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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 무슨 공덕을 지었는가?
창릉천 하구 행주산성 직전에 놓여 있는 강매석교. 사진=황찬익.

나주 영산포 인근 덕진강변에는 주막이 하나 있었다. 주막의 주인은 덕진낭자였다. 덕진낭자는 영암읍과 영산포 사이를 흐르는 덕진강 때문에 손님들이 건너다니기에 불편을 겪자 이곳에 다리를 놓을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몰래 땅에 항아리를 묻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덕진낭자는 평생소원인 다리 놓는 것을 착수하기도 전에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영암에 새 원님이 부임했다. 그런데 이 원님의 꿈에 매일 처녀귀신이 나타나 자신이 덕진낭자임을 밝히고 평생 소원이 덕진강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으나 놓지 못하고 죽었다며, 대신 원님이 다리를 놓아달라고 사정했다. 자신의 집 어디를 파면 항아리가 있으니 그 안의 돈을 꺼내어 써달라고도 했다. 원님은 그 말대로 덕진낭자의 주막에 가서 항아리를 발견하고 그 안의 돈으로 다리를 놓고 다리이름을 덕진교라고 불렀다. 덕진강변 마을에서는 지금도 단옷날이면 덕진낭자의 덕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원목다리를 보았느냐?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렇게 민간차원에서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많다. 다리공사는 예나 지금이나 큰 토목공사다. 조선시대에도 민간차원에서는 감히 엄두내기 힘든 큰 역사였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 후기에 들어 많은 다리들이 민간에서 만들어진 계기는 무엇일까? 더구나 그 많은 다리 공사 가운데 대다수가 스님과 불자들이 화주를 하거나 모금을 해서 다리를 놓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현재 남아 있는 옛 다리 60-70곳 가운데 사찰 안에 있거나 스님이나 불자가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다리가 무려 20곳이 넘는다. 고려 원종 14년(1273년)에 무안 법천사 고막대사가 세웠다는 함평 고막다리(보물 제1372호), 조선 영조 5년(1729년)에 순천 선암사의 초안스님과 습성스님이 세웠다는 벌교 횡갯다리(보물 제304호),  광무 4년(1900)에 홍수로 무너진 다리를 4명의 스님과 마을 사람들이 모금한 4,130냥으로 다시 지었다는 강경의 원목다리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논산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묻기를, “원목다리를 보았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논산에서 유명한 세 가지가 관촉사 미륵불과 개태사 철솥, 그리고 강경의 미내다리인데 때로는 미내다리 대신 근처에 있는 원목다리를 묻는다고….

염라대왕이 죽은 사람 붙잡고 다리 구경하고 왔냐고 묻는다는 것은 좀 뜬금없는 이야기다. 사실 이 이야기는 서산대사가 지었다는 회심곡의 가사에서 비롯되었다.

선심공덕 하마더니 무슨공덕 하였느냐,
배고픈이 밥을주어 기사구제 하였느냐,
헐벗은이 옷을주어 구난선심 하였느냐,
좋은터에 원을지어 행인구제 하였느냐,
깊은물에 다리놓아 월천공덕 하였느냐,
목마른이 물을주어 급수공덕 하였느냐,
병든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 하였느냐.

살아생전 무슨 공덕을 지었는가? 참으로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물음이 아닐 수 없다. 서산대사가 지었다는 이 회심곡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전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죽기 전에 너는 무슨 공덕을 지었는가? 서산대사의 이 뒷목 서늘해지는 물음의 원형은 다시 경전 속에서 발견된다.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와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부처님 어떻게 해야 공덕이 밤낮으로 항상 증장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죽은 후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원컨대 저를 위해 그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젊은이여. 공덕을 짓고자 한다면 동산에 과일 나무를 심으라. 그러면 나무에는 그늘이 많고 시원해 여러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으니 훌륭한 공덕이 될 것이다. 다리를 놓거나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게 해주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또 배고픈 사람들을 도와주는 복덕의 집을 짓고 보시를 하거나 우물을 파서 목마른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는 것도 방법이다. 객사를 지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쉬게 하는 일도 매우 훌륭한 일이다. 이렇게 하면 그 공덕은 밤낮으로 자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천상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법답게 정해진 계율을 지켜라. 그러면 그 인연으로 천상에 태어나게 되리라.”

