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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찌의 저녁

버찌의 저녁

그때 허공을 들어올렸던 흰 꽃들은 얼마나 찬란했던가 꺼지기 전 잠깐 더 밝은 빛을 내고 사라지는 촛불처럼 이제 흰 꽃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 자리에 검은 버찌가 달려 있을 뿐이다 가장 환한 것은 가장 어두운 것의 속셈, 버찌는 몸속에 검은 피를 담고 둥근 창문을 걸어잠근 채 잎새 사이에 숨어 있다 어떤 이는 이 나무 아래에서 미루었던 사랑을 고백하고 어떤 이는 날리는 꽃잎을 어깨로 받으며 폐지를 묶은 손수레와 함께 나무 아래를 천천히 걸었을 터, 누구도 이젠 저 열매의 전생이 눈부신 흰 꽃이었음을 짐작하지 못한다 지났기에 모든 전생은 다 아름다운 건가 하지만 한때 사랑의 이유였던 것이 어느 순간 이별의 이유가 되고 마는 것처럼 찬란을 뒤로한 채 꽃은 다시 어둠에서 시작해야 한다 흰 꽃은 지금 버찌의 어디까지 와 있는 걸까 그리고 저 버찌의 오늘은 얼마나 검은가

- 고영민 「구구」 중에서 -

사진=픽사베이.

아름답고 고운 벚꽃이 다 떨어지고 나면 맺히는 열매가 버찌. 그러니까 사실 새하얀 벚꽃 에는 이미 검은색 버찌가 들어있었던 거다. 누군가와의 만남도 마찬가지 같다. 만남 안에는 이미 헤어짐이 같이 들어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아주 슬펐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알아왔던 사람이 언제부턴가 내가 보낸 안부인사에 느지막이 간단한 답을 보내거나 때론 톡을 씹기도 했다. 너무 바쁘다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왜 그러느냐 제대로 묻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헤어졌다. 여여(如如)하고 익숙한 걸 좋아하는 나를 지루해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더러는 그런 내가 한결같아서 편안하다더니… 많이 울었고 오래도록 앓았다.

시인은 검은 버찌의 전생이 눈부시게 흰 꽃이었음을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했다. 사랑의 이유였던 것이 어느 순간, 이별의 이유가 된다고도 했다. 정신없이 사랑에 빠지게 했던 무엇이 이제는 헤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버찌 안에는 하얀 꽃이 들어있고, 내년 봄이면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피어날 거란다. 그러니 나 역시 어떤 어둠과 맞닥뜨리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도 작은 불꽃은 분명 빛나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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