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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피다

 너를 기다리는 이 시간
 한 아이가 태어나고 한 남자가 임종을 맞고
 한 여자가 결혼식을 하고 그러고도 시간은 남아
 너는 오지 않고
 꽃은 피지 않고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고 나는 다시 기다리기 시작하고
 시간은 힐끗거리며 지나가고
 손가락 사이로 새는 모래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소란스런 시간
 찻잔 든 손들은 바삐 오르내리며 의뭉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그러고도 시간은 남아
 생애가 저무는 더딘 오후에
 탁자 위 소국 한송이
 혼자서 핀다

- 권지숙 『오래 들여다본다』 중에서 -

뜨거운 습기 때문에 마룻바닥이 끈적끈적하더니만 어느 날 문득 가을이다. 빨랫줄에 널린 셔츠며 수건들이 뽀송하게 마르고 파란 하늘에 펼쳐진 새털구름이 날아갈 듯 가볍다

이 가을, 시인은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이런저런 일들로 번잡스레 때로는 마음에 없는 시간을 억지로 보내면서도 끝내 ‘너’를 기다린다. 정작, 내가 원하는 ‘너’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시간이 남는다(!)는 거다. 그리고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소란스런 시간’들을 견디고 난 연후, ‘생애가 저무는 더딘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작은 소국 한 송이’가 피더란다.

얼마만큼 절실한 것이면 바쁘게 살면서도 시간이 남는다고 느껴질 수 있을까? 그런 절실한 무언가가 내게도 있을까? 내게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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