젊은이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랜만에 훌륭한 스승을 뵈옵고 완전한 가르침을 배웠나이다. 이제 일체의 두려움을 버리고 이 세상의 갈애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잡아함경》 제36권-

창릉천 하구 왼편엔 방화대교가 오른편엔 행주산성이 있다. 사진=황찬익.

공릉천, 창릉천변의 비석 두 개

혹한의 겨울, 구파발로 향한다. 구파발은 예전에 파발이 있었던 동네라는 의미로 붙인 지명이다. 하지만 예전에 파발이 있었던 동네는 이곳 말고도 전국에 130 곳이 넘는다. 옛적 통신수단 중에 봉수대가 연기와 불꽃 신호로 변방의 위기 사항을 알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파발은 사람의 걸음이나 말을 가지고 문서를 전달하면서 중앙정부와 변방 간의 정확한 소통을 담당했던 수단이다.

파발을 통신수단으로 사용한 역사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나 갖추어져서 불과 400년도 채 쓰이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다. 구파발은 서쪽 의주로 통하는 40개 파발참 가운데 첫 번째로 당시에는 금암참(黔巖站)이라 불렀다. 지금의 구파발역 뒤편 인공으로 폭포를 조성해놓은 곳에 있는 바위이름이 금암이었기 때문이다.

이곳 구파발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더 가다보면 스타필드 고양 뒤편으로 흐르는 시내를 만난다. 창릉천이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송추로 넘어가는 효자동이 발원으로 이곳을 지나 행주산성 옆으로 한강에 스며드는 하천이다. 이곳에서 더 북쪽으로 가면 임진왜란 때 이여송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이 한양을 수복하기 위해 왜군과 처절하게 싸워 이겼다는 나즈막한 언덕이 나온다. 이 구릉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또 하나 하천을 만나는데 북한산 북쪽 송추에서 발원해서 파주 오두산 근처에서 한강과 만나는 공릉천이다.

이 두 하천은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배가 드나들 만큼 제법 큰 물길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에 다리를 놓았다고 하니 혹자들이 말하기를, “이곳은 발원지인 중흥사에서 10리나 떨어져서 계곡물이 합쳐져 배가 전복될 염려도 없는 곳인데 다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폄훼해서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근 북한산 산중에 있는 ‘진관사(津寬寺)’의 사명(寺名)도 나루 진(津) 자가 들어 있다. 너그러운 나루 즉, 강폭이나 강심이 어느 정도 있어서 평탄한 나루라는 뜻이다.

이 두 하천에도 불자들이 놓은 다리가 있었다. 삼송동 입구 못 미쳐 동산육교 아래 녹지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속여서 조명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밥할머니 석상이 서 있고 그 옆에는 몇 개의 비석이 서 있다. 이 중 하나가 〈덕수자씨교비(德水慈氏橋碑)〉다. 창릉천의 옛이름이 덕수천이니 창릉천에 ‘자씨교’라는 다리를 놓고 이를 기념해서 세운 비석이다. 비문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내용상으로 볼 때 당시 벼슬아치 중 하나인 듯싶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파릉에 믿을만한 선비 한 사람이 있으니 성은 조씨요, 이름은 선남인데 삐죽한 코에 이마가 툭 나온 얼굴이요 키는 장대하고 기개가 있었는데 젊어서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물에 다리가 없는 것을 보면 기필코 놓기를 꾀하여 평생을 노고하고 하루도 편히 쉬지를 않았다. 나는 검포군에 천등교와 금릉교가 있음을 알고 있는데 그가 놓았다 하며 또 안남부에 계양교와 천장교가 있음도 알고 있는데 이 또한 그가 놓았다고 한다.”

