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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ㆍ진도 종교문화 탐방 참가기“창(唱)과 무가(巫歌)가 어우러져 한판”
  • 이민용_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 승인 2017.11.2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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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

“호남의 들판을 지나며 논 자락 어느 끝에서 창 소리 한 곡 듣지 못했다면 너는 호남을 다녀온 것이 아니다.”라고 대학원시절 만난 한 동료가 말해 줬다. 전형적 호남 친구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춘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나중에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사업으로 성공한 그는, 나에게 호남을 창(唱)으로 대변(代辯)시킨 친구였다. 이번 종교문화 탐방의 대상이 일정한 종교단체거나 사건의 장소 혹은 인물이 아니라 해남, 진도 일대이라고 발표됐을 때 얼른 떠오른 것이 이 친구였고, 창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탐방은 창이 그렇게 호남지역과 얽혀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먼저 들른 미황사(美黃寺)는 흔히 명찰의 위치가 그렇듯, 계곡 속에 위치하지 않고 달마산 중턱에 올라 앉아 남해의 풍광을 아래로 관망한다. 높이 올라 앉은 자세이고, 바다를 내려다보는 오연한 모습이다. 나는 2000년대 초반에 30년 이민생활 끝에 혼자 귀국하여, 잊었던 산하 이곳저곳을 헤매다 이 절을 만났다. 그 때 미황사의 빼어난 산수에 넋을 잃고 나름의 한탄을 했다. 이 절에서는 결코 “득도(得道) 하거나 도인이 태어날 수 없는 장소”라고... 미황사가 위치한 아름다운 산하를 즐기기 바빠 어느 결에 수도승들이 도를 닦겠느냐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번 여행은 나의 고정된 생각과 이론적 해석이 현장의 상황을 뛰어 넘을 수 없으며, 이론은 현장과 구체적 사실에 의해 끊임없이 재수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야외강의 여행이었다. 우리의 연례종교 탐방이 항시 그랬듯이 말이다.

 [남도의 창(唱): 무가(巫歌)의 한 가닥]

첫째 날 오후에 우리는 미황사에 도착했다. 현지에서 조경만 목포대 인류학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주지스님인 금강스님과 차담(茶啖)을 나눈 다음에 지역 문화재 지킴이 박필수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부도탑에 조각된 엑스(X)형 등의 기하학적 격자 문양을 보며 얼른 전남 화순 운주사(雲住寺)와의 거리를 물었다. 두 절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운주사의 석탑의 문양이며 기하학적 도형은 아직 어느 미술사가도 석명(析明)하게 해설하지 못하고 있다. 그곳 와불(臥佛)의 특이한 모습이며 아무렇게나 조형화시킨 불보살상도 그렇지만 그곳의 기하학적 문양은 여전히 미궁인 셈인데 이곳 미황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미륵상이라고 긴 기둥에 간신히 얼굴모습을 새겨놓은 것 역시 운주사 근처의 미륵상과 닮았다. 마치 희랍 신화의 초기 헤르메스 신상과도 닮았다. 운주사만 특이한 것이 아니라, 해남지역 일대의 사찰이 본래 그런 변형된 가람들인 것 같다. 박필수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 미황사는 절 역할 이외의 또 다른 기능을 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박필수 선생 자신도 대학진학까지 포기하며 이곳의 전통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고 있으며, 집안 선대의 전통을 물려받았다고도 말했다. 그의 집안은 진도 세습무(世襲巫)의 가계를 잇고 있다. 그는 향토문화 지킴이와 창(唱)의 전수자를 자임하고 있고, 일종 무(巫)의 근대적 변모를 대변하고 있다. 우리가 숙박한 “설아 다원 게스트하우스”에서 이루어진 저녁 창 공연은 그의 이런 면모와 기량을 감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승미 게스트하우스 주인 겸 차원(茶園) 여주인과 박필수 선생의 공연은 무(巫)와 창(唱)에 대한 나의 무지가 수정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굿판의 사설에 나오는 가락과 노래들은 굿의 내용에 따라 달라지지만, 굿의 처음과 나중은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창은 무엇인가? 굿 가운데 노래 가락의 어느 한 부분만이 적출되어 음악적 효과와 소리를 드러내는 음악성으로만 공연된다. 소위 무가(巫歌)에서 뽑힌 한 가닥이 창이 아닌가? 준수하게 생긴 40대의 박필수가 장고를 두드리며 창의 멋진 가락을 뽑아내는 일과 온갖 색깔의 옷 조각을 펄럭이며 작두 위를 오르내리며 혼백이 전하는 사설을 타령하는 작업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일까? 굿판의 무가(巫歌)와 공연장의 창(唱)의 차이는 무엇이고 두 상이한 펼침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과연 어디 있어야 하는 것일까?

