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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설화가 담고 있는 무시무시한 '낙태'불교와 낙태-불교는 낙태 이전에 무엇을 말하는가_1
이 글은 계간 <철학과 현실> 2018년 봄호에 '불교와 낙태'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불교포커스는 <철학과 현실>의 도움으로 3회에 거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게재를 허락해주신 <철학과 현실>에 감사드립니다.

성자가 본 헛것의 정체는?

붓다에게는 그에 버금가는 높은 정신적 경지에 오른 성자(아라한)들이 제자로 많이 있었다. 성자들은 보통 사람들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있다. 번뇌를 완전히 끊어서 매우 평화로운 경지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은 기본이고, 더 나아가 신비한 체험도 예사롭게 한다. 예를 들면, 자기가 상대하는 사람의 수십, 수백 번에 걸친 전생의 모습들을 환히 본다든지, 혹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을 우리는 ‘헛것’이라고 부른다. 이게 단순히 환각상태에서 오는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좀 다르다. 성자의 눈에 비치는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눈이 없을 뿐이다.

이런 능력들을 신통력이라고 부른다. 붓다의 제자들 가운데 이런 신통력이 가장 뛰어난 성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대목건련(마하목갈라나, 줄여서 목건련 또는 목련이라 함)이다. 인품과 수행력이 뛰어났기에 ‘존자’라는 호칭을 붙이고, 위대하다는 뜻의 ‘마하’라는 말을 앞에 붙여서 마하목갈라나 존자라 부르기도 한다.

이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어느 날 아침에 탁발을 나가다가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형체는 인간 같은데 몸을 덮고 있는 피부가 없고, 생김새는 그저 둥그스름한 살덩이 같은 거대한 덩어리가 허공을 날아가는 광경이었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만약 단순히 헛것으로만 비쳤다면 비명을 지르고 달아났겠지만, 목갈라나 존자는 달랐다. 그는 이 존재의 정체를 한눈에 꿰뚫었다. 경전에서는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불교에서 성자의 미소 뒤에는 대부분 그에 따른 법문이 설해진다.)

마침 그 자리에는 다른 수행자도 함께 있었는데, 그 미소 짓는 이유가 궁금했다. 동료 수행자의 눈에는 그 ‘헛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하목갈라나는 자신이 본 것을 함부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성자는 원래 그런 법이다. 함부로 전생이니 내생을 발설하지 않는다. 묵묵히 탁발을 마친 뒤 마하목갈라나는 스승 붓다에게 나아가서 그 일을 고하였다. 붓다는 말했다. “그 중생은 전생에 이 도시에서 살았다. 그런데 수태된 생명을 떨어뜨렸다. 그 죄로 말미암아 그는 지옥에 떨어졌고, 백천 년 동안 한없는 고통을 받았으며, 지금도 그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잡아함경>(제19권, 512 墮胎經)에 실린 붓다의 말은 설명이 필요 없다. 낙태를 한 자가 어떤 과보를 받게 되는가를 일러주고 있다. 반듯한 사지를 갖추기 전에 유산당하는 태아의 처참한 현실이 낙태를 저지른 자에게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다. 낙태를 한 자는 유산당할 때 태아가 받았던 괴로움을 똑같이 받는다. 그것도 아주 오랜 세월동안 괴로움을 겪으니, 그게 바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일까.

아라한인 마하목갈라나가 그날 아침에 본 ‘헛것’은 분명 전생에 여인이었으리라.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임신을 했었고, 고의로 낙태를 했다는 말이다. 가임기 성인 여성으로서 유산의 경험을 가졌다면 머리카락이 쭈뼛 설만한 이야기다. “왜 여자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따지는 건 나중에 하자. 아무튼 불교에서는 낙태라는 행위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임신한 자가 낙태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지옥을 그냥 가는가? 갈만한 악업을 지은 이가 가는 곳이 지옥이다. 결국 낙태는 악업이요, 악업 중에서도 생명을 해친 무거운 악업으로서 지옥의 고통을 받는 무지막지하게 큰 악업이다.

불교설화가 담고 있는 무시무시한 낙태 이야기들

낙태와 관련한 이야기는 불교경전에 많이 등장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낙태를 둘러싼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있어 두 편 소개하려 한다.

