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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를 해야 할까불교와 낙태-불교는 낙태 이전에 무엇을 말하는가_2
이 글은 계간 <철학과 현실> 2018년 봄호에 '불교와 낙태'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불교포커스는 <철학과 현실>의 도움으로 3회에 거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게재를 허락해주신 <철학과 현실>에 감사드립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임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를 낳을 형편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이야기는 바로 이럴 때 불교승단의 입장을 알 수 있는 실례다.
역시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 살고 있던 한 여성의 이야기다. 부유한 은행가의 딸이었던 이 여성은 세속의 삶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늘 출가해서 수행하고픈 바람을 지니고 있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부모는 엇비슷한 집안으로 딸을 시집보냈고, 그녀는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정숙한 며느리로 지냈다.

하지만, 수행하고픈 열망은 날마다 커져만 갔다. 남편은 아내를 말렸지만, 어느 사이 자신이 말려서 될 일이 아님을 알았다. 결국 남편이 직접 아내를 승단으로 데리고 가기에 이르렀다.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데바닷타라는 수행자 무리에 들어간 아내는 그토록 바랐던 수행자로 살아가게 되어 행복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녀의 배가 불러왔다. 출가 당시 임신 초기였는데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출가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스승으로 모시던 데바닷타는 배가 불러오는 여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데바닷타는 그러지 않아도 석가모니 붓다에게 고행에 가까운 엄격한 수행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규율을 강화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거절당했던 터였다.

데바닷타는 그녀를 승단에서 내쫓기로 결정했다. 비구니는 출가 전의 일이니 계율을 깬 것이 아니라고 하소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데바닷타의 승단에서 쫓겨난 비구니는 진짜 스승인 붓다가 있는 곳으로 가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붓다는 여성 재가신도 중에 수행도 고루 갖추었고 인격도 뛰어난 위사카에게 비구니의 몸을 잘 살펴서 정확한 수태 날짜를 헤아려보게 하였다. 많은 자식을 낳은 경험이 있는 위사카가 그 비구니 몸을 샅샅이 살폈고, 출가하기 전에 수태한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비구니가 출가수행자로서 계율을 깬 것은 아님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청정 승가에서 임신한 비구니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녀는 절대로 환속할 뜻이 없었다. 그렇다면 낙태해야 옳을까?

이미지출처_대한불교조계종구담사자모암홈페이지 http://www.gudamsa.org/

이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법구경> 주석서에 따르면, 비구니는 승가 안에서 그대로 지냈고, 그곳에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가를 방문한 왕에게 입양되었다. 훗날 비구니는 입양 보낸 아들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아이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그 역시 어머니처럼 출가자가 되었다. 출가자가 되어 성자의 자리에 오른 아들을 알아본 어머니 비구니는 세속 어머니처럼 모정에 휩쓸려 눈물범벅이 되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그 애끓는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출가한 신분임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짐짓 어머니를 향해 “출가자가 어찌 사소한 세속의 정에 얽매여 있습니까?”라며 매몰차게 대했고, 아들의 냉랭한 태도에 정신을 차린 어머니는 더 이상 아들을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으며, 수행에 정진하여 성자가 되었다는 후일담이다.

이 사연은 <법구경> 제160번째 게송에 대한 인연 이야기인데, 임신한 여성 수행자를 대하는 붓다와 불교승단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승단에서는 정식 남녀 승려인 비구와 비구니가 되기 이전에 남성은 사미, 여성은 사미니라고 하여 예비수행자의 자격을 준다. 사미와 사미니로서 일정한 기간, 입문 수행을 잘 마치면 계를 받아 남자는 비구, 여자는 비구니가 된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 사미니와 비구니 사이에 한 단계가 더 있다. 식차마나(正學女라고 한역한다)라는 2년 정도의 유예기간을 두어 행여 위에서와 같은 경우가 발생할까 미리 대처하는 것이다.

낙태는 여자만의 악업일까

앞의 내용에서 불교가 낙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임을 알 수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일을 가장 무거운 죄요 악업이라 여기는 불교는 특히나 낙태에 대해서 무시무시하게 경고한다. 그것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일이요, 지옥에서는 낙태 당한 태아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게 될 테니, 그 과보가 무서운 줄 안다면 낙태를 해야 할 것인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각자 판단하라는 것이다.

해라, 하지 마라가 아니다.
잘 생각해봐서 판단해라.

불교는 죄와 벌을 말하기 보다는 원인 제공에 따른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 즉 인과의 차원에서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낙태는 살생이니 끔찍한 결과를 불러온다. 그런데 그 끔찍한 결과, 가령 지옥에서 받는 고통과 같은 결과는 붓다가 내리는 형벌이 아니다. 행위에 따라오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이니, 그 결과를 이성적으로 잘 헤아려서 자신이 그 행위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그래서 낙태라는 ‘죄’를 논하기에 앞서 낙태라는 행위, 즉 ‘업’을 말해야 옳다. 초기경전을 읽어보면 업에 대한 붓다의 메시지가 참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선업과 악업에 대한 정의가 사전처럼 똑 부러지게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불자들이) 제각각의 생각대로, 제각각의 방식으로 업을 정의한다. 전생에 지은 죄로서,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팔자소관을 업이라고 생각하는 불자들도 많다.

