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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흐느낌

 분홍색 흐느낌

 이 밤 마당의 양철쓰레기통에 불을 놓고
 불태우는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
 우르르 솟구치는 불씨들 공중에서 탁탁 터지는 소리
 그 소리 따라 올려다본 하늘 저기
 손가락에 반쯤 잡힌 단추 같은 달
 그러나 하늘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검은색,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일순간
 그해 겨울 용달차 가득 쌓여 있던 분홍색,
 외투들이 똑같이 생긴 인형들처럼
 분홍색 외투를 입은 수많은 할머니들이
 나의 몸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이제는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들이
 검은 하늘 가득 분홍색을 죽죽 칠해나간다
 값싼 외투에 깃들어 있는 석유 냄새처럼
 비명의 냄새를 풍기는 흐느낌
 확 질러버리려는 찰나! 나의 몸속으로
 다시 돌아와 잠잠하게 잠기는 분홍색 흐느낌
 분홍색 외투의 마지막 한 점 분홍이 타들어가고 있다
    
 - 신기섭 유고시집 「분홍색 흐느낌」 중에서 -

 

  겨울이 시작되는 이즈음이면 생각나는 시인 신기섭.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섬세하고 열정적인 문재(文才)라 주목받던 그였다. 그해 12월 첫눈이 내리던 날 출장 길. 시인이 탔던 영천行 고속버스가 폭설에 굴렀고, 스물여섯 그는 갑작스레 생을 마쳤다.
  봉천동 언덕배기 옥탑방에 살았는데, 풍에 걸려 거동이 불편한 탓에 빨랫줄을 잡고 변소를 오가야했던 할머니가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시인의 유년시절, 매 맞는 아내였던 할머니는 인형에 눈알을 붙여 할아버지와 그를 거두어 먹였던 분이다.
  시인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를 태우며 흐느낀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온몸에 사무쳐 그의 흐느낌도 분홍색이다.
  신기섭 시인 때문에 겨울 밤하늘이 분홍색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아련하고 먹먹한 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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