 [윤선도의 고장: 해남 윤씨의 전승]

답사 둘째 날 우리가 처음 간 곳은 고산 윤선도 기념관과 해남 윤씨 종가이다. 윤선도는 호남에 해남 윤씨의 굳건한 뿌리를 내리게 한 인물이며 해남 윤씨 종가는 오늘 날 호남명문가의 대표 격으로 운위되는 집안이다. 그런데 고산 윤선도 기념관에 전시된 윤두서의 자화상은 도상적 특징만을 나타내는 조선조의 왕들이며 승려들의 인물화들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어서 조경만교수의 주선으로 우리는 해남 윤씨의 적손인 어초은공 18대 종손(宗孫)인 다헌 윤형식 이사장을 면대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선대의 자산을 묶어 재단을 만들고 재단 스스로 이익을 산출하도록 애쓰고 있었다. 전통은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현장인 여기에서 작동되어야 하는 것임을 잘 보여주었다. 나이 구십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새로운 분야의 개발, 사업 영역의 확장을 계획하고 있으니, “돈 많고 집안 좋은 노인네”라는 나의 편견은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초분(草墳): 인생 마지막 길]

다음에 우리는 20여 년 전 KBS 다큐멘타리에서 초분(草墳)의 전 과정을 진행한 장본인을 찾았다. 예전에 진도 지역에서는 돌아가신 분을 3년간 초분이라는 움막의 볏짚 밑에 두어 육탈(肉脫)을 시킨 다음에 뼈를 수습하여 다시 묘에 안장시켜야 죽음의 의례가 끝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의 죽음들은 어떻게 장례로 이어졌을까? 죽어도 죽지 못하는 일이 지속된 것은 아닐까? 죽음은 있어도 장례가 상실된 죽음, 아니 영원히 죽음이 종결되지 못하는 끔직한 일이 매일 매일의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세의 기적과 전통의 발명]

그 다음으로 진도의 영등 축제의 장소를 찾았다. 진도의 대죽리 앞바다의 대섬이 하루 두 차례 썰물과 밀물로 해서 땅과 맞닿는 일이 벌어진다. 서해안 주변의 작은 섬들과 뭍에서 간혹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바이블의 이미지는 이미 우리 한국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관광 가이드 책이거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모세의 기적”이 운위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뽕할머니와 호랑이 두 마리가 있다. 여기에 형상화된 두 마리의 호랑이는 어떻게 설명될 것인지? 서로 연관 없던 것을 이어붙인 “전통의 발명”이 그 답변이다. 진도를 떠나면서 나는 비로소 세월호의 팽목항을 떠올렸다. 아, 진도에 갔으면 새로운 정치신화의 탄생지인 팽목항부터 들러야 했다.

 [무녀와의 대담]

이번 일정의 마지막 순서는 씻김굿의 전수자인 송순단과의 인터뷰였다. 그녀는 요새 굿해 달라는 주문이 없어 금년 들어 한 번도 굿판을 벌이지 못했다고 한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대응하고 있냐는 질문에, 그녀는 “집안의 근심, 걱정 또는 우환을 어떻게 하면 없애고 닥쳐 올 불운을 어떻게 막는가 하는 일이 굿을 하는 목적이고 그것이 주문인데 요즘은 옛날보다 더욱 이런 집안의 걱정이 쌓여있는데도 도통 그것을 풀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굿을 통해 마음에 맺힌 한과 걱정을 풀어주어야 그 재액(災厄)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주변 기독교 목사와 신자들이 가하는 공격에 대해서도 그녀는 유화적으로 대처한다. 기독교 목사들도 신도들에게 나름의 위로와 소원을 풀어주는 기능으로 자식들을 먹여 살리듯 자신도 똑같은 일을 수행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신도 이 굿하는 일을 통해 자식들에게 대학교육을 시켰고 이 생활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세월호의 비극을 달래는 온당한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바로 이곳에서 재앙이 일어났는데 죽은 혼령을 위로하는 합동제에서 어떻게 발레의 변형된 안무(按舞)를 통해 초혼을 하며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겠느냐고 그녀는 격앙된 감정을 드러낸다. 진도씻김굿의 문화재인 그녀가 초대되지 않은 일, 서구적인 춤의 변형을 공연함으로서 혼을 위로한 듯 처리한 관료, 행정가들에 대한 그녀의 하소연에 우리 모두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세월호 합동위령제는 정치적 공연이거나 예술적 공연일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굿판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안온(安穩)시키는 일이며 위령을 통해 한 단계 예술적인 승화가 이루어진다는 위령과 공연의 중첩성에 완전히 공감했다.

이번 일정의 모든 낱낱의 만남이며 우리로 하여금 이런 방향으로 생각의 실마리를 끌고 가게 해 준 조경만 교수의 연출(?)에 대해 감사할 뿐이다. 아마 이분이 아니었더라면 이번 탐방은 호남의 산수와 풍물을 즐기는 또 하나의 흔한 지역 관광여행으로 그쳤을 것이다. 인류학적인 현지조사에 근거한 그의 통찰력 덕분에 이 지역의 농축된 현장들이 우리의 종교학적 시각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본다.

아, 이제 나의 종교탐방의 현장을 떠날 시점에 이르렀다.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또 이번 탐방 프로그램 속에서 다른 참가자들은 어떤 경험을 한 것일까? 미황사의 정통 불교와 현지 무속 신앙의 이중성, 진도 굿판의 무가(巫歌)와 남도창의 이중성, 윤선도 시가와 조선조 유교관리의 이중성 그리고 새로운 신화의 발명 혹은 날조, 그리고 신화 창발의 계기...아무래도 우리에게 진도, 해남으로의 종교 탐방은 계속할 필요가 있는 과제일 듯하다.

이 글을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 497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이민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의 주요 논문으로는 <불교학 연구의 문화배경에 대한 성찰>,<서구 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고, 역서로《성스러움의 해석》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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