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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행복과 의미 상실의 시대에 『논어』 읽기
  •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교수
  • 승인 2017.11.2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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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늘 던져질 수 있고 또 던져지는 물음이다. 누구나 자신의 시대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 우리 인간들은 바쁜 일상을 뚫고 문득 스며드는 이 물음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또 다른 의미의 한계 또는 초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 물음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겉으로는 풍족하고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들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다. 고대 인도의 북부 지방에 위치한 작은 왕국의 왕자였던 고타마 싯다르타 또한 이 질문을 피해갈 수 없었고, 결국 그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출가를 감행함으로써 불교라는 새로운 가르침이 인류 역사에 더해지게 된다. 삶은 고통이고, 그 고통을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는 그 가르침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한 설득력과 감동으로 다가오곤 한다.

이런 근원적인 물음과 마주쳤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대체로 세 가지 정도이다. 회피와 무시, 정면 대결 등에 그 셋일 텐데, 많은 경우 우리는 회피와 무시의 태도를 택한다. 그러면서 당장 눈앞에 다가온 문제들에 몰두하는 일상으로 채우다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후회하거나,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몸부림으로 마무리한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는 꼭 정면대결이 필요한 물음인 것이다. 몸이 어른이 되어가는 사춘기 때 이런 침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우리 교육 상황 속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고 중년을 넘어서는 갱년기쯤에라도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일상 속 철학함의 가능성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라는 물음이 문득 스며드는 순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할 때, 우리는 철학함의 과정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철학함은 동서양의 철학사에 축적된 철학적 지식과는 무관하게 시작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동물적 한계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의미 물음을 던지기 시작하는 순간 부터 철학함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철학함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반드시 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과업이 되는 셈이다.

일상 속에서 철학함의 계기가 주어지는 것은 대체로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거나 하고 있는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이다. 물론 그런 특별한 계기 없이도 풍요로운 일상의 어디쯤에서 마주하게 될 수도 있지만, 앞의 두 경우는 생각하지 않으면 고통 자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세상 일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때, 우리는 혹시 계획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상황이 변하고 있는데 자신은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성찰해볼 수 있다. 인간관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상 속 철학함의 과정은 기본적으로 각 개인이 스스로 하는 것이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는 일이 가능하고 필요하기도 하다. 그 주변에는 친구나 스승 등이 포함되지만, 더 나아가 같은 상황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서 각자의 답을 제시해 놓은 철학자들도 포함된다. 그 중에서도 올바름과 좋은 삶에 대해 고민한 윤리학자들에게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윤리학자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서구문명의 주도권이 여전히 행사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윤리학자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나 임마누엘 칸트, 피터 싱어 같은 서양윤리학자들이다. 그들 모두 뛰어난 윤리학자들이고. 특히 합리성을 중심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답을 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의 도덕 판단과 감정 속에는 유교와 불교로 대표되는 전통이 포함되어 있는 데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우리는 개인의 합리성 못지않게 관계성을 중시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관계 중심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의 허물은 저마다 그가 속한 무리를 따르게 된다. 허물을 관찰해보면 그가 얼마나 인(仁)한지를 알 수 있다.”(『논어』 「팔일 편」)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를 만나면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 그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부모와 형제자매, 나이, 결혼 여부 등을 알고 싶어 하고, 나이를 직접 물어보기 어려우면 대학의 학번이나 띠를 묻기도 한다. 그런 모든 것들이 그를 개별적인 인간으로 보기 보다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전통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의 윤리학 전통에서 맨 먼저 등장하는 공자의 말 속에서도 그런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의 허물은 저마다 그가 속한 무리를 따르게 된다.’는 말을 우리는 스스로 맺는 관계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고, 거꾸로 그의 선함[仁] 또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자신의 삶이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관계 속에는 좋음과 나쁨이 모두 포함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관계로 인한 문제를 해결해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혹시 자신이 그 관계를 소홀히 했거나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한 것은 아닌지와 같은 반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가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공자는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을 자신의 내면속에 있는 선함, 즉 인(仁)의 자세를 다른 사람에게 확장해가는 것으로 제안한다. 그것이 바로 서(恕)이고, 이 서는 마음의 중심을 잡는 충(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공이 묻기를 ‘평생 동안 행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공자는 그것은 서(恕)일 뿐이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논어』 「위령공 편」)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스승에게 평생 동안 마음에 새겨 행동으로 옮기고자 노력해야 하는 한 마디가 무엇이냐고 묻자, 바로 그것은 서(恕)이고 서란 다름 아닌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답변하고 있다. 이러한 공자의 답변은 현재 우리 시민사회에서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최소도덕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가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할 때에 최소한으로 지켜야 하는 원칙이 바로 이 윤리인 것이다.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자신이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먼저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원칙으로 확장할 수 있다.