이때가 조선 효종 12년(1661년)이다. 조선남(趙善男)의 아버지 이름은 조막금(趙莫金)이라고 한다. 곧 소리나는 대로 읽으면 조막쇠다. 이름으로 볼 때는 양반은 물론이요 상민도 아니다. 비문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볼 때 조선남은 석공(石工)이다. 불교의 ‘선남선녀’에서 이름을 따와서 이름이 선남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가 이곳 고양에 다리를 두 개씩이나 놓았고, 그전에 김포와 계양에 이미 네 개를 놓았다고 한다. 그는 왜 다리를 놓았을까? 비문을 더 읽어본다.

“내가 조선남에게 들은 바대로라면 불씨(불자)들은 어쩌면 윤회설이나 인과응보에 혹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닐까? 아니라면 따로 구하는 바가 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덕수자씨교비. 창릉천의 옛이름인 덕수천에 놓였던 '자씨교'를 놓고 세운 비석이다. 사진=황찬익.

이쁜이, 개똥이가 세운 다리

비문을 지은 자가 조선남에게 들은 바대로라면 윤회설이나 인과응보에 혹하여 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다. 앞서 회심곡이나 잡아함경에 담긴 ‘살아생전 무슨 공덕을 지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하나는 부처님을 뜻하는 ‘자씨교(慈氏橋)’다.

앞서 고막다리나 벌교 횡갯다리, 강경의 원목다리가 스님이 주인공이 되어 놓였다면 이곳은 일반불자 가운데서도 무지랭이 천민인 조선남이 승려와 양반과 노비 등에게 화주해서 세운 것이다. 이는 이 두 비석에 새겨진 총 1,200여 명의 화주 명단을 봐도 알 수 있다.

'이고이동' 즉 '이개똥' 이름도 보인다. 사진=황찬익.

이두식 표기법으로 적힌 ‘伊分(이쁜이), 介叱同(개똥이), 末叱順(말순이), 加也之(강아지)’ 식의 이름들이 스님들의 법명과 양반이나 상민들의 이름자와 뒤섞여서 나란히 새겨져 있으니 이 비석의 명단에서는 조선시대 엄격했던 신분제도가 이미 무너진 것처럼 보인다.

아쉽게도 조선남이 세운 다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김포와 계양에 있었다는 네 곳의 다리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이곳에 남은 비석 두 기가 잊힐 위기에 처한 소중한 역사를 흐릿하게나마 간직하고 있다.

동산육교를 벗어나 삼송역으로 간다. 삼송역에서 고양시 마을버스 094번을 타고 성은농원 방향으로 가다 우남아파트 후문 정류장에서 내리면 우남퍼스트빌 아파트가 보인다. 옆으로 공릉천이 흐르고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는 지축역 쪽에서 흘러내려온 공릉천의 한 지류가 있는데 그 지류를 따라 100미터 쯤 걸으면 오른편 녹지 안에 비석 하나가 보인다.

덕명교비에는 지방수령과 관료들, 그리고 승려는 물론 기생이나 개똥이, 똥녀 등 천민들의 이름 700여 명의 이름이 빼곡히적혀 있다. 사진=황찬익.

두 번째 비석 ‘덕명교비(德明橋碑)’다. 자씨교가 창릉천에 놓은 다리라면 덕명교는 공릉천에 놓여 적어도 이곳 고양에서는 한양에서 개성과 평양, 의주로 향하는 길목을 완벽하게 이어주고 있다. 덕명교비는 자씨교비에 비해 마모가 심하지만 군데군데 이두식 이름자를 읽을 수 있다.

덕명교비를 등지고 다시 삼송역으로 돌아와 택지개발로 을씨년스러운 실개천 같은 창릉천변을 걷는다. 여기서 행주산성 동쪽 끝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까지 10킬로미터다. 왼쪽에는 서울도성의 외사산(外四山) 가운데 서쪽을 담당하는 봉산능선이 펼쳐지고, 오른편에도 봉재산, 봉대산, 봉태산 등 ‘봉’자로 시작하는 낮은 구릉성 산들이 널려 있다.

