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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특집] 아귀였던 어머니는 어떻게 천도되나우다라 비구의 어머니 이야기 ②
사진=픽사베이.

우다라 스님의 어머니가 아귀로 태어나서 온갖 괴로움에 시달립니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집백연경>에 실린 이 이야기에서 차분히 몇 가지 사항을 짚어보기로 하지요.

가장 먼저, 아귀로 태어난 어머니의 하소연 내용입니다.

살아생전 인색하기 짝이 없었고 여법한 부처님과 승가를 무시하고 조롱한 자신의 잘못(악업)이 ‘아귀도’라는 비참한 과보를 불러왔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인 아들에게 부탁해서 자신을 위해 음식 등의 공양을, 다시 말하면 삼보에 보시를 해달라고 부탁한다는 점입니다. 음식을 아귀에게 먹이는 것이 아니라 법답게 수행하는 분들에게 올리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많은 수행자들이 몰려들 것이요, 바로 그 때 자신의 지난 잘못을 뉘우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짚어보자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세 가지로 파악됩니다.

첫째, 보시의 중요성입니다. 풍족하게 살았음에도 인색하고 탐욕스러워 남에게 베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업신여기고 거짓말을 한 그 과보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하는 아귀신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보시’를 아주 많이 강조합니다. 물론 보시를 받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은 제대로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으로 오직 수행에 전념하기 때문에 재가자의 보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재가자는 수행자를 지극하게 보살피며 그들이 수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도록 돕습니다. 여법한 수행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진리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이어간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수행자를 돕는 것은 바로 진리의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재가자가 기꺼이 그 일에 나섭니다. 단순히 스님에게 공양물을 올려 공덕을 쌓는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재가자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보시한 셈이 됩니다.

부처님은 또한 수행자를 향한 보시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해서 돈을 벌어 스스로는 풍요롭게 삶을 영위하면서 한편으로는 늘 주변에 베풀고 살라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보시는 행복을 불러오는 주문입니다. <찬집백연경>의 우다라 스님 어머니는 바로 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를 업신여기기 까지 했습니다. 그 과보를 받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보시하지 않아 불행을 자초한 인과응보의 증인입니다.

둘째, 참회입니다.

부처님과 승가에게 극진한 공양을 올리는 자리는 바로 지난 날 자신의 인색함과 교만을 참회하는 자리입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그냥 무조건 다 뉘우치기 보다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또렷하게 인지하고 바로 그 악업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귀의 죄를 사해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불교는 누가 다른 누구의 죄를 없애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아는 상식을 갖추었고, 그럼에도 제 욕심만 차리느라 남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이것은 그릇된 행동이요, 남에게 해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에 따른 과보는 담담히 받아들이되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부처님에게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제가 경전(초기경전)을 읽으면서 확인한 참회의 원리입니다.

아귀로 태어난 그 어머니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인지했고, 뒤늦게나마 ‘보시’라는 새로운 선업을 짓습니다. 경전에서는 비록 아들이 음식을 공양올린 덕분에 어머니가 아귀도를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원리는 어머니의 뒤늦은 보시와 참회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아귀 세계를 벗어나 좋은 곳으로 가는 천도가 목적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한 수행으로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어머니는 도리천에 태어났지만 즐거움으로만 가득 찬 천상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런 행복한 과보를 누리는 이유를 찾아봅니다. 그 결과 아들이었던 우다라 스님이 자신을 위해 부처님과 승가에 갖가지 음식과 공양물을 올린 덕분임을 알게 됩니다. 그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부처님에게 내려와 천상의 꽃과 향을 공양올리고, 부처님은 그 천신에게 법문을 들려주어 성자의 첫 번째 단계에 들어가게 합니다. 아귀였다가 천상의 신이 된 어머니의 마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보십시오. 예전에는 늘 자신의 것을 움켜쥐며 화를 냈지만 이제는 아들 덕분에, 그리고 부처님 덕분에… 복을 짓게 되었다고 기뻐합니다. 도움을 받았으니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바로 그 자리에서 법문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성자의 첫 번째 단계인 수다원과에 들었다고 하니 이 어머니가 아라한이 될 날은 머지않은 듯합니다.

지금 전국 사찰에서는 주말마다 ‘선망부모’와 ‘조상영가’를 천도하기 위해 백중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선망부모란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요, 조상영가란 세상을 떠난 조상님의 영이란 뜻입니다. 이미 이승의 연을 다하고 떠나신 부모님과 조상님이 좋은 곳으로 잘 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음력 7월15일 백중(우란분절)을 앞두고 49일 전에 일곱 차례 재를 올리는 것이지요.

불자들은 이 우다라 스님과 그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와 아주 비슷한 목련존자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조상천도를 발원합니다. 아귀로 태어났을 지도 모를 조상님들에게 음식을 올리고 부처님 말씀과 경전구절을 들려주면 그 덕분에 조상님들이 좋은 곳으로 가리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찬집백연경>의 이야기를 음미하자면 불교의 ‘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귀도에 태어난 조상 바로 그 본인의 입장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색함을 인지하고, 후손에게 공양물을 보시할 것을 권하지만 그걸 아귀 자신이 먹지 않습니다. 후손은 조상님 덕분에 승가에 공양(보시)을 올릴 수 있어 선업을 지어 좋고, 아귀도의 조상은 후손을 통해서나마 뒤늦게 보시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참회하고서 그 결과 아귀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천도의 원리를 똑 부러지게 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건 죽은 자의 세계요, 죽음 이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전을 통해 본 천도의 원리는 딱 한 가지입니다. ‘본인의 보시’라는 선업입니다. 보시하지 않으면 괴로운 과보를 불러올 것이니, 보시해서 행복한 과보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삶에서 멈추지 말고 수행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현재 불교계는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뭐가 옳고 그른지 모르겠지만 그냥 하던 대로 절에 다니겠다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절 집안에 정나미가 떨어져 불자이기를 그만두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하나는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행여 더 이상 불자로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래도 선업은 지으시라고 말이지요. 이웃과 세상을 향해 마음을 다해 베풀고, 스스로는 오계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진정 바른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일은 그만두지 마시라고요. 우란분절까지 아직 재가 몇 차례 남았습니다. 이번 백중기도에는 우다라 스님과 그 어머니 이야기를 진지하게 음미하는 수행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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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시라 2018-07-29 11:07:16

    언제들어도 아름다운말중에 하나가 아닌가싶군요.
    팍팍한 삶에서도 인색이라는 틀을 깨고서 선업을 쌓게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극락과 지옥의 고통
    천당과 하나님의 심판
    율법의 통제성
    문명은 발전해서 손안에 대장경이 있음에도
    오히려 멀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시는 대상이 없다지만 기왕이면 수행스님을 보자는 것인데 앞으로 심각한 변화가 예상됩니다.
    존경의 대상이 있음은 겸손과 억제를 돕는 근원 일진대 이것이 무너지고 있음에 허탈합니다. 백중이나 다른 보시를 대신해 불우이웃에게 베푼다고 돈의 가치나 뜻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기로에 있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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