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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자와 죽이는 자의 세상에서스티븐 킹의 소설 '그린 마일 (이희재 옮김/황금가지)'을 읽고
사진은 오세암 백의관세음보살. 불교포커스 자료사진.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니라간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에는 ‘목이 파랗다’는 뜻이 있어서 한문으로는 청경(靑頸)관음이라 번역하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시퍼런 빛깔이 오싹해서 기괴하다는 느낌마저도 강하게 듭니다. 그런데 이런 목을 지니게 된 데에는 세속을 살고 있는 우리 탓이 아주 크다고 하지요.

온 세상 사람들이 어찌나 독기 넘치게 살아가는지…. 그 독기에 서로를 해치고 서로가 상처 입히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내뱉는 것은 전부 흉기가 됩니다. 뱉어내는 숨에도, 터뜨리는 말에도, 상대를 향해 내미는 손길에도, 몸짓에도, 글에도 따끔하고 서늘한 기운만 팽팽하게 넘쳐납니다.

관세음보살님이 보시기에 이건 좀 심했다 싶었나봅니다. 상대를 해치려드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관세음보살님은 그 독한 기운을 자기가 그냥 마셔버립니다. 그런데 중생이 내뿜은 독기가 너무나 셉니다. 관세음보살님이 들이마시긴 했지만 그걸 삼키자니 그 독한 기운에 당신이 절명할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뱉어낼 수도 없습니다. 중생이 다칠 게 빤하지 않습니까? 삼키지는 못하고 내뱉지도 못한 채 머금고 있으려니 그 독기가 차지한 몸의 일부분이 상하고 마는 것입니다. 퍼렇게 독이 배어들지요. 이런 관세음보살님을 청경관음이라 부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인도의 힌두신화에서 빌려와 불교적으로 바꾼 것이라는 걸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작가 스티븐 킹의 소설 <그린마일>을 읽는 내내 목과 얼굴이 시퍼런 청경관음보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독기를 들이마시는 남자가 소설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의 콜드마운틴에 자리한 교도소. 그 교도소 한 동의 넓은 복도 바닥에는 녹색의 낡은 리놀륨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푸른 길이라는 뜻의 ‘그린 마일’이라고 불리는데요,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사형수입니다. 길 끝에 마련된 전기의자에 앉아 자신의 죗값을 치르는 것이지요.

어느 날 이 교도소에 거구의 흑인남자 존 커피가 들어옵니다. 두 명의 백인 소녀를 성폭행한 뒤에 그것도 모자라 아주 잔인하게 살해했는데, 숨이 끊어진 소녀들을 양팔에 안고 있는 현장에서 붙잡힌, 극악무도한 범죄자입니다. 현행범이었으니 더 이상 조사할 것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시절은 사형을 예사롭게 했던 시절이었고, 인종차별이 심하던 때라 순진한 백인 소녀를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해친 흑인에게라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사형을 신속하게 집행합니다.

그런데 간수장 폴은 뭔가 석연찮은 점을 느낍니다. 저지른 죄만 보자면 사람의 탈을 쓴 악마와 다르지 않을 텐데 이 거구의 흑인남자 존 커피는 여느 흉악한 살인범과는 달랐습니다. 체념한 듯 조용했고, 심지어 담담하기까지 했는데, 더 이상한 것은 이따금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는 사실입니다.

간수장 폴에게는 남에게 툭 털어놓기 곤란한 병이 있었습니다. 소변을 눌 때마다 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점점 통증이 심해가서 견디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사형수들 앞에서 권위를 세워야 하고, 예사롭지 않은 직종인지라 교도관 부하들에게도 따뜻한 카리스마를 뿜어내야 하는 그로서는 몸도 마음도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형수 존 커피가 간수장을 부릅니다. 그러더니 자기 감방으로 좀 들어와 달라는 것입니다. 교도관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교도관을 위협해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간수장 폴은 갈등에 빠집니다. 하지만 겁을 먹고 경계한다는 모습을 내비치기 싫었고, 어쩐지 존 커피가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는 규칙을 어기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사형수의 감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존 커피는 가까이 다가온 간수장의 그 아픈 부위에 제 손을 가져다댑니다. 그 이후 지독한 통증이 간수장의 온몸을 휘어잡습니다. 하지만 고통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뿐, 그의 요도염은 가라앉았습니다. 온몸을 달구던 열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있던 존 커피의 모습이 변해 있었습니다. 몸을 숙이고 있는데 목이 불룩 솟아 있었고, 눈이 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구역질을 해대더니 새까만 작은 벌레들을 수없이 뱉어냈습니다.

“무슨 일을 한 건가, 덩치? 나한테 어떻게 한 거야?”

옆방 죄수들에게 눈치 채이지 않으려고 낮은 목소리로 묻는 간수장에게 존 커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도왔지요. 내가 도왔잖아요, 그렇죠?”

‘내가 도왔다’는 그 다짐. 여린 소녀를 둘이나 잔인하게 살해한 강간범의 이 말은 간수장의 뇌리에 깊숙하게 새겨집니다.

