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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꾀에 넘어간 파순악마 파순의 여인들 ①
마왕 파순의 여인들. 삽화=마옥경.

유마경은 격을 깨는 경입니다.

격을 깬다는 것은 꽉 짜인 틀을 깨버린다는 말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세상이 제시하는 틀에 생각을 끼워맞추면서 살아갑니다. 그 틀 속에서만 살아왔기에 틀을 깨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 같아 절대로 틀을 깨거나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걸 벗어나면 세상에서 소외되는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마거사는 겁도 없이 세상이 제시하고 강요하는 틀을 부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닙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을 만나 과연 그런지 한번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숱한 사람들이 유마거사를 만나 깨집니다. 자존심이 구겨지고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는 말할 것도 없고, 수행 좀 했다는 이들도 여지없습니다.

지세보살은 탐욕과 욕정을 끊어버리고 조용한 방에 고요히 머물기를 좋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마왕 파순이 이 보살에게 장난을 치려고 찾아왔습니다. 아시다시피 경전에 등장하는 마왕 파순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지옥의 사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업을 지어서 그 과보로 욕계 천상에 나서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꽤 괜찮은 존재입니다. 다만, 천상의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 즐거움이 영원하리라고 착각하고서, 해탈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이를 방해하는 존재이지요.

조용한 방 안에서 욕망으로부터 멀리 떠나 한가하게 머무는 지세보살에게 바로 이 마왕 파순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슬쩍 제석천의 모습으로 위장했습니다. 그리고는 1만2천 명이나 되는 절세미인들을 거느리고 선정에 잠겨 있는 지세보살 앞에 나타났습니다.

지세보살은 못마땅했습니다. 그러잖아도 평소 제석천이 하늘의 쾌락에 빠져 지내고 있는 것 같아 한소리 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속도 모르고 제석천이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리고 자신을 찾아왔으니 ‘딱 걸렸다’ 싶었습니다.

“제석천이여, 전생에 지은 복덕의 과보로 쾌락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잊지 마십시오. 세상 모든 욕망은 덧없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제석천으로 위장한 마왕 파순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수행자인 지세보살은 눈앞에 나타난 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나름 근엄하게 상대를 질책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제석천(사실은 파순이지만)이 뉘우치는 양 공손하게 지세보살에게 말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지세보살님. 그렇다면 이 여인들을 받아주십시오. 집 치우는 일이라도 시키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지세보살은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습니다.

“당치 않습니다. 출가수행자에게 여인이라니요. 옳지 않습니다.”

바로 이때, 유마거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마왕 파순이여, 그 여인들을 내게 주시오.”

이 한 마디로 상황은 끝났습니다. 마왕 파순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차린 것입니다. 파순은 제 모습을 감추려고 애를 썼지만 유마거사 앞에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정체가 발각된 것도 모자라서 자기 권속인 1만2천 명이나 되는 여인들을 고스란히 유마거사에게 넘겨주게 됐습니다. 엄숙하게 수행하고 있는 지세보살을 놀리려던 마왕 파순은 결국 자기 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성과 속을 딱 금 긋고서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되고…’라며 분별심을 일으키고, 그 분별심에 스스로를 얽매는 수행자를 조롱하려던 파순 앞에 분별심을 넘어서 있는 유마거사가 나타났으니 말 그대로 임자를 제대로 만난 것입니다. 절대로 자기 권속을 넘겨받지 않을 것을 알기에 장난을 쳤는데, ‘준다면 고맙게 잘 받겠다’는 유마거사에게 파순은 어쩔 수 없이 제 입으로 한 약속을 지켜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지요.