관계의 윤리, 독존(獨存)과의 조화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개인이 주체인 시민사회이다. 이 사회 속에서 관계 또한 기본적으로는 개인이 필요해서 맺는 것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 물론 가족 같은 최소한의 관계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점차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으로 되어가는 현상과 마주하고 있다.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가족관계 조차 서슴없이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 속에서 개인의 고유성과 존엄성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되는 것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죽음의 순간은 홀로 마주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의지와 역량은 필수적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는 각 개인의 생존을 각자의 몫으로 설정하고 있어 그 개인이 더 부각될 수밖에 없고,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혼밥이나 혼술 같은 개념들이 상징하는 것과 같은 개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개인화가 피할 수 없는 추세이고, 우리는 때로 관계에 얽히기보다 혼자 여행하고 자신만의 집을 구해 사는 것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삶의 영역에는 분명히 혼자만의 공간, 즉 독존(獨存)이 포함되어야 하고, 그 독존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의 의미 물음 같은 화두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철학함의 기회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과 함께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관계를 갈망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태어나 그 관계를 확장해가면서 세상에 자리를 잡는다.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관계성에 대한 본능적 열망 때문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君子)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논어』 「학이 편」)

공자가 생각한 이상적인 인간인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논어』 첫 문단의 마지막 부분이다. 스스로 많은 공부를 하여 내면적인 덕과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고루 갖추었다고 생각했을 공자는 불행히도 춘추시대 말기의 혼란상 속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상갓집 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대받기도 했고, 당시의 어떤 권력자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지를 걱정하라.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알아줄 만한 일을 하도록 노력하라.”(『논어』 「이인 편」)

시민의 행복과 군자(君子)의 즐거움

우리 시대는 시민의 시대이고, 따라서 공자가 말한 군자와 소인(小人)의 구분은 조심스럽게 재해석되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는 의로움과 이익 추구를 그 구분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시민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에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시민에게는 공공의 이익과 올바름의 지향이라는 윤리가 동시에 부과된다. 만약 모든 시민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시민사회가 존속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각 시민의 삶이 무의미하고 건조한 것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시민윤리의 핵심은 바로 ‘의로움과 이익 사이의 균형 잡기’라고 할 수 있다. 정당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와 그 관계의 총체인 공동체도 동시에 중시하는 자세가 시민윤리의 지향점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균형 잡힌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사실 빠른 속도감으로 전개되고 있는 우리 일상 속에서 이런 균형을 잡는 일이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목표도 아니다. 이 난관 속에서 떠올려볼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일이고, 그 행복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을 재해석해보는 일이다.

공자는 자신이 지향한 군자의 삶 속에서 누릴 만한 즐거움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시간이 되는 대로 배우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일이고, 둘째는 친구가 멀리서 찾아와주는 일이며,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위에서 확인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 것이다. 첫 번째는 자신의 내적인 삶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이다.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찾아와주는 친구를 반갑게 맞을 수 있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기보다 스스로 그런 능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느지를 성찰하는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시민들이 이끌어가는 사회 또한 여유와 행복이 넘치는 공동체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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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휴 2017-11-30 14:11:56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존경합니다!!   삭제

    • 헛똑똑이 2017-11-29 07:01:35

      박병기는 사드배치 반대 일인시위를 했다.
      박병기 같은 헛똑똑이들이 세상을 망친다.
      공자님 같은 성현의 말로 포장하여 자신의 우매함을 감추기에
      세상 사람들이 속아 그의 선동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차라리 흉악하게 생긴 폭력배가 낫다.
      속마음을 알아차리기 힘든 위선적 지식인들과 달리
      흉악하게 생긴 폭력배는 사람들이 그들이 폭력배라는 걸
      바로 알아차리고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병기가 광우병 파동 때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가장 위험한 것은
      겉으로 의로워 보이는 사악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휘두르는 정신적 폭력이다.   삭제

      • 호학 2017-11-25 17:59:19

        교수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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