첫째 이야기는 고대인도의 16강대국 가운데 하나인 마가다국을 세운 빔비사라 왕과 그 아들 아자타삿투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다.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까지 존립했던 마가다국은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강성했다. 그런데 초대왕인 빔비사라 왕이 아들인 아자타삿투 왕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아들의 모반은 왕가의 다반사라 할 수 있지만, 불교경전의 주석서에서는 여기에 가슴 아픈 전생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빔비사라 왕의 첫 번째 왕비였던 웨데히가 임신했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왕비는 왕의 오른팔에서 흘러나온 피가 먹고 싶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었던 왕비는 야위어갔고,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을 했음에도 수척해지자 걱정이 된 남편 빔비사라 왕은 그 이유를 캐물었다.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자신의 바람을 털어놓은 왕비. 왕은 “임신한 아내를 위해 그 까짓 쯤이야”하며, 스스로 팔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려 컵에 담아서 아내에게 마시게 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예언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왕비의 태속에 있는 아이가 장차 자기 아버지인 왕을 살해하리라는 징조였기 때문이다. 전생에 왕에게 죽임을 당한 수행자가 원수를 갚으려고 왕비의 태에 깃들었다는 것이다. 이 예언을 들은 왕비는 고민에 빠지고 만다. 자신의 몸 안에 제 아비를 죽일 원수를 품어서야 되겠는가. 하여 왕비는 낙태를 하려고 정원으로 나간다. 험한 땅을 골라 몸을 굴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왕비가 수도 없이 낙태를 시도한 그 정원은 훗날 ‘맛다쿳치(maddakucchi)’, 즉 ‘낙태가 행해진 정원’이라 불렸다.

왕은 왕비의 행동을 미심쩍게 여겼고, 그 이유를 알고 나서 달랬다. “태아가 사내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도 모르는데 죽이려 하지 마오. 아이를 낙태한다면, 그 잔인함으로 인해 온 세상에 우리의 명성이 추락하게 될 것이오.”

왕은 왕비가 낙태하지 않도록 감시자를 붙였고, 결국 아이는 무사히 태어나게 됐다. 하지만 아이는 훗날 제 아비를 옥에 가둬 죽음으로 내몰았고, 왕위를 빼앗게 된다. 이 이야기는 붓다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 <대불전경>(Ⅷ, 교화부 제5권. 밍군 사야도 지음, 최봉수 역주, 190~191쪽 축약 인용)에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낙태를 둘러싼 잔인하고도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금슬 좋은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 아내 쪽이 불임이었다. 부부 사이는 좋았지만, 시모와 주변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무조건 자식을, 그것도 아들을 낳아야만 하는 고대 인도 사회. 사람들은 후처를 들이려고 논의했고, 아내는 차라리 자신이 나서서 남편의 씨받이가 될 여성을 찾아 나서는 게 낫지 싶었다. 그래서 젊고 건강한 여성을 후처로 들여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어서 빨리 임신해서 아이를 낳으면 모든 일이 다 끝날 테니까.

본처의 정성 덕분인지 후처는 임신에 성공했다. 그 소식을 듣자 본처는 심란해졌다. 분명 자식을 낳으면 자신의 자리를 넘볼 텐데, 남편의 애정을 빼앗기는 것 또한 불 보듯 빤한 일 아닌가. 하여, 그녀는 후처에게 몰래 약을 탄 음식을 먹였고, 그로 인해 후처는 유산했다. 후처는 이후 몇 차례 임신을 했지만 그때마다 유산을 했고, 결국 그녀는 태아는 물론이요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을 지경에 놓였다. 그제야 전모를 알아챈 후처는 지독한 저주와 함께 절명한다.

“이제 나는 죽지만, 다음 생에 귀신으로 태어나 너의 자식들을 모두 잡아먹고 말리라!”

이 저주는 착착 들어맞았다. 죽은 후처는 곧바로 그 집에 고양이로 태어났고, 본처 역시 그 뒤를 따라 절명했다. 사실을 안 남편에게 맞아 죽은 것이다. 본처는 죽어서 곧바로 그 집에 암탉으로 태어났다. 고양이는 암탉이 알을 낳을 때마다 먹어 치웠다. 암탉은 고양이에게 이렇게 저주를 퍼부었다. “내가 죽으면 다음 생에 너와 네 자식들을 잡아먹겠다!”

원한을 품고 죽은 암탉은 표범으로 태어났고, 고양이는 사슴으로 태어났다. 표범은 사슴 새끼를 잡아먹었고, 사슴은 죽으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다음 생에 너와 네 자식들을 잡아먹겠다!”
사슴은 다음 생에 여자 귀신(야차)으로 태어났고, 표범은 여자 사람으로 태어났다. 야차는 이 여자가 자식을 낳을 때마다 잡아먹었고, 이 피비린내 나는 악순환은 결국 야차가 붓다를 만나 개과천선하면서 끝이 났다.

이런 사연은 <법구경(담마빠다)>의 다섯 번째 게송(揭頌)으로 정리된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아서는 원한이 풀어지지 않는다. 원한을 품지 않아야만 비로소 원한은 풀어진다. 이것이 영원한 진리이다.”

이 설화의 주제는 원한과 복수를 당장 끊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낙태가 얼마나 끔찍한 파국의 빌미를 마련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불교에서 다루고 있는 낙태는 이렇게 결코 사랑스럽지 않은, 끔찍한 피비린내를 풍긴다. 사실이든 우화이든 낙태에는 잔인하고 끊이지 않는 피의 보복이 따른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찌 이런 낙태를 할 수 있을까. (계속)

 -  불교와 낙태-불교는 낙태 이전에 무엇을 말하는가 2번째 이야기, <임신한 비구니, 낙태를 해야 할까>가 이어집니다.