그건 그렇고 저 수많은 하늘여인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요? 그동안은 마왕 파순의 권속으로서, 탐욕과 쾌락에 젖어 지내왔습니다. 수행자를 유혹하고 농락하라는 마왕의 지시를 따르며 한껏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삶이란 게 이렇게 즐기며 지내는 것이지, 이런 즐거움 말고 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살아왔는데, 한순간에 자신들의 주인이 마왕 파순에서 유마거사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유마거사는 ‘즐거움’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하긴, 사는데 즐거움이 없다면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법이지요. 다만 유마거사는 그 즐거움의 내용을 다른 것으로 채웠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즐거움, 수행하는 즐거움, 절제하는 즐거움, 마음에 번뇌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즐거움, 그렇게 자신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

경에서는 이것을 법의 즐거움(法樂)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쁜 옷을 입고, 달콤한 음식을 먹고, 흥겨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이성을 꾀는 즐거움이 아닌, 그렇게 때가 묻고 쉽게 무너지는 즐거움이 아닌, 법의 즐거움을 찾아다니라고 유마거사는 마왕 파순의 권속인 여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이 즐거움이요, 법문 듣는 일이 즐거움이며, 대중공양하는 일이 즐거움이요, 악지식을 막아내는 일이 즐거움이고, 선지식을 가까이 하는 일이 즐거움이며, 마음에 드맑은 기쁨이 샘솟는 것이 즐거움이며, 한없는 진리를 닦는 일이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누려야 할 법의 즐거움입니다.”(<유마경>)

아하, 세상에….
그런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그걸 이제야 알게 된 1만 2천 명이나 되는 여인들은 유마거사의 법문에 마음이 활짝 열리고 눈이 뜨였습니다. 여인들은 진리를 향해 눈을 뜨고 마음을 냈습니다. 유마거사는 이 여인들이 이제 예전과 같은 쾌락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인들은 더 이상 마왕 파순의 권속으로서 유희와 쾌락의 노리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수행자요, 제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깨지지 않는 즐거움을 찾아 나서는 한 사람의 수행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 여인들은 더할 수 없이 맑고 깨끗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마왕 파순이 슬그머니 끼어들었습니다. 그는 유마거사에게 말했습니다.

“거사님, 여인들을 돌려주십시오. 저 여인들은 내 권속입니다.”

지세보살에게 장난치려고 여인들을 주려 했을 뿐이니,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유마거사는 그런 마왕 파순에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이미 내 마음에서 버렸습니다. 데려 가시오.”

여인들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이제야 마왕의 쾌락의 동굴을 벗어나 떳떳하게 살게 되었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여인들은 소리쳤습니다.

“싫습니다. 다시 마왕의 궁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쾌락에 젖어서 살던 삶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그런 악의 소굴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유마거사님과 함께 맑고 깨끗한 수행의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여인들은 울부짖었습니다. 더없이 깨끗한 수행의 삶으로 막 들어서려는 찰나에 유마거사는 어쩌자고 자신들을 악의 소굴로 보낸다는 말일까요? 여인들이 저항이 거세지자 유마거사는 그들을 진정시킵니다. 그리고 차분히 이렇게 말합니다.

“끝없이 불을 밝히는 등불(無盡燈)이라는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그대들은 이 무진등의 가르침을 새기고 수행해야 합니다.”(계속)

이/미/령/의/사/람/이/經/이/다
불교포커스 여시아사(如是我思)

경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 사람씩 만나보려 합니다. 인물 하나가 경 하나입니다. 사람보다 더 귀하고, 사람보다 더 중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그래서 연재 제목도 ‘사람이 경이다’로 정했습니다.

경전번역가, 불교 칼럼리스트, 책 칼럼리스트, 불교교양대학 강사. 불광불교대학, 동산불교대학, 대전보현불교대학, 등에서 불교강좌를 맡고 있고, 현재 BBS 라디오 <멋진 오후 이미령입니다>, , 불교포커스 팟캐스트 <이미령의 책잡히다> 를 진행중이다. 책읽기 모임 <붓다와 떠나는 책여행>과 대안연구공동체의 직장인 책읽기반 등을 열고 책읽는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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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정현응마왕 2018-05-21 01:58:38

    부처님당시에는 마왕파순이 하나였으나 한국불교는 마왕파순이 수백명은 된다 이들을 어떻게 없앨까 조계종의 화두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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