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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도 보편윤리가 가능할까?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 읽기
  •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교수
  • 승인 2017.09.1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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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변화하는 환절기에는 몸과 마음이 제자리를 지키기 힘들어한다. 마음은 괜히 우울해지거나 맑은 하늘만 보고도 들뜨기를 반복하고, 몸 또한 감기나 훌쩍이는 계절성 비염을 불러내 몽롱한 하루를 보내곤 한다. 계절의 변화는 일상 속에서는 쉽게 잊곤 하는 시간의 하염없는 흐름을 몸으로 느끼는 계기이기에 그럴 것이다.

故 마광수 교수. 사진=마광수 교수 페이스북.

며칠 전 한때 우리 사회에서 공공의 적이었던 한 교수가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앓다가 자살했다. 젊은 시절에는 윤동주의 시를 부끄러움이라는 모티브로 명료하게 잡아내면서 천재학자로 칭송받았고, 그 칭송은 인문학자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20대 교수라는 지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삼십대 초반 자신의 모교인 연세대학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개성과 심도를 갖춘 강의로 수백 명의 학생을 불러 모은 인기교수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야릇한 느낌을 주는 책을 펴내면서 다른 의미의 관심 대상이 되었고, 결국 그 관심은 젊은이들을 성적인 타락의 길로 이끄는데 앞장선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고 대학에서도 쫒겨나는 신세로 전락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마광수’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던 그의 죄는 우리 사회의 도덕규범을 현저하게 흔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성윤리를 정면으로 훼손하면서 자신이 가르치는 젊은이들을 오염시켰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정말 그랬던 것일까? 아테네 청년들의 정신을 오염시킨다는 죄명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처럼, 그에게도 혹시 다시 평가해봐야 하는 다른 삶의 의미와 윤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윤리가 무엇일까’ 라는 물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윤리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새삼스런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쉽게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활용하기도 하는 그 윤리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의 삶을 그 윤리의 이름으로 송두리째 매도하기까지 하는 걸까? 우리 시대에 윤리(倫理)에 관한 단 하나의 정의(定義)를 만나는 일은 물론 불가능하다. 윤리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윤리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서 일관성 있게 관찰되는 두 차원의 정의를 추출해내는 일은 가능하다.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는 규범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과 연계되면서도 상대적인 자율성을 누리는 내 마음 속 열망의 차원이다. 우리말에서는 전자를 주로 도덕(道德)이라고 하고 후자를 학문적인 느낌까지 더해서 윤리(倫理)라고 해서 구분하는 경향이 있지만, 엄격한 구분은 당연히 가능하지 않다.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도덕규범은 역사성과 함께 상대성을 지닌다. 그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이루어온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현재까지 유효한 것이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반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각 문화권에 대한 탐색이 완료되면서 특히 그 상대성이 부각되어 문화상대주의를 윤리상대주의로 착각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각 문화가 다른 것처럼, 모든 도덕규범 또한 상대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덕규범은 법률로 제정되어 우리 삶 속에서 강제되는 법규범과 함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규범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법은 도덕의 최소한’ 이라는 명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양심과 함께 그 법규범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준거로 인정받기도 할 만큼 중요한 규범이다. 그런데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 도덕규범을 내 마음 속에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정말로 올바른 삶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인가를 따지고자 하는 윤리의 차원으로 넘어오면, 때로 그 규범조차 극복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편윤리의 가능성 또한 열리게 된다.

이 보편윤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붓다의 다르마(dharma)와 공자와 노자의 도(道), 소크라테스의 다이모이나의 소리 같은 오래된 개념들과도 만나게 되지만, 비교적 최근의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윤리학자와 만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그가 바로 임마누엘 칸트(Immmanuel Kant)다.

경험에 근거한 보편윤리는 가능하지 않다?

“‘너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명령은 가령 인간에게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에게도 타당한 것이어야 한다. 그 밖의 모든 본래적인 윤리법칙들도 다 그러하다. 그러니까 윤리적 책무의 근거는 여기서 인간의 자연본성이나 인간이 놓여있는 세계 안의 정황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오로지 순수이성의 개념들 안에서 선험적으로 찾아야 한다. 한낱 경험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다른 모든 훈계는, 심지어 어떤 관점에서는 보편적으로 보이는 규정조차도 경험적 근거들에 의지하고 있는 한 실천 규칙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결코 보편적 윤리법칙이라고 볼 수는 없다.”(칸트, 백종현 옮김, 『윤리형이상학 정초』, 아카넷, 2005, 68-69쪽, 강조는 필자가 한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와 함께 서양근대윤리학을 대표하는 윤리학자로 꼽히는 칸트는 윤리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에 토대를 두고 세워져야 한다는  공리주의와는 상반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인 이 인용문에서부터 윤리적 책무의 근거가 인간의 자연본성이나 그 인간이 놓여있는 상황 속에서 찾아질 수 없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어떤 인간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보편적 윤리법칙이 인간의 자연본성이나 문화 속에서 찾아질 수 없다면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다는 말일까?