이 길 끝 행주산성에 다다르기 전 수풀 속에 숨겨진 다리 하나가 있다. 바로 옆 산인 강고산과 매화마을 누각인 매화정에서 한 글자씩 따서 동네이름이 강매동인 것처럼, 다리 이름도 강매리 석교다. 조선 영조 임금 때인 1755년에 발간된 〈고양군지〉에는 여기에 해포교(海浦橋)라는 나무다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놓인 돌다리 옆에 새겨진 글씨에는 ‘강매리교 경신신조(江梅里橋 庚申新造)’라 쓰여 있어 1920년에 새로 놓은 것으로 보인다.

교량 측면에 '강매리교 경신신조'라고 새겨 있어 1920년에 옛 나무다리를 대신해서 새로 돌다리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황찬익.

이 강매리 석교는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이 다리 이후 일제강점기나 해방 후에도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벌인 다리공사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강매리 석교는 고양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하지만 근대 이전 민간에서 저승 가기 전에 쌓아야 할 공덕 차원으로 만든 마지막 다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래 다리 옆에 유래를 새긴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한국전쟁 때 총탄에 부서져 땅에 묻히고 말았다고 하니 더욱 아쉽게만 느껴진다.

앞서 자씨교비에 비문 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더 이상 조선남이나 이쁜이, 개똥이가 짓는 월천공덕, 활인공덕, 급수공덕을 보기 어려운 세상에서 새겨 들어볼 이야기다.

“요로에 있는 사람들이나 죽반승(밥만 축내는 스님)들이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는 것이나 사욕에 눈이 어두워 공무를 배반하는 것에 비해 (조선남이) 현격하게 더 어진 것이다. 부자(공자)가 관중을 억제하면서도 그 공만은 취하여 인(仁)이라 하였으니 나는 비록 노불(老佛, 노자나 석가모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공까지 취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이 다리로 사람을 건네주는 공덕으로써 이 사람을 선인으로 불러도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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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2018-02-02 09:09:45

    시대인가?   삭제

    • 청정재가 2018-02-02 07:37:00

      맨마지막 갈색 문구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ㅠㅠ
      범계권승은 입장료 국가보조금 시주금 꿀꺽하기만 하고
      정작 범계권승에 입장료 국가보조금 시주금 내는
      청정재가불자들이 사회에 기여하고   삭제

      • 포커스독자 2018-02-02 07:34:21

        돌다리를 놔준 곳들이 전부 수도권과 호남이고
        지금은 불교세가 약한 곳이라는건 대반전이네요 ㅠㅠ
        이것도 후세 공덕 바라지 말라는 무주상보시로 봐야하나요?   삭제

        • 불자 2018-02-02 07:24:03

          황찬익선생님 불교답사기 출근길 지하철타면서 잘보았습니다. ^^
          앞으로도 많은곳 소개 부탁드립니다.   삭제

          • 좋습니다 2018-02-02 06:17:12

            산속 건물이나 불상 보는 기존 순례도 좋지만
            새로운 형식의 불교순례가 신선하고 참신하네요.
            아랫분 말씀처럼 유튜브 동영상으로 여행영상처럼 만들어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삭제

            • 포커스독자 2018-02-02 06:10:35

              돌다리 돌비석 답사기 흥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특히 고양시민들 매일 출퇴근길 지나다니는 자유로 다리아래
              이런 사연있는 돌비석 돌다리터가 있다니 놀랍네요.
              답사해보고 앞으로도 이런 좋은 답사코스 많이 찾아주셔서
              유튜브 동영상으로도 올려주시면 좋겠네요.
              요새 여행방송도 많이 뜨는데 (셀카봉에 스마트폰 달아서
              걸어다니면서 혼자 말하는 방송들 많죠)
              훌륭한 방송이 될것 같습니다.
              조회수 구독자수 많아지면 정모도 같이 하구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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