업은 ‘일’이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는 일이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의도를 가지고 하는 ‘일’이다. 붓다는 어떤 사람의 행동에 의도(혹은 생각, 의지)가 깃들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중히 여긴다. 행여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더라도 그럴 의도가 없이 벌어진 일이라면 그에게 악업을 저질렀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일을 불러올지를 잘 살펴서 앞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선업과 악업에 대한 정의도 초기경전인 <니까야>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자주 설명하고 있다.

선업이란 나에게 이롭고, 남에게 이롭고, 나와 남에게 함께 이로운 일.
악업이란 나에게 해롭고, 남에게 해롭고, 나와 남에게 함께 해로운 일.

그러니 상식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로움을 위해 선업을 짓는 것이 자명한 이치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악업을 짓는 사람은 못된 사람이라기보다 무엇이 자신과 남에게 궁극적으로 이로운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란 말이 된다.

낙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낙태는 생명을 해치는 일이다. 불교에서는 여성의 몸에 수태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생명은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아니, 생명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쉬지 않고 인연을 만나 몸을 받고 살아가고, 그 몸이 부서지고 나면 또 다른 남녀의 교합의 순간을 만나 생명을 시작한다고 보고 있다. 생명이 아닌 것이 없고,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 있다.

한 생명이 수태에서 시작하여 현실적인 삶을 시작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딱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초기경전인 <맛지마 니까야> 38번째 경(마하탕하상카야 숫따)에 따르면, 첫째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교합, 둘째는 어머니의 월경, 셋째는 ‘간답바(gandhabba)’이다. 경전에서는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빠진다면, 수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교합은 남녀의 성교를 말하며, 어머니의 월경이란 바로 가임기 여성의 배란일을 말하며, 세 번째 조건인 ‘간답바’란 흔히 ‘건달바’로 한역되어 향기가 나는 곳에 사는 신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 경을 번역한 대림스님은 ‘그곳에 올 중생’이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주석서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경전의 내용으로 짐작하자면 경중을 가릴 수 없다. 정자와 난자, 그리고 그 둘의 교합에 들어와 섞이는‘간답바’로 한 생명의 수태는 이뤄지고 모태에서 안정적인 시간을 보낸 뒤 태어나서 지상의, 이승의 삶을 살아간다. 그 생명의 주인은 누구일까? 정자 제공자인 남자일까, 열 달을 품은 여자일까, 아니면 그 중간에 날아 들어온 ‘간답바’ 자체일까? 생명의 주인에게 허락을 받지도 않고, 누가 이 생명을 끊어버릴 수 있을까? 태아가 제 몸속의 것이라고 해도, 여성이 그 생명의 임자는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것이 불교가 수태와 낙태를 바라보는 관점이요, 낙태는 결국 한 생명의 살해라는 것이다.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佛說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이라는 긴 제목의 경에서는 참회를 아무리 해도 씻을 수 없는 큰 죄가 다섯 가지 있으니, 그것은 ‘아버지를 죽임, 어머니를 죽임, 태아를 죽임, 붓다의 몸에 피를 냄, 승가공동체의 화합을 깸’이라고 하였다. 낙태는 부모를 죽이거나 붓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일과 똑같이 무거운 죄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낙태가 여성의 몸과 정신에도 유익하지 않다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런데도 낙태를 해야 하는가?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고, 태아에게도 얼마나 잔인한 짓이며, 그래서 자신과 태아 둘 다에게 너무나도 지독한 고통을 안겨줄 텐데…, 그러니 낙태를 하는 여성의 경우,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악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악업을 짓고 싶지 않다면 낙태를 해서는 안 된다. 귀한 인연으로 자신의 몸에 깃든 소중한 생명을 어떻게든 잘 품고 낳아서 잘 키워야 한다. 그래서 그 아이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자라난다면, 바로 이것이 그 여성의 선업이다. 그 여성 자신에게 이롭고, 아이에게 이롭고, 여성과 아이 둘 다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 사람의 온전한 몫이니까. 자유의지를 가진 여성이 고민 끝에 업을 짓는데, 그걸 어찌하겠는가. 이것이 불교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말하면 여성들은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른다. 바라던 아이를 형편이 허락할 때 임신한다면 그 누가 마다할 것인가. 그렇지 못한 형편이어서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하는 것이 문제 아닌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어서 뱃속의 아이를 지우는 것도 오로지 여자만의 악업이요, 죄업이란 말인가. 안타깝게도 경전에서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붓다의 수많은 법문에서 이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추리할 뿐이다. (계속)

 - 불교와 낙태-불교는 낙태 이전에 무엇을 말하는가 3편,< 낙태시키거나 조장하거나 방임하는 자 모두 유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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