칸트는 맹자처럼 인간의 본성 속에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본능적 욕구와 희미한 선의지가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 속에서 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본능과 그것에 기반한 강렬한 욕구이고, 선의지는 너무 희미해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칸트는 경험적 근거들에 의지하고 있는 한 실천규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 결코 보편적 윤리법칙이라고 볼 수 없다는 강한 입장을 표명하고자 한다.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 자신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위의 책, 132-133쪽)

우리에게 정언명령이라고 알려져 있는 칸트의 이 명제는 준칙과 법칙을 구별하는 데서 시작한다. 준칙은 나 자신이 생각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정해놓은 주관적 원리이고, 법칙은 객관적 원리로 인간을 포함한 이성적 존재자들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명령이다. 앞의 것은 임시적인 규칙이라는 의미에서 가언명령(假言命令)이라고 부르고, 뒤의 것은 반드시 누구나 따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든 윤리법칙은 보편적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꼭 준수해야 하는 명령일 수밖에 없다는 이러한 칸트의 주장은 사실 윤리상대주의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거부감까지 불러오기도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도덕 또는 윤리법칙의 근거를 하늘의 명령(天命)이나 다르마[法]으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했던 동아시아적 전통이나, 이데아나 절대자인 신으로 설정해왔던 서양적 전통 모두가 흔들리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늘 어떤 사태에 대한 판단을 하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해야만 한다. 그럴 때 남게 되는 것은 칸트가 믿을 수 없는 주관적 원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준칙뿐이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바쁘고 정신없는 우리 일상 속에서는 사실 각 상황에 맞는 자신의 준칙을 찾아내는 일도 쉽지 않고 그렇게 정한 준칙에 따라 행동하는 일은 더 어렵다. 그나마 평소 접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했을 때는 고뇌와 사색의 시간을 거쳐 가장 나은 준칙을 설정하려고 하지만, 다른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는 습관처럼 생각 없이 행동하거나 자신이 접하는 한정된 정보에 근거해 쉽게 결정해서 행동에 옮기곤 한다. 그런데 칸트는 윤리란 그런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판단과 행동을 요구하면서 꼭 따라야만 하는 정언명령이라고까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본능적) 경향성들의 모든 대상은 단지 조건적인 가치만을 갖는다. 왜냐하면 모든 경향성 및 그에 기초한 필요가 없다면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만약 그것들이 이성이 없는 존재자라면 단지 수단으로서 상대적 가치만을 가지며, 그래서 물건이라고 일컫는다. 그에 반해 이성적 존재자는 인격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 본성이 이미 목적 그 자체로, 다시 말해 한낱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을 표시하고, 그런 점에서 아무렇게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게 하는 존경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위의 책, 146쪽)

칸트의 정언명법이 현실 속에서 가능한지, 또 가능하다면 어떤 방법으로 실천할 수 있을지 하는 물음이 꼬리를 문다. 그럼에도 우리가 유한한 삶 속에서 진정한 의미 물음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자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 있고, 그 동의에 기반을 두고 현실 속 도덕규범이 지니는 힘과 영향력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간직할 필요가 있다. 때로 어떤 도덕규범은 인간다운 삶을 억압하는 기제가 될 수 있고, 실제 우리 역사에서도 식민지 노예도덕이나 국민윤리의 이름으로 그런 규범이 생명력을 갖기도 했다.

‘마광수라는 이성적 존재자’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이중성을 고발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왔다고 고백하곤 했다. 보편윤리의 핵심 요건은 바로 정직성과 일관성이고, 이러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과격한 도덕적 주장만을 펼치는 지도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널려 있다. 불행히도 종교지도자들도 전혀 예외가 아니다. 그런 지도자들은 세속인들보다 더 실정법에 호소하는 법꾸라지의 모습을 보이거나,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조차도 서슴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물론 그들도 시민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자신에게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 만큼 잘 살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는 의무가 동시에 주어져 있다. 또한 그들의 위태로운 삶이 우리의 삶과 분리된 것일 수 없다는 연기적 진리에 대해서도 충분히 유념해야 할 필요도 있다. 다만 종교지도자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있음을 받아들이는 최소윤리를 기대하고 싶을 뿐이다. 최소한 마광수교수는 그들보다는 나은 사람이었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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