이후 이웃한 사형수가 기르고 있던 생쥐가 철없고 잔인한 다른 교도관의 발길에 짓이겨졌을 때도 존 커피는 팔을 내밀며 이렇게 외칩니다. 늦기 전에 어서 그 생쥐를 내게 건네달라고요. 거의 절명하기 직전의 생쥐는 존 커피의 두 손아귀에 넣어졌고, 그는 자신의 숨결을 생쥐에게 불어넣습니다. 축 늘어졌던 꼬리가 파르르 살아나더니 이후 생쥐는 다리를 조금 절기만 할뿐 예전과 다름없이 쪼르르 재롱을 부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교도소장의 늙은 아내의 치명적인 병조차도 존 커피가 치유해냅니다. 그녀의 입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대고 그 기운을 들이마시는 것이지요. 그녀의 독한 병을 자신이 들이마셔서 상대방은 살려내고 자신은 그 기운에 취해 거의 실신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알고 보니 존 커피는 남을 치유하는 주술사였습니다. 비록 피부가 검고, 배운 것이 없어 그 말이 세련되지도 논리적이지도 못하며, 몸집이 너무 커서 그저 무턱대고 남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기는 해도, 존 커피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이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이. 그러니 소녀들을 강간하고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 누군가가 저지르고 떠난 뒤 버려진 두 소녀를 살리려다 그만 타이밍을 놓쳤고, 조금만 빨리 왔더라면 이 여린 생명을 살릴 수 있었는데, 이들을 도울 수 있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살릴 수가 없자 절망하여 울부짖고 있었고, 마침 그 현장에서 붙잡힌 까닭에 그는 며칠 뒤 전기의자에 앉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누명을 쓰고 전기의자에까지 앉게 되었지만 그는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는 슬픔과 아픔이 너무나 많아서 견딜 수가 없으니, 차라리 자신을 빨리 끝내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소설의 마지막 즈음에 뱉어내는 그의 말은 이렇습니다.

“괴로움을 느끼고 듣는 데 난 지칠 대로 지쳤어요. 비에 젖은 새처럼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데도 지쳤고요. 같이 다니면서 우리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를 나한테 말해 줄 길동무 하나 없었어요. 서로에게 비열한 짓을 일삼는 사람들 모습을 보는 데도 지쳤고요. 내 머릿속에 꼭 유리 조각이 들어 있는 느낌이에요. 돕고는 싶었지만 결국 도움이 못 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이젠 지쳤어요. 어둠 속에서 지내는 데도 지쳤어요. 괴로움이 많습니다. 사방에 깔려 있어요. 괴로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데, 내 능력으론 벅차네요.”(520~521쪽)

존 커피는 인간들이 저지르는 사악한 살생의 현장에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해서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고 싶었지만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세상에 악이 만연해서 역부족이었지요.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그런 일은 널리고 널렸어요. 날마다 벌어져요, 온 세상에서.”(523쪽)

절에서 자주 염송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라간타다라니(Nilakantha Dharani)', 중국에서는 '청경대비심다라니(靑頸大悲心陀羅尼)'라고도 부른다. 청경관음보살님은 낯선듯 하지만 늘 우리와 함께했다. 우리는 언제쯤 청경관음보살님을 닮아갈 수 있을까. 사진=21회 불교미술대전에서 공예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김송자 作 '2각 찻상-신묘장구대다라니'

하루가 다르게 잔인한 사건들이 늘어납니다. 생명을 대하는 모습이 점점 잔인해져가고 거칠어져 가는데,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더욱 뻔뻔해져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1930년대의 존 커피는 세상의 사악한 기운을 빨아 들여도 빨아 들여도 세상은 오히려 더 사나워진다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그게 자기에게는 구원이라고 외칩니다. 그런 존 커피가 21세기에 나타난다면 무엇이라 비명을 지를까요? 판타지 소설과 공포 소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소설은 이런 잔인한 시대에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조차도 삼키지 못한 세상의 독, 그래서 시퍼렇게 변해버린 그 목과 얼굴은 언제나 고운 제 빛깔을 찾을 수 있을까요?

살리는 자와 죽이는 자.
남을 죽였기에 자신도 죽임을 당해야 하는 자,
그래서 죽을 운명에 처한 자와, 그런 자에게 상상을 초월한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는 간수.

이 팽팽한 대립에서 스티븐 킹은 ‘살리는 선한 자’의 무릎을 꿇렸습니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가슴이 아픕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건가, 이것이 사바의 현실인가. 부질없는 줄 알지만 희망의 메시지를 기다립니다. 그나마 경전을 읽어보면 세상이 사악해지다 종국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들 반성하고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경전의 그 말을 믿어봐야겠지요? 일단 무조건 믿고 싶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나 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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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이 현재 우리나라와 똑같고 2018-02-11 14:27:20

    우리나라를 두쪽으로 분단내고 전쟁일으켜 서로 죽이고 미워하게 하면서
    자신들은 막대한 무기를 팔아 패전국에서 강대국으로 군림하고
    분단되서 다 죽어가는 한반도를 다시 살려볼려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같은 존 커피같으신 분들은
    오히려 미국일본과 그 추종자들에게 종북 빨갱이로 몰려
    두분은 이미 돌아가신 모습이 딱 이 소설과 똑같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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