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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사람을 죽인다는데말 조련사 케시 이야기②

나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사람을 살리자는 분이 부처님일 텐데, 부처님 입에서 ‘사람을 죽인다’라는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인다니요. 나는 말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말의 목숨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말을 길들이려고 노력합니다. 어떻게든 말을 살리기 위해서 나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방법을 찾습니다. 죽인다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요, 어쩔 수 없이 그리해야 한다 해도 그건 최후에 택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당신의 뜻대로 길들여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도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특히 부처님으로서는.

“세존이시여,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언제나 생명을 아끼고 돌보라고 하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생명을 해치는 일이 가장 무거운 죄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도 그들을 죽인다’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목소리가 몹시 떨리고 있음을 나도 느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나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하셨는지 담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래는 생명을 죽이는 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은 죽인다고 말씀하십니까?”

“케시여, 길들여야 할 사람이 길들여지지 않는데 어쩌겠습니까? 부드럽게 길들여도, 거칠게 길들여도, 그 두 가지 방식을 섞어서 길들여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들어보십시오. 케시여. 어떤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여래는 그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릇된 일을 해도 충고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다가가서 무엇인가를 일러주지 않습니다. 여래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동료들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충고하지도 무엇인가를 일러주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자신의 부족한 점이나 그릇된 점을 인정하지 않고 완강하게 귀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을 해주지만 끝까지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생각하지도, 뉘우치지도 않는다면 무엇 하러 그에게 다가가겠습니까?”

삽화=마옥경

그렇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부처님이 흉기를 들고 생명을 해칠 리는 없습니다. 사람을 향해 적대감을 품을 리 없습니다. 오직 다른 이를 잘 되게 하고자 하는 마음, 다른 이가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오직 그 마음뿐인 분이 부처님입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여신 이후 평온하게 일생을 살다 가셔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굳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긴 이유는 사람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당신의 깨달음 한 모금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이 만나야 할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분이 부처님 당신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가장 쉽고 명쾌하게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분이 부처님 당신입니다. 어쩌면 말 조련사인 나도 당신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찾아온 것일 테지요.

그런 부처님이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을 해칠 리는 없습니다. 그런 부처님이기에 당신의 가르침 한 마디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놓칠 리 없습니다. 간곡하게, 간절하게 당신은 그를 설득할 것입니다.

하지만 듣고 싶어 하지도 않고, 들을 생각도 내지 않는 이에게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예 눈도 귀도 마음도 닫아 건 사람, 다양한 방편으로 다가갔지만 도저히 설득할 수 없는 상대는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 생명을 해친다는 것은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가장 마지막에라도 저질러져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나도 사람을 죽인다’는 말씀을 짚어보자면, 부처님은 결코 상대방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말조련사인 내게는 스승의 가르침이라는 법맥이 있습니다. 우리 말조련사 가문에서는 길들이지 못한 말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맥도 그럴 것입니다.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진리의 길을 걸어서 깨달음의 경지에 다가서지 못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설령 저 사람은 이번 생에 부처님에게서 조언 들을 생각을 전혀 내지 않더라도 다음 생도 있고, 그 다음 생도 있습니다. 그 어느 생에나 진리의 길을 걷는 수행자는 있을 테고, 깨달은 이는 나올 것입니다. 그 어느 생애의 길목에서 먼지처럼 하잘 것 없는 인연을 맺게 될 테고, 그때 그에게 다가가면 됩니다.

세세생생에 걸친 법의 인연까지 생각해보자면, 부처님이 그를 포기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려 부처님은 ‘나도 사람을 죽인다’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일 테지요.

나는 합장을 하고 부처님께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충고하려 들지도 않고 뭔가 일러주려고 하지도 않고, 나아가 그의 벗들도 충고하거나 일러주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리의 세계에서 죽임을 당한 자입니다.”

말을 조련할 때 이따금 놀라기도 합니다. 말들에게도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잘 길들여진 준마는 채찍의 그림자만 보더라도 조련사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달려갑니다. 그보다 덜한 준마는 채찍이 갈기에 닿아야 달립니다. 그보다 덜한 준마는 채찍이 피부에 닿아야 달립니다. 그보다 덜한 준마는 채찍이 살점을 깎아 피가 나야 비로소 달립니다.

사람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놓인 자리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절박하기 짝이 없는 심정일 때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간절한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런 사람에게 누군가의 한 마디 말은 힘을 줍니다. 들으려는 자에게는 들립니다. 찾는 자는 찾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립니다. 인생이 답답하다며 출구를 찾아 사방 벽을 두드리는 자에게 부처님은 그의 손을 잡고서 문고리를 만지게 해줍니다. 문을 여는 자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밝은 세상으로 나가는 이도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절박함이 간절할수록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속도는 빠릅니다.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단 하나의 관건은 문을 찾으려는 간절함입니다. 간절하지 않는 자에게는 진리도 쓰레기입니다.

나는 삶에서 무엇을 찾아다니는가, 얼마나 간절하고 다급하게 그것을 찾아다니는가. 그 마음부터 잘 챙겨야겠습니다. 노련한 조련사인 부처님이 여기 계신데, 길들여질 생각조차 내지 못하는 말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
불교경전에 담긴 이야기 중에서 말조련사의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곰곰 음미해보면 또 한 가지를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을 교화하는 부처님의 입장, 그리고 부처님에게 다가가는 말조련사의 교화되는 과정이 그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초기경전인 <앙굿따라 니까야>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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