섞인 어리석음이 남겨졌다. 이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과제는 역시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사진은 지난 7월 13일 '적광스님 폭행사건' 가해자 고발조치에 관한 기자회견이 끝난 뒤 참가자들이 조계사 앞 시위에 나선 모습. 불교포커스 자료사진.

실상 소리 자체는 잠시 현전했다가 일순간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속성 때문에, 생명의 증거로 인식되기는커녕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흘려듣기 십상이다. 영원히 사는 생명체란 존재하지 않듯이, 항구적인 소리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힘을 가진 자들은 소리의 이러한 특성을 매우 잘 이용한다 : ‘조금만 지나면 사라질 거야.’ 또한 냉소적인 자들도 마찬가지다 : ‘결과가 뻔한데 왜 이리 시끄럽게 하지?’

결국 한 사회의 소리 경험이 풍요로운 축제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태도와 싸워야만 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즐거운 축제의 장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라지길 바라는 부정의 힘에 맞서 제 소리를 내는 것으로, 또한 한낱 소음이라 생각했던 타자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들어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단순히 참고 인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활동이다. 타자의 소리는 참고 인내해야 할 소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참여와 공감, 대화의 대상이다. 사라져 버릴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제 소리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 끝내 사라져 버릴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는 것, 우리는 축제를 바로 이렇게 즐긴다.  

지금 조계사 앞에선 연일 생명의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의 명령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제하는 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제 소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 부정의 힘에 맞서는 축제를 열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의 질문, 서있는 사람들의 답변과 설득, 이것을 소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는 풍요로운 대화의 현장이다, 여기에는 불의에 대한 분노와 항의가 있다, 여기에는 입과 눈과 손과 마음과 행동으로 들려주는 부르짖음이 있다. 그 뿐인가, 여기에는 유머와 웃음, 시와 노래, 애타는 목마름과 해갈의 기쁨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땀이 있고 눈물이 있고 서로를 향해 내미는 손이 있다. 이것이 아니라면 삶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소리를 내자, 소리를 듣자, 그렇게 ‘살도록’ 하자. “불교가 사회의 희망이 되어 주세요.” 우리 사회를, 우리 불교를 살리는 생명의 소리가 듣고 싶다면 지금 당장 조계사 앞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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