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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갠지스 강을 가로막으려는 자 누구인가5금조치는 검열의 종합세트
  • 한만수 동국대 교수, 내부제보실천운동 상임대표
  • 승인 2018.01.30 16:50
  • 댓글 1
"조계종은 불교포커스와 불교닷컴의 중앙종무기관 등 출입을 금지해서는 안된다" 지난 12월 11일 법원이 내린 결정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결정에도 불구하고 조계종은 여전히 출입은 물론 취재ㆍ광고ㆍ접속ㆍ접촉 등 5금 조치를 일삼고 있다. 내부제보실천운동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한만수 동국대 교수가 조계종의 이 같은 현실에 일침을 가하는 기고를 보내왔다. <편집자 주>

무려 819일(1월 30일 기준)이 되었다. 한국불교의 가장 커다란 종단인 조계종단이, 타락한 일부 승려들을 비판해온 두 언론사(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에 대해 소위 ‘해종언론’으로 규정짓고 탄압했는데 그 나날들을 헤아려보니 819일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아득한 날짜이다.

불교포커스와 불교닷컴이 소위 ‘해종언론’이라고 조계종단은 공식 의결했다. 참 익숙한 장면이다. 권력이 진리와 정의, 그리고 대중적 동의에 의존할 수 없을 때 꽤 자주 동원했던 수법은 바로 ‘공공의 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우리’와 ‘저들’을 나누고 ‘저들’을 ‘우리의 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저들’로 불렀고, 일제는  ‘조센징’이나 ‘비국민’을 그리 불렀다. 냉전이 끝날 무렵에는 에일리언 등의 상상적 우주괴물이 ‘공공의 적’으로 호출되기도 했다.

이 프레임이 자리 잡고 나면, ‘저들’이 어째서 잘못된 것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별로 없다. 유대인이나 조센징 등으로 불리는 순간 그 존재들은 ‘적’(어린아이의 언어로는 ‘나쁜 편’)이 되고 마니까 말이다. 더구나 ‘해종언론’이라는 작명의 효과는 자못 탁월한 편이다. ‘나쁜 언론’이라고 이름 지은 셈이니, 그렇게 부르다보면 왜 나쁜 것인지를 굳이 설명조차 할 필요가 없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를 ‘나쁜 언론’이라 규정짓는 일은 이미 실패했다. 조계종단이 ‘해종’의 프레임을 고집하면서, 헌법적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고, 여론의 비난도 외면하며, 심지어는 법원 결정조차 무시할 수밖에 없었음은 그 단적인 증거이다. 무리하기 짝이 없는 이런 주장 때문에 오히려 조계종단이 상징자본의 심각한 추락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조계종단이 이 잘못된 결정을 고수하는 까닭은, 그만큼 강력한 권력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그 반대이다. 정당한 비판을 수용할 겨를이 없을 만큼 취약한 주체이고 스스로 불안에 떠는 권력임을 입증하고 있을 뿐이다. 누구도 헌법과 법원과 여론에 맞서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안간힘으로 버티는 자의 불안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구시대의 유물’ 같은 조치가 하필 불교계에서 일어났다는 점은 매우 가슴 아프다. 포살, 자자, 대중공사 등 진리공동체 구성원의 민주적 결정을 중시하는 전통은 불교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다른 종교들에서 진리와 정의에 대한 해석권이 특정 개인이나 세력에 의해 독점되기 일쑤인 것과는 대조적이며, 이미 2천여 년 전에 집단지성의 가치를 발견하고 제도화한 셈이 아닌가.

집단지성과 민주주의에는 자유로운 정보교환과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며, 종단이 방대해져서 구성원들 대다수가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라면 (교계)언론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언론의 자유는 불교적 가르침과 전통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일 터인데, 불교종단이 언론탄압을 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자기부정이란 말인가. 

덧붙이자면 이번 5금조치가 불교의 2천년 전통을 부정하면서 하필 독재정권의 ‘필살기’를 계승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꼭 정확한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필자는 80년대 신군부의 검열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학자가 된 이후 20여 년간 검열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왔지만, ‘취재금지, 출입금지, 접속금지, 광고금지, 접촉금지’라는 소위 ‘5금’을 망라하는 ‘검열의 종합세트’는 처음 본다. 일제 총독부도,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정권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심지어 취재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법원의 결정까지 나 몰라라 한다는 것이니, 세계 검열연구 학계에 보고하여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할 판이 아닐 수 없다.

갠지스강 전경. 사진=pixabay.

800일이라, 다시 헤아려 봐도 참으로 아득하다. 가장 커다란 출입처를 봉쇄당한 두 언론사와 기자들의 고통은 필설로 헤아릴 길이 없을 것이다. 물론 월급도 제대로 못 받을 터이니 가족들의 생활고 역시 심각하리라. 짧으나마 해직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 분노와 좌절을 아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면서도 두 언론의 고통을 함께하지 못했으니 ‘벗의 신음소리’(=자비)에 귀 기울이지 못한 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부끄러움을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게 마련. 종단권력이 ‘해종언론’이라는 굴레를 억지로 덮어씌움으로써 두 언론사는 ‘대항권력’으로서 널리 인식되기도 했다. 불교포커스와 불교닷컴은, (삐에르 부르디외에 따르자면) 경제적 권력을 잃었지만 훨씬 더 힘이 세고 오래가게 마련인 상징권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뒤르껨에 따르면, 이 상징권력은 사실 종교 특히 성직자에게 고유하게 배당되는 것이었다. 즉 성직자는 성스러움을 독점하는 ‘성/속의 이분법’에 의존하여 존경과 권위를 획득하게 마련인데, 이 이분법은 속스러움이 성스러움에 접근하고 오염시키는 일을 차단하지 않으면 붕괴될 수밖에 없다. 대표적 보기가 바로 중세말 교황청의 타락이다. 루터가 이를 비판하자 교황청은 파문으로 응대했으며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일부 승려들의 파계는 종교의 생명과도 같은 성스러움의 파괴이니,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두 언론사가 이를 비판한 것은, 불교를 지키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조계종단은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를 ‘해종’이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였으니, 비유컨대 루터를 파문했던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해종’으로 규정됨에 따라 두 언론사는 불교를 지키려다 핍박당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비유컨대 ‘언어의 갠지스 강’ 같은 존재가 된 셈이다. 

존 밀턴은 영국 왕이 출판허가령을 내리자 “공원 문을 닫음으로써 까치가 날아드는 것을 막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야유했거니와, 도대체 누가 갠지스 강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 강물은 다르마의 평야를 적시는 젖줄이 될 것이다. 불교포커스와 불교닷컴은 부디 이 강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길 기대한다. 권승들의 부패상을 비판하는 감시기능도 물론 지속되어야 하겠지만, 갠지스 강은 이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깊이와 색깔을 지니고 있음도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두 언론사가 부디 더욱 꿋꿋하고도 풍요롭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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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의 얼굴입니다. 2018-01-30 22:18:12

    명문사학 종립대의 얼굴이십니다.
    그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시고,
    정론의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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