이/미/령/의/사/람/이/經/이/다
불교포커스 여시아사(如是我思)

경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 사람씩 만나보려 합니다. 인물 하나가 경 하나입니다. 사람보다 더 귀하고, 사람보다 더 중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그래서 연재 제목도 ‘사람이 경이다’로 정했습니다.

경전번역가, 불교 칼럼리스트, 책 칼럼리스트, 불교교양대학 강사. 불광불교대학, 동산불교대학, 대전보현불교대학, 등에서 불교강좌를 맡고 있고, 현재 BBS 라디오 <멋진 오후 이미령입니다>, , 불교포커스 팟캐스트 <이미령의 책잡히다> 를 진행중이다. 책읽기 모임 <붓다와 떠나는 책여행>과 대안연구공동체의 직장인 책읽기반 등을 열고 책읽는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반론ㆍ정정ㆍ추후 보도를 청구하실 분은 이메일(budgate@daum.net)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불교포커스'에서 생산한 저작물은 누구나 복사할 수 있으며, '정보공유라이센스 2.0: 영리금지 개작금지'에 따릅니다. 정보공유라이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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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법해석에서 터졌다 2018-05-29 12:50:46

    "누구나 자기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말에 낚이지 마라. 권리를 얻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오히려 조지 버클리의 빈정대는 말을 기억하라. "소수만이 사유하지만 모두가 의견을 가질 것이다."
    _에드워드 크레이그,『철학』p.23   삭제

    • 2018-05-28 14:33:12

      심심하니까 낙태나하러가야겠다^^ 역시 여자한테는 나라도 종교도 없다. 부처고 예수고 둘이 남자끼리 후장으로 하다가 똥꼬나 찢어져라. 남자끼리하면 낙태위험은 없잖아. 영원한 윤회자체가 고통인데 애를 더 낳아 뭐하랴?   삭제

      • 포사타 2018-05-28 06:43:45

        1995년 논쟁이 생각남니다. 당시 이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불교계에 문의가 들어왔는데 무슨 인연에 따라 할수 있다고 했지요.
        다시 이 문제가 대두 되다니 불교적 원칙과 사회적 관계를 소름끼치게 느낌니다. 일단 경전을 근거로 정법으로 접근하고 해석하는 태도가 요청됩니다. 불교사회연구소가 이런 일에 자문해야 하는데 한심하군요 ...   삭제

        • 포사타 2018-05-28 06:39:23

          오계상경이라는 재가 계에서는 태아를 죽이려는 낙태는 상샐이라 했습니다.   삭제

          • 혜의 2018-05-26 21:29:07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21세기에 어설픈 민담같은 소리는 그만
            위의 글은 영아천도재 장사 중들이 좋아합니다.
            수자령이라나 뭐라나 천도재 장사중들은 말도 잘 지어내지.   삭제

            • 철학? 2018-05-26 19:55:09

              한국에 불교철학이 있나? 21세기 한국불교학이 문헌학이나 중세의 성서 주석학을 언제쯤 그만둘까? 개신교는 성경을 다시 읽어서 일어났고, 하이데거는 스승 후설을 벗어나며 자신의 일가를 이루었고, 라캉은 프로이트를 다시 읽었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다시 읽었는데 불교에 이런 경전 다시 읽기는 없는듯.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가 그냥 진리이자 장땡. 이런 게 폭력이지. 이러니 누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나? 말로는 열린 종교지만, 내부적으로 극보수주의에 아직 머물고 있는데. 아니지. 계율은 지들 맘대로 그냥 현대적으로 가네.   삭제

              • 이름 2018-05-26 19:41:48

                낙태가 개인적, 사회적 윤리의 문제와 산모의 건강권 그리고 페미니스트 진영의 여성의 신체결정권에 이르기까지 담론이 수없이 많은데 언제까지 2000여년 전 초기경전 이야기로 현실에 가져다대야 할까 싶네요. 차라리 경전을 비판적으로 딘시읽기하면 몰라도.   삭제

                • hwaeum89 2018-05-26 19:09:06

                  나는 모든 것을 보는데 낙태도 해봤고 낙태도 당해봤고

                  사람도 죽여봤고 죽임도 당해봤고 ...........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삭제

                  • 法應 2018-05-26 18:11:13

                    비나야잡사 등 경전에 나오는 일부 이야기들이 허무맹랑하며, 비논리 비과학적인 것 같으나 본질은 모두 현실의 인과에 대한 것입니다. 의미하는 바를 읽어야 할것입니다.   삭제

                    • 불자 2018-05-26 18:08:47

                      당시의 시대분위기를 감안해도 너무 여성차별적 설화라서
                      요즘같이 성평등의식이 깨어있고
                      여성을 더이상 임신 출산의 도구로 보기를 거부하는 추세에
                      역행하는 여혐종교 꼰대종교로 보고
                      안그래도 점점 줄어드는 젊은불자 더 줄어들지 걱정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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